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2.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확장
  •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시대의 도래
김명진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1967년 4월 경제 기획원 조사 통계국이 인구센서스 통계 처리를 위해 도입한 IBM 1401이 최초이다. 미국에서는 최초의 상용 컴퓨터인 유니벡(UNIVAC)이 1951년에 등장해 1960년대가 되면 대형 컴퓨터가 연방 정부와 기업 등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는 시기적으로 상당히 뒤늦은 것이었다.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우리나라 전산실과 소프트웨어 센터의 효시인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 전자 계산실이 발족했다. KIST 전자 계산실은 컴퓨터 이용 기술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했던 시기에 정부의 전산 프로젝트를 사실상 도맡다시피 하며 우리나라의 컴퓨터 역사를 이끌었다. 1970년대 초에 이루어진 체신부의 서울 시내 전신 전화 요금 업무 전산화와 문교부의 대학 입학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는 KIST 전자 계산실이 담당했던 초기의 대표적인 컴퓨터 프로젝트로서, 중학교 무시험 추첨(1970), 서울·부산 간 외환 은행 온라인 뱅킹(1972) 등과 함께 일반인에게 만능 기계라는 컴퓨터의 이미지를 심어 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들면서 정부와 공공 기관·교육 기관·기업의 컴퓨터 도입은 점차 증가했고, 여러 대학교에서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관련 학과 개설도 줄을 이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에는 모두 400대의 컴퓨터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업무용으로 쓰는 중대형 컴퓨터로서 엄청나게 비싼 가격, 거대한 기기의 규모, 조작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일반인이 컴퓨터를 직접 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런 시기를 벗어나 일반인이 컴퓨터와 좀 더 친숙해지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마이크로컴퓨터(microcomputer)의 등장이었다. 이미 미국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내장한 초소형 컴퓨터가 등장했고 애플Ⅱ 같은 마이크 로컴퓨터가 10만 대 이상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마이크로컴퓨터는 1981년 IBM사가 IBM-PC를 출시한 이후부터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국내에서도 1977년에 금성 전기와 KIST 수치 제어 연구실이 GS COM80A라는 이름의 마이크로컴퓨터를 공동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상업화에는 실패하였다. 1981년에 삼보 전자 엔지니어링이 출시한 애플Ⅱ 호환 기종인 SE 8001이 시장에 출시된 최초의 국산 PC이다.

1980년대 초까지 연간 시장 수요가 500대에도 미치지 못하던 PC 산업은 정부가 1983년을 정보 산업의 해로 선포하고 국민들에 대한 컴퓨터 교육과 홍보 활동을 강화하면서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정부는 1982년 실업계 고등학교 등에 5000여 대의 8비트 컴퓨터를 공급하겠다는 교육용 컴퓨터 보급 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거창한 계획과는 달리 실행 과정과 결과가 흐지부지되었기 때문에 전시용 행정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국내의 여러 대기업이 PC 생산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정부는 1987년을 다시 정보 통신의 해로 지정하고, 1989년 학교 교육용 컴퓨터의 표준 기종을 16비트 IBM 컴퓨터로 확정함으로써 PC 대중화의 길을 터놓았다. 1990년대 들어 PC의 성능이 향상되고 가격이 떨어지면서 PC 보급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2002년에는 대략 2300만여 대의 PC를 쓰고 있을 정도로 PC는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서로 다른 컴퓨터들을 연결해 데이터를 주고받는 컴퓨터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1982년 서울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와 구미의 한국 전자 기술 연구소에 있는 중형 컴퓨터가 전용선으로 연결되어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을 구축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듬해에는 한국 과학 기술원(KAIST)의 중형 컴퓨터가 SDN에 연결되어 통신망으로서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SDN은 오늘날 인터넷 프로토콜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TCP/IP 방식을 채용했기 때문에 국내 인터넷의 시초로 평가된다. SDN은 1983년에 네덜란드·미국과 UUCP(Unix to Unix Copy Protocol)로 연결되었고, 1986년에는 국내 인터넷이 처음으로 IP 주소를 할당받았으며, 1987년에 ‘.kr’ 도메인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함으로써 국제 인터넷에의 참여가 본격화되었다.

한편 1980년대 후반에는 인터넷 외에 전화선을 통해 접속하는 PC 통신이라는 온라인 서비스가 쓰이기 시작했다. 1984년 데이콤의 한글 이메일로 시작한 서비스는 1986년 최초의 PC 통신인 천리안으로 이어졌고, 1988년 시작된 케텔(KETEL)은 이후 하이텔(HITEL)로 개편되면서 대표적인 PC 통신 서비스로 자리를 잡았다. PC 통신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이전 시기에 온라인에서의 ‘동호회’라는 개념을 정착시킨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이어 1990년대 중반에는 대학교와 연구소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던 인터넷이 일반 회사와 가정에까지 보급되기 시작했다. 1994년 6월에는 한국 PC 통신(하이텔)이 코넷(KORNET)이라는 인터넷 상용 접속 서비스를 최초로 시작했고 곧 데이콤과 나우콤 등이 여기에 가세했다. 1996년에는 인터파크와 롯데 인터넷 백화점이 문을 열어 웹사이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구매하는 전자 상거래(e-commerce)의 시대가 열렸다. 1998년부터 두루넷·하나로 통신·KT 등이 전용 케이블이나 전화선을 이용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2002년에는 초고속 인터넷에 가입한 가구가 1000만을 돌파함으로써 모뎀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을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의 폭발적 증가 추세는 PC방의 확산과 온라인 게임의 인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주식 거래 서비스, 인터넷 뱅킹 서비스의 확산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사용은 지난 수년 동안 놀라운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인터넷 사용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는데, 1997년 163만 명에 불과했던 인터넷 사용자가 1998년에는 310만 명, 1999년에 1000만 명을 돌파 하더니, 2004년 6월에는 3000만 명을 넘어서 인터넷 이용률이 70%를 돌파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2005년 1월 정보통신부와 한국 인터넷 진흥원이 발표한 2004년 하반기 정보화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이용자들은 일주일에 평균 11.7시간 동안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용 목적은 자료·정보 검색, 게임, 이메일, 오락, 채팅·인스턴트메신저, 쇼핑·예약의 순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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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빠른 보급은 우리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버 수의 폭발적인 증가와 가정에서의 인터넷 보급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거나 행정 서비스 등을 받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고, 인터넷 전자 상거래의 활성화는 유통 정보의 투명화와 함께 소비자에게 훨씬 더 큰 선택권을 보장해 주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의 등장은 흔히 네티즌(netizen)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인 새로운 온라인 공동체를 만들어냈고, 이는 새로운 정치 의식과 사회 운동의 도래로 이어지고 있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의 사망 사건이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촛불 시위와 항의 집회를 촉발시킨 것이 이를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나아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난 PC방을 매개로 청소년들 사이에서의 온라인 게임 유행과 같은 새로운 놀이 문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터넷의 보급이 반드시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지역별·연령별·계층별로 인터넷에 대한 접근도가 서로 달라 생겨나는 정보 격차의 문제는 인터넷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점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04년 하반기 정보화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50대 이상 연령층과 7∼19세 연령층 간의 정보 격차는 79.3%로 일본(70.0%), 영국(45.0%), 미국(34.0%) 등보다 크게 높았으며, 장애 여부에 따른 정보 격차도 33.4%로 영국(21.0%), 미국(19.6%), 일본(15.0%)보다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월 4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층과 월 100만 원 이하 저소득층 간의 정보 격차도 52.7%로 역시 일본(16.4%), 영국(52.0%), 미국(51.7%)에 비해 큰 편이었으며, 남녀 간 성별 격차도 12.4%로 일본(9.1%)과 영국(6.0%), 미국(1.0%) 등보다 매우 크게 나타났다.

정보 격차 이외에도 인터넷의 보급은 다른 역기능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른바 인터넷 중독 현상이나 해킹과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한 피해, 개인 정보의 유출과 프라이버시의 침해, 불건전한 정보의 대량 유통 등이 그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 게임이나 음성적 정보에 중독되어 일상생활의 정상적 영위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해킹은 지난 몇 년 간 빠른 속도로 증가했는데, 2000년에 우리나라에서 신고된 해킹 피해가 1943건이던 것이 2001년에는 5333건, 2002년에는 1만 5192건, 2003년에는 2만 6179건으로 크게 늘었다. 이동 통신 업체나 인터넷 서비스 업체에 의한 고객 정보 유출 역시 법적 규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범람하는 포르노 웹 사이트나 자살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웹 사이트 등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부적절한 내용을 담은 스팸 메일이 급증하 는 등의 문제점도 아울러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급속한 정보 통신 기술의 확산은 우리나라를 전 지구적 정보 사회(global information society)의 선두 주자로 밀어 올리면서 사회·문화·산업·교육 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휴대 전화나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률에서 선진국을 앞지를 정도의 급격한 성장을 이루긴 했지만, 원격 교육·원격 진료 등 이를 이용한 서비스의 개발과 프라이버시 보호, 정보 격차 해소와 같은 사회적 측면의 대응에서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독창적인 전략을 짜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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