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3. 과학 기술,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다
  • 주거 설비의 변화와 가정용 기기의 확산
박진희

앞서 일어난 연료 변혁은 주거 환경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눈에 띄는 변화는 취사·난방 설비의 분화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재래식 부엌의 아궁이는 온돌을 덥히는 역할과 가마솥 밥을 짓는 역할을 동시에 하였다. 장작불에서 연탄·석유·도시가스로 연료가 바뀌고 다양화되면서 옛 아궁이의 취사·난방 겸용 역할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1960년대 초가 되면, 연탄을 이용한 난방 설비로 연탄보일러가 등장하여 취사용 연탄 아궁이와 역할을 달리하게 된다. 연탄보일러에 이어 기름·가스보일러도 출시되었지만, 1990년까지 일반 가정의 난방은 대부분 연탄보일러가 담당하고 있었다. 1994년 이후 상황이 바뀌어 가스보일러·가스 중앙난방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한편, 취사 설비의 분리는 취사용 기기의 출현을 불러일으켰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석유풍로·가스풍로·가스레인지 등이 있다. 석유풍로는 일찍이 1920년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었다. 1928년 신문 광고 등에 석유 주로(廚爐)로 알려져 있던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석유풍로이다. 석유 사용 억제로 보급이 제한적이었던 석유풍로는 1966년 연탄 파동과 더불어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연탄을 이용한 풍로에 비하여 가스 중독의 위험이 없었던 데다가 연탄에 비하여 불을 붙이기가 쉬워 주부들에게 환영 을 받았다. 화력이 좋고 치워야 할 재가 없는 장점이 있었지만 풍로의 심지를 관리하는 일, 석유를 때맞추어 구매하고 주입해야 하는 일, 그을음과 석유 냄새가 나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국산 석유풍로가 등장하여 가격이 인하되면서 보급이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비슷한 기구로 1970년대 초반에 전기풍로가 등장하기는 하나, 비싼 전기 요금으로 인해 널리 이용되지 못하였다.

석유풍로에 이어 취사 설비에 혁신을 가져온 것은 가스레인지이다. 가스레인지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60년대로,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집을 통해서, 그리고 이어 수입된 일본 내셔널사 제품을 통해서였다. 이어서 1974년에 ‘주부들의 꿈’으로 묘사되던 가스레인지를 린나이 코리아사가 출시하였다. 당시에 ‘부뚜막 아궁이’로 통칭되던 가정용 가스레인지는 혼수 필수품 1호로 인식되었고, 값비싼 이 기기를 구입하기 위해 주부들은 ‘린나이계’를 들기도 했다고 한다. 성냥불로 점화할 필요도 없고, 석유 냄새의 역함도 피할 수 있었던 가스레인지는 위생적이고 간편하기 그지없는 기기였다. 액화 석유 가스(LPG)가 주를 이루던 1980년대까지 가스레인지는 부엌 뒤편이나 담장 아래에 위험천만하게 보이는 가스통을 달고 있어야 했다. 이후 도시가스 보급과 더불어 점차 가스통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비교할 수 없는 간편함과 도시가스의 대량 보급으로 가스레인지는 현재 도시 가정의 표준 설비가 되어버렸다. 가스레인지의 보급률은 1991년에 이미 전국 가구의 98.5%에 달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고급 아파트 중심으로 가스레인지를 전기레인지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고급 아파트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빌트인 부엌 가구의 구성 요소로 전기레인지가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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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동신 전기 주식회사에서 내놓은 전기밥솥은 1969 년 말까지도 가정 기기 보유 조사에 품목조차 올라 있지 않더니 1970년대 말에는 보온밥통에 이어 가장 널리 보급된 전기 제품이 되었다. 쌀과 물을 적당한 비율로 맞추어 놓고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전기밥솥은 밥물이 넘치는 것을 보아가며 가스레인지 화력을 조절하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 자동 전기 기기들은 이처럼 주부들에게 가사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해 주는 듯이 보였다. 주부의 일손을 덜어주는 기기들은 주부들의 현명한 선택이었으며, 현대 여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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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밥솥에 이어 취사 관련 도구로 보온밥통·믹서가 가정의 필수 용품이 되었다. 그 밖에 1970년대에 확산된 소형 전기 제품에는 전기냄비·토스터기·전기풍로·전기오븐 등이 있었는데, 이들 제품의 보유율은 10%를 넘지 않았다.

가장 빠르게 가정의 표준 기기가 된 것은 전기다리미와 냉장고라고 할 수 있다. 전기다리미는 다른 가정 기기에 비하여 아주 일찍부터 보급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1926년 『동아일보』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다른 전기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던 가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밖에 다른 제품에 비해 국내 생산이 빨랐던 것도 확산 속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58년 전력 연감(조선 전업 주식회사)에는 전기다리미 생산 업체가 소개되어 있다. 대기업에서는 금성사가 1976년에 처음으로 전기다리미를 생산하였다. 물론 제품 생산의 측면에서 확산 속도를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전기다리미의 보급은 당시 면섬유가 주를 이루던 의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면섬유 위주의 의생활은 주부에게 세탁 이후 다리미질이라는 부가적인 노동을 요구하였고, 주부는 어떻게든 이 노동을 간소화하려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많은 주의를 요하는 과거의 다리미질 과정에 비해 전기다리미질은 거의 노동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1960년대에 전기밥솥이 나왔지만 전기다리미만큼 보급이 빠르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전기다리미의 특성에서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전기다리미의 보급률은 1979년에 이미 84%에 달하여, 이 시기 가정 기기 중 가장 높은 보급률을 보였고, 1993년에는 98%에 이르렀다.

냉장고는 지금까지 살펴본 가정 기기와는 약간 다른 시기에 다른 이유에서 표준 기기가 되고 있다. 냉장고는 1965년에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이후로, 1975년까지는 서서히 보급되다가 그 후로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냉장고 보유율은 1970년에 2.1%, 1975년에 6.5%, 1980년에 37.8%, 1985년에 71.1%를 기록하였고, 마침내 1989년에 보급률이 100%에 이르렀다.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국내 생산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보급이 늦어지게 된 데에는 아마도 높은 가격이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1969년도 여성 잡지의 글을 통해 보면 당시까지 냉장고 소유를 ‘주부의 허영심’으로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1970년대 말에 급속하게 보급이 된 것은 냉장고 가격이 급격하게 내려갔기 때문이었을까?

다만 가격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것보다는 1970년대 말 이후 점차적으로 일반적인 주거 형식으로 자리 잡은 아파트의 급속한 증가에서 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마당이 딸린 재래 한옥과는 달리 아파트에서는 식품을 저장하기 위하여 냉장고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마당이나 헛간 같은 저장 공간이 없어지면서 대용 기기로 아이스박스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 아이스박스를 냉장고가 대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시장 보는 노동을 줄여 주는 냉장고의 유용성 역시 주부들의 구매 욕구를 높여 놓았다. “장을 한꺼번에 보아 보관하고 시간이 걸리는 요리는 여러 끼니를 한꺼번에 해서 얼려둘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시간은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고 여성 잡지는 냉장고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부의 일손을 덜어 주는 기기로 1980∼1990년대에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세탁기와 청소기이다. 세탁기는 1969년에 국내에선 냉장고 다음으로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세탁기의 보급은 1975년 전국 보급률이 1%에서 1985년 26%에 이를 때까지 비교적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85년을 전후로 빠른 속도로 보급되어 1993년에는 보급률이 91%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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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기는 국내에서는 1979년에 비교적 늦게 개발되어 출시되었다. 보급도 늦어서 1987년의 전국 보급률은 8%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국형 청소기가 개발되면서 보급률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3년 전기청소기의 보급률은 47%로 급증하였다. 앞으로 이들에 합류하게 될 기기는 식기 세척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88년에 국내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식기 세척기의 보급률은 1993년 1%에 불과했다. 고급 아파트의 빌트인 제품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세척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 설비의 하나로 일반화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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