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글’과 세벌식의 역습
김태호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기계식 타자기는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었다. 개인용 컴퓨터는 기계식 타자기가 해결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이제는 받침을 입력하기 위해 시프트 키를 누르지 않아도 프로그램이 알아서 세 번째 자음이 어디로 들어갈지 제자리를 찾아 주었고, 긴 모음과 짧은 모음을 구별하지 않아도 글자꼴이 네모반듯하고 예쁘게 찍혀 나왔다.

타자수들은 손에 익은 기계식 타자기를 제쳐 두고 새로 컴퓨터를 배웠다. 전국의 컴퓨터 학원·초등학교·실업계 학교 등은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느라 바삐 움직였다. 이들이 배우게 될 자판은 물론 새 표준 자판이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컴퓨터의 키보드에는 두벌식 표준 자판이 새겨졌다. 정부의 행정 전산망과 회사 정보화에 사용되는 프로그램들도 모두 표준 자판을 통한 한글 입력에 맞추어 만들어졌 다. 30년 가까이 끌어 온 자판 논쟁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곧 일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세벌식 자판은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 컴퓨터에 눈을 뜬 젊은이들 가운데 세벌식 컴퓨터 자판을 쓰는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벌식 컴퓨터 자판을 가르치는 학원이나 학교가 없을 뿐더러 세벌식 자판이 새겨진 키보드를 생산하는 회사도 없었고, 세벌식 자판을 어렵사리 구해서 익힌다 해도 세벌식 한글 입력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거의 없었다. 세벌식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불편함을 모두 감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벌식 사용자들은 PC 통신 동호회 등을 통해 세벌식 자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세벌식 자판 스티커를 나누어 가지고 세벌식 키보드를 주문 제작하는 열성을 보였다. 또 세벌식 한글 입력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없으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PC 통신 자료실 등에 올리거나 개발자에게 세벌식 지원 기능을 추가해 줄 것을 요청하곤 했다. 그 결과 정부의 행정 전산망 등에서는 세벌식 입력을 전혀 지원하지도 않았고 지원할 계획도 없었지만, 1980년대 말엽에는 민간에서 개발한 프로그램 가운데 세벌식 한글 입력을 지원하는 것이 제법 늘어났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사상 최대의 성공작, ‘글’이 있었다.

글은 1989년 이찬진(李燦振)·김형집·우원식 등 20대의 젊은 프로그래머들의 손으로 태어났다. 기존의 워드 프로세서를 훌쩍 뛰어넘는 기능·안정성·사용자의 편의를 중시한 구성 때문에 출시되자마자 소비자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1990년 설립된 한글과 컴퓨터사의 매출액은 1991년 10억 원에서 1994년에는 150억 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글은 1.0 버전이 출시되고 5년도 지나지 않아 한글 워드 프로세서 시장을 독점하며, 사실상의 표준이 되었다.

글은 다양한 기능 말고도, 한글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켰 다는 점에서 특이한 워드 프로세서였다. 글은 초기 버전에서부터 옛글자 입력을 충실히 지원했다. 컴퓨터로 옛글자를 입력할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이들도 별로 없었던 상황에서, 이런 신기한 기능은 사용자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또 글의 환경 설정에서는 매우 폭넓은 글자판 선택 기능을 제공했다. 한글의 두벌식(표준)·세벌식·네벌식은 물론 각종 유럽 어 자판에 영문 드보락(Dvorak) 자판까지 지원했다. 물론 많은 사용자는 글자판 선택 기능을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쳤지만,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이들 가운데는 “글자판을 선택해야 하나? 그러면 어떤 글자판이 좋은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PC 통신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세벌식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아 세벌식에 새롭게 입문하였다. 글의 프로그래머 박흥호(朴興鎬)는 프로그래머들이 자주 사용하는 특수 문자를 입력할 수 있도록 공병우 자판을 개량하여 거기에 ‘세벌식 390 자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도 글에서 쓸 수 있어서 많은 사용자를 새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글은 정부 표준 한글 코드인 완성형(완성된 음절 글자 하나에 여섯 자리 코드 하나가 대응되는 방식) 대신 조합형(초성·중성·종성에 각각 두 자리의 코드를 배당하고 그것을 합치는 방식) 코드에 바탕을 두었다. ‘桴’이나 ‘슝’처럼 기존 완성형 코드가 아우르지 못하는 글자들도 찍어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능은 전문가의 영역으로 여겼던 한글 코드 문제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엄연히 표준 자판과 표준 한글 코드가 있는데, 왜 이들은 조합형 코드를 내장했으며, 글자판 선택 같은 기능을 굳이 마련한 것일까? 글에서 옛글자 입력, 조합형 코드, 글자판 선택 등의 기능을 지원한 까닭은 일차적으로 한글이 지닌 모든 기능을 구현하고, 기존 타자기에 익숙한 사용자들을 흡수하고자 하는 프로그래머들의 의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흐름이 깔려 있었다. 바로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정부의 한글 기계화 방침에 대한 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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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 한글 입력 소프트웨어
세벌식 한글 입력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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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태어나던 컴퓨터 분야에서는 기성 전문가들의 의견이 꼭 옳지만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시대의 조류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더 건설적인 의견을 내놓곤 했다. 하지만 한글 기계화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서 정부에서는 전문가주의를 내세워 재야의 비판 의견을 묵살하곤 했다. 정통성 없는 정부가 보여 준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태도는 많은 이에게 정부의 한글 기계화 시책 전반에 대해 회의(懷疑)를 품도록 만들었다. 젊은이들의 눈에 비친 관료들은 행정적 편의를 추구할 뿐,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젊은이들은 하나둘씩 정부 표준이 아닌 재야 기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공병우가 있었다. 공병우는 세벌식 타자기가 공공 기관에서 배척당한 뒤에도 한글 문화원 등의 사설 기관을 차려 세벌식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을 계속했다. 또 컴퓨터의 한글 처리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여 간단한 한글 문서 편집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기도 했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PC 통신에 눈을 떠 세벌식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글을 하루에도 두세 개씩 통신망에 올렸다. 많은 젊은이가 PC 통신에 공병우가 올린 글을 읽고 그와 친교를 맺었으며, 세벌식 자판의 지지자가 되었다. 이찬진 등이 한글과 컴퓨터사를 세웠을 때에는 공병우가 한글 문화원의 공간을 선뜻 그들에게 빌려 주기도 했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사라질 줄 알았던 세벌식 자판은 새로운 젊은 사용자들을 얻었다. 그리고 이들은 ‘세벌식은 기계식 타자기 시절 임 시방편으로 만들었던 자판’이라는 비판에 맞서 ‘컴퓨터 시대에도 세벌식 자판은 여전히 우수하다.’는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초·중·종성이 구분되어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부합된다는 것, 받침으로 들어왔던 세 번째 자음이 다음 글자의 초성으로 넘어가는 일명 ‘도깨비불 현상’이 없다는 것, 받침만 따로 입력·출력·검색이 가능하다는 것, 조합형 코드와 잘 어울린다는 것(조합형 코드에서는 초성 ㄱ과 종성 ㄱ에 다른 코드가 부여되므로), 초성과 종성이 오른손과 왼손에 나뉘어 있으므로 연타가 적다는 것, 초·중·종성의 글쇠를 한꺼번에 눌러 입력하는 ‘모아 찍기’가 가능하다는 것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들은 심지어 기계식 타자기 시절에 세벌식의 단점으로 지적되던 것들도 새롭게 장점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글 쓰는 순서와 반대라서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비판받았던 우자좌모(右子左母)의 글쇠 배열은, 힘이 센 오른손에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인체공학적 설계로 재평가되었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것 같다.’고 웃음거리가 되었던 세벌식 글꼴도 한자 세대가 얽매였던 네모반듯한 글자꼴의 속박에서 벗어난 새 시대에 걸맞은 글꼴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컴퓨터 시대로 넘어오면서 두벌식 자판과 세벌식 자판의 속도 차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신세대 세벌식 사용자들이 이와 같은 논리를 개발하면서 글자판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50년대에는 가장 빠른 한글 타자기 자판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던 세벌식 자판이 1980년대에는 그에 더하여 한글의 창제 원리를 올바로 구현한 자판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한글 서체가 영어에 비해 다양하지 못한 것을 고민하던 인쇄 디자이너들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잡지 『샘이 깊은 물』의 표제와 같은 세벌식 서체를 만들어 냈다. 이는 글에 샘물체라는 이름으로 실림으로써 대중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글은 지금도 세벌식 계열의 서체를 여럿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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