•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2. 1970년대의 기적 포항 제철
  • 현장에서 꽃핀 기술 습득
송성수

포항 제철은 해외 연수를 통해 조업 기술을 획득하는 한편, 공장 가동에 체계적으로 대비함으로써 정상 조업도를 조기에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건설공사가 끝난 뒤에 별도로 조업 및 정비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조업 요원 및 정비 요원을 편성하여 조업 요원이 건설 공사를 주관하고, 정비 요원이 공사 감독을 하는 체제가 구축되었다. 그 결과 조업 및 정비 요원은 공장이 건설되는 단계에서 이미 해당 설비의 내용을 숙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원활한 공장 조업과 설비 관리를 도모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포항 제철은 공장이 완공되기에 앞서 설비를 시험적으로 가동하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설비의 결함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1972년 10월에 완공되었던 열연 공장의 경우에는 1972년 8∼9월에, 1973년 6월에 완공되었던 제선 공장의 경우에는 1973년 2∼5월에 시운전이 실시되었다. 제선 공장의 시운전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던 것은 고로가 한 번 화입(火入)을 하면 가동을 중지할 수 없는 설비이므로 사전에 결함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태준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가 (제철소 가동 초기부터) 이익을 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설비를 조기에 시험 가동한 방법이다. 제철소가 완공되면 가동되기 전에 반드시 테스트를 거치고 미세한 조정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하면 보통 6개월이나 걸린다. 우리는 설치하면서 설비 전체를 테스트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기간을 3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

설비가 가동된 후의 조업은 각 공정별로 해외 연수를 받았던 대졸 엔지니어가 책임을 맡고, 다른 기술자 및 기능공이 보조원의 역할을 담당하며, 일본의 기술자가 자문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포항 제철의 대졸 엔지니어가 해외 연수에서는 조연(助演)을 담당했다면, 조업 현장에서는 주연(主演)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특히 포항 제철은 55세로 퇴직한 일본의 현장 기술자들을 1∼2년간 기술 고문으로 고용하여 조업을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풍부한 현장 경험을 전수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설비가 가동된 후 정상 조업의 단계에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항 제철 초창기에 제선 공장에서 근무했던 이일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제선 공장에서는 1973년 6월 8일부터 용선이 배출되기 시작했지만 6월 11∼14일에 누수(漏水)로 인해 고로 내부가 고체 상태로 되어 조업이 중단되는 냉입(冷入) 사고가 발생하였다. 포항 제철의 직원들은 출선구(出銑口)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순간적으로 단수를 한 후 급수 중에 물감을 탄 물을 주입하는 ‘물감 테스트’를 실시했지만 누수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는 신일본 제철의 퇴직 기술자로서 제선 공장의 기술 고문으로 있었던 하토리(服部)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출선구에서 누수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지만 하토리는 배수 지점을 압력계로 점검한 후 출선구가 아닌 송풍구(送風口)에 이상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또한 고로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해수(海水)를 사용하자는 견해도 있었지만 하토리는 담수(淡水)를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토리의 적절한 조언을 바탕으로 포항 제철의 직원들은 냉입 사고를 원활하게 수습할 수 있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현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했다.

포항 제철의 직원들도 제철소 현장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는 데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들은 교대 근무 시간에도 퇴근하지 않고 하루에 16시간 이상 현장에 상주하면서 원활한 공장 가동을 도모했으며, 조업상의 문제점과 대책에 대하여 스스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동료들과 공유하였다. 또한 포항 제철의 직원들은 조업 현장에서도 해외 연수의 경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일본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전수받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좀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하여 일본 기술자들의 발언 내용을 남김없이 기록했으며, 퇴근한 이후에도 일본 기술자와 접촉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다. 당시 일본의 어떤 기술자는 “우리의 주변에는 늘 공책을 들고 있는 포항 제철 직원이 있어서 마치 교주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특히 당시 조업 현장에서는 일본 기술자와 포항 제철 직원 사이에 파트너십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친분에 입각한 비공식적인 기술 학습이 촉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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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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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가동 초기의 사고가 수습되고 직원들이 공장 조업에 익숙해지면서 포항 제철의 기술 수준은 빠른 속도로 향상될 수 있었다. 제선 공장의 경우에 JG는 포항 제철소의 1고로와 규모가 비슷한 일본 제철소들의 조업도를 감안하여 1일 출선량(出銑量)이 설계 용량에 도달하는 기간을 설비 완공 후 12개월로 조언했지만, 포항 제철은 6개월 내에 정상 조업을 목표로 삼았고 실제로는 그 기간이 107일로 단축되었다. 또한 전로가 가동된 지 5개월 후의 출강률(出鋼率)은 1일 ㎥당 1.5∼2.0톤으로, JG가 제안했던 1.0톤을 크게 넘어섰으며, 열연 공장의 투입량 대비 산출량의 비율인 실수율(實收率)은 조업 1개월 후에 50%, 5개월 후에 90%로 계획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업 1개월 후에 92.6%를 기록하였다.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 이후에는 외국 기술자에 대한 의존도가 현저히 감소되었고, 4∼5개월 정도의 조업 경험이 축적된 이후에는 현장 기술이 충분히 습득될 수 있었다. 외국 기술자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했다는 것은 2기 사업부터는 JG와의 기술 용역 계약에서 조업 지도가 포함되지 않았고, 일본의 퇴직 기술자를 기술 고문으로 채용하는 계약이 1회로 종료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포항 제철은 제철소 가동에 필요한 기술을 조기에 축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기술 발전이 도입한 기술의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기술 도입 측의 주체적인 노력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표> 1980년경 주요국 철강 산업의 생산성 비교
구분 기준 연도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포항 제철
종합 실수율(%) 1978년 72 85 75 77(EC 전체) 81
에너지원 단위
(만㎉/톤)
1978년 765.0 514.1 630.0 627.5(EC 전체) 583.5
제품 톤당 노동
시간(시간/톤)
1980년 9.6 9.2 11.0 11.2 41.2 10.4
1981년 9.1 9.5 11.0 11.3 41.9 9.7

포항 제철의 조업 기술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향상되어 1980년경에는 세계적 수준의 생산성이 확보되었다. 1978년을 기준으로 실수율은 81%로 일본의 85%에는 뒤떨어졌지만 미국·서독·프랑스·영국을 앞서고 있 었다. 조강 1톤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에너지의 양인 에너지원 단위에서는 1978년에 583만 ㎉를 기록하여 일본을 제외한 다른 선진국보다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제품 1톤당 노동 시간은 1980년 및 1981년에 각각 10.4시간과 9.7시간으로서 미국 및 일본보다는 길었지만 유럽 국가보다는 짧았다. 당시에 미국·일본·서독·프랑스·영국이 자유세계의 5대 철강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포항 제철의 생산성은 일본을 제외한 다른 선진국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포항 제철이 빠른 속도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기술 인력을 관리하는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포항 제철은 우수한 대졸 엔지니어들을 조기에 확보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서울 공대·한양 공대·인하 공대 등 우수한 공과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들을 대폭 채용하였으며, 특히 서울 대학교 금속공학과 출신의 경우에는 거의 모두 끌어 모을 정도로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더 나아가 포항 제철은 대졸 엔지니어들을 제철소 현장의 반장(foreman)으로 배치하여 공장 가동을 직접 담당하게 하였다. 당시에 대졸 엔지니어와 같은 우수한 직원들을 일반 관리직이 아니라 생산 분야의 반장으로 활용했던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그들은 교육 훈련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현장에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장 조업의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을 사내 표준으로 정립하고 창의적인 제안을 통해 기술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포항 제철은 기능이 일정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을 특별히 대우하는 기성(技聖, Saint Technician) 제도를 구축하였다. 기성보(技聖補)에게는 과장 대우에 60세 정년이, 기성의 경우에는 부장 이상의 대우에 65세 정년이 보장된다. 그들은 동일 분야에서 계속 근무하면서 공장장에 대한 참모 역할과 해당 분야에 대한 직원 교육 등을 담당하며 연 1회 해외 연수를 비롯한 특별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는다. 특히 기성에게는 모든 자녀에 대한 교육 장학금과 주택 건립 자금이 지원되고 기성으로 10년 이상 근속할 경우에 는 자녀 특별 채용의 혜택도 주어진다. 정부가 1970년대 중반에 추진했던 기능 인력 우대 정책이 기업의 성의 부족으로 무위로 그쳤던 반면 포항 제철은 기능 인력이 경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통로를 제도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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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학 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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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소의 효과적인 건설과 가동으로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중화학공업화의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특히 포항 제철은 철강재를 국제 가격보다 10∼20% 낮게 국내 기업에 공급함으로써 다른 산업의 경쟁력 확보와 국민 경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포항 제철이 질 좋은 철강재를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매우 늦어졌을 것이다. 포항 제철의 성공은 국민의 정신적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패배주의가 만연되어 있었지만 1970년대를 통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포항 제철이 기대 이상으로 성공하면서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의 경제 발전에 대한 의지가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포항 제철 자신이었다. 이때 확보한 인력과 지식은 이후의 광양 제철소 건설 사업에서도 효 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광양 제철소 건설 사업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몇몇 제품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개념을 적용하였고, 공정(工程) 사이의 이동 거리를 최대한 단축하였으며, 동일한 사양의 설비를 반복적으로 설치하여 높은 수준의 기술 학습을 촉진하였다. 오늘날에도 광양 제철소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제철소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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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1기 건설 현장
광양 1기 건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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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소와 광양 제철소의 건설을 배경으로 포항 제철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포항 제철은 생산 규모뿐만 아니라 생산성 측면에서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4년을 기준으로 포항 제철은 연간 3020만 톤을 생산하여 세계 3위의 철강업체가 되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5년 연속으로 포항 제철을 세계 최고의 철강업체로 선정한 바 있다. 창업 30여 년 만에 세계 일류 기업으로 우뚝 선 것은 철강 산업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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