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2.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확장
  • 전화의 보급
김명진

우리나라 정보 통신 기술의 도입과 발전은 멀리 구한말 및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신 및 전화의 도입은 이미 구한말에 이루어졌다. 전신은 1885년 청나라와 조선이 합작하여 인천·서울·의주를 잇는 서로 전선(西路電線)을 개통한 것이 시작이며, 뒤이어 서울·부산을 잇는 남로 전선(1888), 서울·원산을 잇는 북로 전선(1891)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특히 북로 전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요구로 만든 서로·남로 전선과 달리 우리 정부가 외세를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자체 자본과 기술로 시공한 것으로 의미 깊다.

전화는 1882년에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으나, 잇따른 정세 불안으로 도입이 지연되다가 1896년 10월이 되어서야 궁중에 설치되었고, 이듬해부터는 궁내부와 각 아문 및 인천 감리 사이에 전화 연락이 이루어졌다. 일반 대중이 전화를 접한 것은 1902년 서울·인천 간에 사업용 전화가 처음으로 개설되어 공공 전화 업무가 시작된 이후부터였고, 뒤이어 시내 교환 전화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통신 수단은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인한 이른바 통신 합동으로 강탈당하여 일제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통신 체계는 상당한 외형상의 성장을 이루었다. 전신국소의 수는 1905년의 44개소에서 1943년에는 1087개소로 증가하였고, 전 화 가입자 수도 1910년의 6448명에서 1941년에는 6만 1682명으로 10배 증가하였다. 1920년대 이후 일부 산업 및 문화 활동이 허용되면서 조선인 전화 이용자의 수도 상당히 늘어 1910년에 254명에 불과하던 것이 1918년에 1000명, 1928년에 5000명을 넘어섰고, 1930년대에 크게 증가해 1941년에는 1만 7620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설 차원에서도 1922년에 최초의 근대적 전화국 전용 건물인 용산 전화국 건물을 신축하였고, 1933년에 조·일 간에 해저선을 이용한 국제 전화 업무가 개시되었으며, 1935년에는 나진 우편국에 처음으로 자동 교환기를 도입하는 등의 발전이 있었다. 또한 일제는 통신 인력 양성을 위해 1918년에 최초의 정규 전기 통신 교육 기관인 체신 이원 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를 설치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조선 무선 통신 학교와 무선 전신 강습소를 각각 설치했다. 이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 만든 것이었지만, 광복 이후 우리나라 통신 사업 재건에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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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전화소
한성 전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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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외형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의 전신·전화 사업은 식민 통치를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의 복리 증진과는 크나큰 괴리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비교적 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전신과 달리 전화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집중 가설되었고, 주로 관용 통신과 일본 거류민을 대상으로 사업이 이루어졌다. 시설을 이용하는 데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일례로 1941년에 전화 대수는 7만 대가 넘었지만, 이 중 공중전화는 147대에 불과했는데, 1910년에 30대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일제 강점기 동안 전화는 공공 서비스 측면에서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2차 대전 말기에는 전화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처음에는 우선순위를 정해 통화를 제 한하더니 결국 전화 시설을 공출해 강제로 빼앗아가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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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걸이 자석식 전화기
벽걸이 자석식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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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 되면서 일제가 관리해 오던 전기 통신 시설은 이제 우리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전기 통신 시설의 대부분은 노후하여 고장이 자주 발생하였고, 그나마 광복 이후에도 미군정 당국이 이를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기계를 수리할 수 있는 예산·기자재·기술·인원 등 모든 것이 넉넉하지 못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1947년에는 체신국을 체신부로 개편하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시설의 공사와 보수를 담당하는 전신 전화 건설국을 신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다시 일제 말기의 통신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간신히 복구되어 가고 있던 전기 통신 설비는 6·25 전쟁 기간 동안 80% 이상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1953년 휴전 성립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미국의 원조 자금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전신 설비를 복구하는 기간이 되었다. 1958년경에는 대체로 전쟁 이전의 수준까지 복구가 이루어졌으며, 전화의 경우 이전의 자석식(磁石式)이나 공전식(共電式) 전화에서 자동식 교환 전화로 상당 부분 교체되었다. 전화 가입자의 수도 1953년에 2만 2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1961년에는 9만 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이러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1961년 말을 기준으로 인구 100명당 전화 보급률은 0.4대, 자동화율은 44.7%에 불과해 전화 시설은 아주 미비한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이후에는 전화 시설의 확충이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로 설정되었다. 체신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추어 통신 사업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1차 5개년 계획의 결과, 총 시설 수에서는 2.5배의 증가를 보였고 보급률은 100명당 1.17대, 자동화율은 64.8%로 증가했으나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낙후된 상태였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사이에는 국민 생활의 향상으로 업무용에 비해 주택용 전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해 전화 가입 신청을 하고서도 1년이 넘게 기다려야 하는 전화 적체 현상이 점차 심화되었다. 이러한 전화 적체와 그로부터 파생된 가입 승낙 확보 경쟁 및 청약 행위를 둘러싼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970년에 전기 통신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전화 가입권을 양도가 가능한 일종의 재산권에서 전화국에서 임차해 쓰는 사용권 개념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양도 가능한 전화를 이미 갖고 있던 사람들의 기득권 보장을 위해 이를 ‘백색전화’라고 하고 새로 놓이는 양도 불가능한 전화를 ‘청색전화’라고 부르는 이원적 관리 구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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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석식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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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식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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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3차와 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전화 보급률은 1976년에 인구 100명당 3.54대, 1981년에 8.43대(총 349만 1270회선)로 증가했고 자동화율도 1981년에 88.1%로 상승했다.

1971년에는 시외 전화에서 장거리 자동 전화(DDD)가 서울과 부산 사이에 처음으로 도입되었고, 1979년에는 종전의 기계식을 대신하여 반(半)전자식 교환기를 들여와 교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4차에 걸친 통신 사업 5개년 계획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화 적체 현상은 1972년에 1만 3000대이던 것이 1980년에는 60만 대에 이를 정도로 더욱 심해졌고, 양도할 수 있는 백색전화의 가격이 집 한 채 값에 맞먹을 정도로 치솟아 사회 문제가 되었다.

또한 벽지나 도서 지역의 경우 전화가 가설된 곳이 여전히 드물었다. 이에 정부는 1978년부터 10년 동안 전국 전화 광역 자동화 사업을 추진해 전화 적체와 도서 지역의 고립 현상을 해소하고 통신 선진국으로의 발돋움을 시도하였다. 이 사업은 1981년에 정부로부터 공사(公社)의 형태로 떨어져 나온 한국 전기 통신 공사(현 KT)가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는 전화 보급이 급격하게 확산되었는데, 여기에는 한국 전기 통신 연구소(현 한국 전자 통신 연구원)에서 자체 개발한 TDX 전전자 교환기(全電子交換機)가 1986년 3월을 기점으로 운용에 들어간 것이 큰 역할을 했다. 1987년 9월에는 국내 전화 시설이 1000만 회선, 1994년에는 2000만 회선을 돌파하면서 우리나라는 1가구 2전화 시대에 돌입했고 세계 10위의 통신 시설 보유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2004년 말 시점에서 전화 가입자 수는 2287만 명, 전화 보급률은 47.45%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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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동대문 전화국의 전화 가입권 공개 추첨 모습
1960년대 동대문 전화국의 전화 가입권 공개 추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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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통신은 1982년에 이른바 삐삐, 곧 무선 호출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1984년 5월에 한국 이동 통신이 수도권을 대상으로 전자식인 AMPS 방식의 아날로그 셀룰러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각료나 군대 등 한정된 사람들은 이미 1960년대 초부터 이동 전화를 쓸 수 있었으나 가입자는 수백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동 전화는 1991년경에 전국망 서비스가 개통되었으나 높은 가격 때문에 일반인의 이용은 많지 않았는데, 1995년 이후 가입자가 매년 두 배씩 늘어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그 배경에는 1996년에 코드 분할 다중 접속(CDMA) 방식의 이동 전화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점과 1997년 10월 시작된 개인 휴대 통신(PCS) 서비스가 경쟁을 촉진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CDMA 기술은 한국 전자 통신 연구원에서 오랜 연구 끝에 차세대 이동 통신의 핵심 기술로 독자 개발한 것으로, 1998년에 유럽과 미국에서 표준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사실상 전 세계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개인 휴대 전화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1997년에 가입자가 1500만으로 정점에 달했던 무선 호출 서비스와 1997년 7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발신 전용 이동 전화 시티폰은 그 자리를 내주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4년 말을 기준으로 이동 전화 가입자 수는 3658만 명으로 유선 전화 가입자 수를 훨씬 앞지르고 있으며, 이동 전화 보급률이 75.91%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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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전전자 교환기 TDX-1
국산 전전자 교환기 TD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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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동 통신업계는 CDMA를 통한 세계 통신 시장 선점을 발판으로 차세대 이동 통신 기술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정보통신부가 주관하여 IMT-2000 프로젝트를 추진한 결과 2002년부터 상용화에 돌입했다. IMT-2000은 기존 이동 통신 서비스인 무선 호출·셀룰러·PCS·데이터 통신 등을 하나로 통합하여 초고속 정보 통신망과 연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래 이동 통신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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