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한글 타자기의 백화제방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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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타자기를 사용해 찍은 글자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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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사회와 민간에서는 공병우 타자기가 군에서처럼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공병우 타자기의 들쭉날쭉한 글자꼴은 네모반듯한 글씨에 익숙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낯설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무원들은 세벌식으로 공문서를 찍으면 위조나 변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세벌식 타자기 쓰기를 꺼렸다. 예를 들어 숫자 ‘이’나 ‘사’의 아래에 받침을 새로 찍으면 ‘일’이나 ‘삼’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신 긴 모음(받침이 없을 때 쓰는 모음)과 짧은 모음(받침이 있을 때 쓰는 모음)이 구별되는 타자기를 선호했다.

당시 공병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타자기 제작자들, 즉 김동훈(다섯벌식)·장봉선(다섯벌식)·백성죽(네벌식)·진윤권(네벌식) 등은 모두 이런 형태의 타자기를 시판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판매되었던 것은 김동훈(金東勳)의 다섯벌식 타자기였다.

김동훈은 공병우가 2등을 차지했던 1949년 7월 조선 발명 장려회의 한글 타자기 현상 공모에서 3등상을 수상했다. 그의 타자기는 옆자음·윗자음·긴 모음·짧은 모음·받침 등 다섯 벌의 글쇠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짧은 모음 글쇠가 안움직글쇠로 만들어져 그 자리에 그대로 받침을 찍을 수 있었다. 다섯벌식이었으므로 세벌식에 비하면 한결 네모반듯한 음절 글자를 찍을 수 있었다. 자판의 배치도 비교적 능률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경쟁자인 공병우도 다섯벌식 타자기 가운데 가장 능률적이라고 호평한 바 있다. 1968년 10월의 통계에 따르면 공병우식과 김동훈식 타자기는 행정 기관에서 사용하는 1만 1163대 가운데 각각 6702대와 4264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상 양대 제품의 과점 체제였던 셈이다. 공병우는 자서전에서, 한글 타자기의 호황기에 김동훈에게 두 회사의 통합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글 타자기 시장이 차츰 형성되면서 타자 경연 대회도 활발하게 열렸다.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한글 타자 경연 대회는 6·25 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문교부 편수국(국장 최현배) 주최로 열렸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네모반듯한 글꼴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타자 대회도 ‘속도 타자기’와 ‘체재(體裁) 타자기’ 두 부문으로 나뉘어 열렸다. 속도 타자기 부문은 공병우 타자기의 독무대였고, 체재 타자기 부문은 네벌식과 다섯벌식 타자기 사용자가 두루 참여했으나, 주로 김동훈식의 사용자들이 상을 받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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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경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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