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세벌식, 21세기에도 살아남다
김태호

세벌식의 역습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던 초창기에는 컴퓨터를 만질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프로그래밍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한글 기계화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윈도 95의 등장 등으로 컴퓨터의 문턱은 점점 낮아졌다. 컴퓨터의 구조나 프로그래밍 같은 것을 몰라도 남녀노소 누구나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윈도 시대에 컴퓨터를 익힌 이들에게 1980년대의 한글 기계화 논쟁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한글 카드를 따로 장착할 필요도, 한글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필요도 없었고, 윈도에서 완성형과 조합형을 절충한 유니코드(unicode)를 채택했으므로, 어떤 한글 코드가 나은지 따질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증하는 컴퓨터 이용자들은 대부분 가장 직관적이고 배우기 편리한 두벌식 표준 자판으로 컴퓨터를 익혔다. 세벌식 사용자들은 여전히 PC 통신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공간에서 엄청난 속도로 컴퓨터 사용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벌식은 작지만 소중한 성과를 거두었다. 세벌식 사용자들은 프로그래머들을 중심으로, 윈도 95에서 세벌식 한글 입력을 지원하도록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그 결과 윈도 95에서는 세벌식을 기본적 한글 입력 방식 중 하나로 지원하게 되었다.

윈도 운영 체제가 깔려 있는 컴퓨터라면 어디에서든지,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아도 한글 입력기의 속성 항목에서 두벌식 자판, 세벌식 390 자판, 세벌식 최종 자판(공병우가 최종적으로 개편한 자판) 중 하나를 골라 쓸 수 있게 되었다. 1948년에 태어난 세벌식 자판은 타자기 시절의 경쟁 자판이 모두 사라진 윈도 시대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것이다.

공병우는 1995년 3월 세상을 떠났다. 미리 써 둔 유서에 따라 그의 시신은 장례식 없이 의학 실습용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되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하던 그 해 1월, 하이텔에서는 그의 ID ‘Kongbw’가 탈퇴 처리되었다. 공병우의 사망 소식은 하이텔에 공지 사항으로 올랐고, 일주일 만에 5000여 명의 네티즌이 이 온라인 부음을 조회했다.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조회 수였다.

공병우 사후 10년이 지났지만 글자판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두벌식으로의 표준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벌식 옹호자들이 글자판 논쟁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은, ‘한글 자판은 한글의 창제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한글은 하나의 문자 체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전통 문화의 정수 가운데 하나이며 민족의 자존심이다. 따라서 한글 기계화를 둘러싼 논쟁은 순전히 기술적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효율성과 경제 논리 못지않게, 때로는 그것에 앞서, ‘한글의 정신’이 올바로 계승되었느냐는 질문이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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