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4.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과 보건 의료 체계
  • 서양 의학의 전래와 구한말의 의료 활동
김명진

1876년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이 땅에 서양 의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자국 거류민을 위해 서울·부산 등 각 개항지에 서양 의학에 따라 진료하는 병원을 개설하였다. 1877년 설립된 부산 제생 의원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문을 연 서양식 의료 기관으로, 일본 해군이 설치하였고, 해군 군의관이 초대 원장이었다. 이후 원산 개항과 함께 1880년 원산에 생생 의원이 생겼고, 1883년 인천에 일본 영사관 부속 병원, 서울에 일본관 의원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서양식 의료 기관들은 일본 거류민의 진료를 주로 하면서 조선인도 치료했는데, 여기에는 조선인이 일본에 호감을 품게 하고 근대 문물의 우수함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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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 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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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전후해 박영선(朴永善)·지석영(池錫永) 등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 종두법(種痘法)이 보급되었다. 박영선은 제1차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종두법을 배워 돌아온 후 이를 지석영에게 전수했다. 지석영은 이후 1879년에 부산 제생 의원에 가서 2개월 동안 다시 배운 뒤인 그 해 12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의 고향인 충주군 덕산면에서 40여 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그는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가서 두묘(痘苗) 제조 및 저장법 등을 추가로 배워 돌아오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전주 성내에 우리나라 최초로 우두국을 설치해 공식적으로 종두를 실시하고 종두법을 가르치는 한편, 1885년 우두법을 다룬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지석영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임오군란 직후 개화파로 몰려 피난했을 때 종두장이 난민에 의해 방화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고, 관직에 진출한 이후에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1892년 유배지에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우두 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해서 아이들에게 종두를 시술하는 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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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의사의 진료
서양 의사의 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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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서양 국가와는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후,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과 잇따라 수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 선교 사업이 시작되었고, 그 일환으로 의료 사업이 시행되면서 서양 의학이 들어오는 또 하나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1884년에는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견한 의료 선교사인 알렌(Herace Newton Allen)이 갑신정변 당시 큰 부상을 입은 수구파의 실력자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준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이듬해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의 왕립 병원을 세웠다. 광혜원은 설립 후 이내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제중원의 설립은 당시 대민 의료 기관인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폐지한 후 서양 의료의 도입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조선 정부와 포교의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던 미국 선교회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제중원은 1894년 갑오개혁 후 정부가 재정난으로 인해 운영에서 손을 떼면서 북장로교파 선교회로 운영권이 넘어가게 된다. 이후 제중원은 1899년에 오늘날 연세대 의과 대학의 전신인 제중원 의학교를 설립했고(이는 1909년에 세브란스 의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04년에는 서울역 앞에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의원을 열었다. 이 외에도 1885년 이후 여러 교파에서 전국 각지에 30여 개의 선교 병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실제로 활동한 서양 의사의 수는 조선 전체에 20∼30명 정도로 매우 적었고 병원의 규모도 작았기 때문에, 선교 의사가 한말 의료의 중추를 담당한 것으로 확대해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대한제국 수립 후에는 국가 차원의 보건 위생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갑오개혁 때 관제가 만들어졌으나 한동안 문서상의 기구에 불과했던 위생국이 1898년에 내부(內部) 산하에 설치되어 전염병 예방과 종두 실시, 의사와 약제사의 업무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보건 위생과 의약에 관한 여러 법령도 마련되었는데, 특히 1899년에 반포된 전염병 예방 규칙에 따라 콜레라·장티푸스·적리(이질)·디프테리아·발진티푸스·두창 등 여섯 가지를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그러나 1899∼1900년 페스트의 유행에 대한 대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여섯 가지에 해당하지 않는 전염병의 경우에도 정부 차원에서 대민 교육과 방역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정부 차원의 대처는 1902년의 콜레라 유행 때 찾아볼 수 있는데, 처음 발견된 곳인 중국을 경유하는 배에 대해 검역을 강화하고, 콜레라 방역 사무국과 임시 위생원을 전국에 설치하고, 민간에서 쉽게 응용할 수 있는 콜레라 예방법을 모아 배포했다. 또한 방역 활동에 의사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빈민 구료 사업을 전개해 방역을 강화했다. 이러한 전염병 방역 사업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는 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적 의료 체계의 형성에도 힘썼다. 1899년에는 활인서의 맥을 잇는 근대식 병원인 내부 병원이 설립되어 이듬해에 광제원(廣濟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제원은 동서 의술을 절충하여 서양 의약 지식을 갖춘 한의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환자에게는 한약·침구와 함께 키니네 등의 양약도 처방하였다. 광제원을 찾은 사람들은 주로 죄수·전염병 환자, 의지할 곳 없는 빈민 환자 등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는데, 이는 광제원이 빈민과 전염병 환자의 구휼에 힘쓰는 애초의 설립 목적에 충실하게 운영되었음을 보여 준다.

관립 의학교는 지석영을 초대 교장으로 하여 1899년에 개교했는데, 이곳에서는 서양 의학뿐만 아니라 한의학도 가르쳤으며, 1902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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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의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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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의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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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의학의 전래에 의해 구한말의 의료는 엄청난 현대화 과정을 겪었다. 특히 1900년대 들어 만들어진 세브란스 의원이나 대한 의원 등의 병원은 규모나 의료 장비·인력의 면에서 기존 진료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이 반드시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발달한 의료가 제국주의적 목적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광제원 폐쇄 후 일제에 의해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908년에 문을 연 대한 의원(한일 병합 이후 조선 총독부 의원으로 개명)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은 의료의 현대화를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상징으로 삼았으며, 제국주의 팽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선교회는 불쌍한 병자를 돌보는 데서 선교의 정당성을 찾았던 것이다. 또한 의학의 발달은 의료비의 상승을 가져왔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이용자가 떠안았기 때문에 병원은 특권층만이 이용할 수 있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의료 혜택에서의 불평등이 커지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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