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4. 반도체 신화
  • 첨단 기술에의 도전
송성수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1965년에 미국의 중소기업인 고미(Kommy)가 반도체를 조립하기 위한 합작 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페어차일드·모토롤라·도시바 등과 같은 기업들이 투자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성장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에 외국인 투자 회사는 모든 자재를 수입하여 이를 조립한 후 수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 기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국내 기업으로는 1970년에 금성사와 아남 산업이 반도체 조립을 시작했다.

이어 1974년 10월에 설립된 한국 반도체는 단순 조립을 넘어 웨이퍼(wafer)를 가공하는 데 도전했다. 웨이퍼는 반도체의 원료가 되는 둥근 막대기 모양의 결정을 말한다. 삼성은 1974년 12월에 자금난에 봉착한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산업에 처음 진출했다. 그 후 삼성은 전자 손목시계와 컬러텔레비전에 사용되는 반도체를 국산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당시에 삼성이 생산한 전자 손목시계는 ‘대통령 박정희’란 글을 새겨 외국 국빈들에게 선물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초반에 삼성·현대·금성(현재의 LG)과 같은 대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1982년에 정부는 전자 산업 육성 방안을 발표하면서 반도체의 국산화를 강조했다. 전자 제품에 널리 사용되는 반도체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도체 기술의 자립이 없이는 전자 산업의 발전이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일본의 대기업들이 반도체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미국에 필적하는 성과를 거둔 것도 상당한 자극으로 작용했다. 삼성은 1982년 9월에 전담팀을 구성하여 과거의 사업을 평가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전담팀은 그동안의 사업 성과, 향후의 시장 전망, 기술 발전의 추이, 기업의 수준 정도 등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국내에서의 업무 추진이 일단락되자 삼성은 1983년 1월에 미국 출장 팀을 구성했다. ‘반도체 신사 유람단’이란 별명을 얻은 그 팀은 대학·연구소 등을 조사하면서 반도체에 대한 최신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도 작성했다. 미국 출장 팀의 보고서를 검토한 후 이병철 회장은 1983년 2월 8일에 소위 도쿄 구상을 통해 첨단 반도체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공표했다.

그러나 도쿄 구상이 공표되자 수많은 우려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사업성이 떨어지고 돈도 많이 드는 반도체를 왜 하겠다는 말인가. 차라리 신발 산업을 밀어주는 게 낫다.”는 견해도 있었다. 일본의 반도체 관계자들도 삼성의 결정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선진국과의 격심한 기술 격차, 막대한 투자 재원 조달의 부담, 고급 기술 인력의 부족, 특수 설비 공장 건설의 어려움 등과 같은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첨단 반도체에 도전하게 된 데에는 이병철 회장의 신념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6년에 발간된 『호암자전(湖巖自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구가 많고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길은 무역입국(貿易立國)밖에는 없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세계적인 장기 불황과 선진국들의 보호 무역주의 강화로 값싼 제품의 대량 수출에 의한 무역도 이젠 한계에 와 있어 이를 극복하고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 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서 자동화·다기능화·소형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여기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반도체 비중이 점차 커져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반도체 개발 전쟁에 참여해야만 한다. 반도체는 제철이나 쌀과 같은 것이어서 반도체 없는 나라는 고등 기술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첨단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는 결정을 내린 후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어떤 제품을 개발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반도체는 제품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각 제품이 요구하는 기술 수준이나 시장의 크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삼성의 내부 상황으로 보면 비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당시에 삼성은 가전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으며, 삼성이 그동안 기술 개발을 추진해 온 분야도 가전용 중심의 비메모리 반도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했다. 내부적인 수요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수익을 낼 수 있는 품목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예측에 의하면 메모리 반도체는 1982∼1988년에 연평균 28%의 고성장을 통하여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해 나갈 제품이었다. 또한, 메모리 반도체는 특성상 표준형이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투자 회수 기간이 짧아 재투자의 여력이 높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아울러 메모리 반도체는 원천 기술에 비해 응용 기술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은 후발국도 선진국과의 경쟁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 다음에는 메모리 반도체 중에서 어떤 것을 주력 제품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S램이 유력해 보였다. S램은 다양한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시장 진입이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D램은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가격의 변동이 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은 결국 D램을 선택했다. 시장 규모를 정밀하게 검토한 결과 S램의 시장 규모는 D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아울러 D램이 반도체 기술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에 D램을 선택하는 것이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인식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삼성은 D램을 주력 품목으로 선정하면서 64K D램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K·4K·16K·32K D램을 생략하고 곧바로 64K D램에 도전한다는 야심 찬 목표였다. 그것은 선진국이 밟아왔던 단계를 모두 거쳐서는 계속해서 선진국에 뒤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첨단 반도체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러 한 결정은 마치 걸음마 단계에 있는 아이가 갑자기 달리기를 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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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첨단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면서 외국에 있는 한국계 과학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였다. 특히, 미국의 우수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반도체 관련 업계에서 실무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 스카우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연봉 2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조건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삼성은 1983년 7월에 미국 산호세에 현지 법인을 세워 스카우트한 재미 과학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최신 정보를 수집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삼성은 1983년 5월부터 64K D램을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조립 공정 기술은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설계 기술과 검사 기술은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이를 위하여 미국과 일본의 선진 업체에 접근했지만 그들은 모두 기술 이전에 인색한 자세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선택된 기업은 미국의 벤처 기업인 마이크론(Micron)과 일본의 중견 기 업인 샤프(Sharp)였다.

삼성은 효과적인 기술 이전을 위해 마이크론에서 기술 연수를 받기로 하였다. 삼성은 유능한 사원을 선발하여 철저한 사전 교육을 시킨 후 기술 연수를 보냈다. 그러나 삼성의 기술 연수팀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기업의 생존 비밀과 같은 핵심 기술을 미래의 경쟁자에게 이전에 준다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삼성의 기술 연수팀은 하나라도 더 배운다는 일념 아래 자료를 몰래 뒤져서 복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에 삼성은 마이크론에서 기술 연수를 받거나 미국 현지 법인에서 활동할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기술 개발에 대한 각오와 팀워크를 다지는 특별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64㎞ 행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행군 거리가 64㎞였던 것은 64K D램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무박 2일 동안 실시된 그 행군은 산을 넘고 공동묘지를 지나면서 갖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훈련이었다. 행군 도중에 꺼낸 도시락에는 D램 개발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편지 한 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은 마이크론으로부터 64K D램 칩을 제공받은 후 이를 재현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완제품을 사다가 이를 분해하여 해석함으로써 기술을 익히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대로 된 생산 조건을 확립하고 불량의 원인을 밝히는 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반복되었다. 조립 생산 기술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는 기술 연수를 받았던 인력을 중심으로 웨이퍼 가공에 관한 기술을 개발하는 작업도 병행되었다.

당시의 연구팀은 밤낮을 잊고 기술 개발에 매진하였다. 아침 7시에 출근하였고 퇴근 시간은 따로 없었다. 밤 11시에는 일레븐 미팅이 열렸다.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다가 밤 11시에 모여서 그날의 성과와 문제점에 대한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삼성은 개발 착수 6개월 만인 1983년 11월에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삼성의 공식 문건은 64K D램을 개발하는 과정을 ‘6년과 같았던 6개월’로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한 국가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1986년까지라도 개발할 수 있으면 대단한 성공’이라는 미국과 일본 업계의 공언을 무색하게 하였다. 64K D램의 개발을 계기로 선진국과 10년 이상의 격차가 났던 우리나라의 반도체 기술 수준은 3년 내외로 크게 단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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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K D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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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64K D램을 개발하면서 양산 공장을 건설하는 데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한쪽에서 반도체를 개발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지었던 것이다. 반도체 장비는 약간의 먼지나 진동에도 오류를 일으킬 만큼 민감하기 때문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데 18개월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1983년 9월에 경기도 기흥에서 열린 기공식에서 이병철 회장은 ‘6개월 안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후발 주자인 삼성이 선진 업체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조기에 공장을 건설하여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설 현장의 직원들은 추운 날씨에도 24시간 내내 일하다시피 했다. 당시에 기흥 공장 건설 현장에 붙여진 별명은 아오지 탄광이었다.

기흥 공장을 건설하는 데에는 정부의 지원도 한몫했다. 정부는 반도체 사업이 수도권에서도 가능한 업종으로 허가해 주었다. 우수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부지를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게 한 것이다. 또한 반도체 공장에 필수적인 용수와 전력을 공급하는 데에도 예외적인 조치를 취해 주었다. 반도체 생산을 위해 외국에서 수입하는 재료와 장비에 대해 관세를 감면해 준 것도 정부의 몫이었다.

삼성은 64K D램 생산 라인인 제1라인에 착공한 지 2개월 후인 1983년 11월에 256K D램 생산 라인인 제2라인의 내역을 검토하였다. 제1라인은 4인치 웨이퍼를 사용할 예정인데 제2라인의 경우에는 웨이퍼의 크기를 얼마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에 미국과 일본에서는 대부분 5인치 라인을 갖추고 있었고 6인치 라인을 갖춘 업체는 세 개밖에 없었다. 삼성에서는 5인치 라인과 6인치 라인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5인치 라인을 주장하는 진영은 4인치에 겨우 익숙한 현장 기술자와 작업공이 5인치에 대한 경험 없이 6인치로 곧바로 갈 경우에 기술을 충분히 습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아직 256K D램 생산 기술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인데 만약 생산 공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이 기술의 미숙에 있는지, 아니면 장비의 결함에서 온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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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 공장 건설 현장 부지를 찾은 이병철 회장
기흥 공장 건설 현장 부지를 찾은 이병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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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6인치 웨이퍼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선진 업체를 하루빨리 따라잡기 위해서는 좀 더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도체 업체들이 1인치를 두고 고민을 하는 이유는 웨이퍼의 크기가 클수록 많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웨이퍼의 면적은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6인치 웨이퍼의 면적은 4인치의 두 배가 넘는 것이다. 4 인치 웨이퍼에서 50개의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면 6인치 웨이퍼로는 100개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은 1984년 3월에 256K D램을 개발하는 데 착수하였다. 256K D램의 경우에는 기술 도입과 자체 개발이 병행되었다. 국내에서는 설계 기술의 도입을 통하여 256K D램을 개발하는 한편, 미국 현지 법인에서는 설계 기술부터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던 것이다. 국내 연구팀은 마이크론에서 설계 기술을 도입하여 1984년 10월에 256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고, 미국의 현지 법인은 1985년 4월에 설계를 완료한 후 같은 해 9월에 양품(良品)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처음에 삼성은 국내 연구팀이 개발한 256K D램을 생산하다가 나중에는 미국의 현지 법인이 개발한 제품으로 바꾸었다. 미국 현지 법인의 제품이 몇 가지 측면에서 국내에서 개발된 제품보다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256K D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삼성은 국내의 연구진이 미국 현지 법인에서 기술 연수를 받도록 하였다. 젊고 유능한 사원 32명을 선발한 후 미국 현지 법인에 파견하여 D램 제조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당시에 파견된 사원들은 현지 법인의 연구원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기술을 습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56K D램 개발 작업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이 회고했듯이, ‘반도체를 설계하느라 무릎이 다 까졌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도면 위를 기어 다니며 직접 펜으로 회로를 그리느라 무릎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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