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안과 의사, 타자기를 만들다
김태호

광복 후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도 새로이 일어났다.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1949년 7월에 조선 발명 장려회에서는 상을 내걸고 한글 타자기를 공모하였다. 이 공모에서 대상은 나오지 않았지만 세 명이 2등상, 두 명이 3등상을 받아 자신의 발명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2등상을 받은 세 사람 중 한 명은 뜻밖에도 저명한 안과 의사였다.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 의원인 공 안과를 세운 공병우(公炳禹, 1906∼1995)이다.

공병우는 평양 의학 강습소를 거쳐 경성 의학 전문학교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일본 나고야 제국 대학에 논문을 제출하여 1937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8년에는 안국동에 공 안과를 열었는데, 그때 그를 찾은 환자 중에 국어학자 이극로(李克魯)가 있었다. 이극로와의 만남 이후 공병우는 한글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광복을 맞자 일본글로 되어 있던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고쳐 만들었으며, 자신이 예전에 썼던 안과 교재를 한글로 옮기기도 하였다. 공병우는 그 과정에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원익·송기주 등의 타자기를 써 보았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글쇠의 벌 수가 많아 능률이 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사인 그에게는 문필가들과는 달리 가로쓰기 타자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47년 5월에 직접 한글 타자기를 만들기로 결심한 공병우는 환자도 돌보지 않고 집에 작업실을 마련하여 영문 타자기의 개조 작업에 매달렸다. 그가 처음 시도했던 것은 가장 간단한 두벌식, 즉 자음과 모음 한 벌씩 만을 가진 타자기였다. 그러나 두벌식 타자기는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데 너무 많은 무리가 따랐다. 받침(종성)을 아래에 찍으려면 기계 장치도 복잡해지고 타자도 번거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공병우는 다섯 달 가까이 매달린 두벌식을 포기하고 초·중·종성에 각각 한 벌씩의 글쇠를 배당하는 세벌식 타자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반년 남짓의 연구 끝에 공병우는 1948년 2월에 쌍초점(雙焦點) 방식의 세벌식 타자기를 만들어 내어 특허를 출원했다. 이것은 초성과 중성을 움직글쇠에, 종성을 안움직글쇠에 배당하고, 타이프가이드(typeguide)의 왼쪽에 또 하나의 초점을 만들어 받침의 활자대를 왼쪽으로 유도하도록 한 것이다.

공병우는 한국과 미국에서 특허를 획득하고는 자신의 타자기 회사를 세우고, 미국에서 주문 제작해 들여온 자신의 타자기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에 대한 시장의 첫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글 전용 정책이 실시되기 전이라, 한자가 찍히지 않는 타자기를 이용하여 문서를 만들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또한 공병우 타자기는 속도는 빨랐지만 글자꼴이 들쑥날쑥하여 문서의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공서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시제품이 미국에서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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