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4.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과 보건 의료 체계
  • 광복 이후 의학 발전과 현대적 의료 제도의 성립
  • 의학 교육 및 연구 체계의 형성
김명진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는 우리나라 의학계에 커다란 감격과 함께 무거운 책무와 시련을 안겨 주었다. 다른 분야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 의학계에는 고등 교육을 감 당할 만한 교수 요원이 많지 않았고, 기초 의학 분야는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광복 후 일본인 교수와 의사가 빠져 나간 공백은 엄청나게 커서 새로운 의학 체계를 형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전과 함께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펴면서 각기 상이한 문화 배경 그리고 사상과 체제가 우리나라의 미래 발전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조직한 조선 교육 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미국식 종합 대학(university) 안이 결정되어, 1946년 8월 미 군정청 학무국은 국립 서울 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국대안)을 공포하였다. 이 안에는 경성 제국 대학교 의학부와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통·교육 연한·역사의식 등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경성 제대 의학부 출신과 경성 의전 출신 모두의 반발을 샀고, 양측 출신 교수들 간의 갈등은 통합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경성 제대와 경성 의전의 부속 병원은 통합과 함께 각각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 제1·2 부속 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외에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와 경성 여자 의학 전문학교, 대구·광주 의학 전문학교 역시 6년제 의과 대학으로 개편되었고, 정부 수립 후에 이화 여자 대학교 의과 대학을 비롯해 많은 의과 대학이 신설되었다. 의학 교육의 연한은 미국식을 따라 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통일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40대 이하의 의사들은 군의관으로 종군했는데, 이들은 야전 병원을 통해 미군 병원의 우수한 최신 의술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신경외과·흉부외과·마취과·임상 병리학 등 새로운 전문 분야들이 도입되었고, 정신 의학도 독립적인 분야로 등장했다.

1958년부터는 수련의 제도가 도입되어 평준화된 임상 전문의(臨床專門 醫)의 양성을 가능케 함으로써 임상 의학 교육의 일대 전기를 만들었다. 국가시험과 수련 과정인 인턴·레지던트·전문의 자격시험, 그 밖의 일반 의료 행정에 관한 제도는 미국 방식을 많이 답습했다. 의학 교육에 미친 미국의 영향은 1950년대 미국 대외 원조처(ICA)가 지원해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들이 대거 미네소타 대학 교환 교수 명목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오고 미국인 교환 교수가 서울대에서 강의를 맡는 등 한미 간 학술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더욱 커졌다.

광복 후 건국 의사회로 발족한 조선인 의사 단체는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사단 법인 대한 의학 협회(1993년 대한 의사 협회로 개칭)를 결성해 의사의 중앙 기관이 되었고, 1948년부터 해마다 전국적인 학술 연구 발표 대회를 주관하고 기관지 『대한 의학 협회 잡지』를 발간했다. 또한 우리나라 기초 의학계의 선구자들은 광복 직후부터 조직적인 학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945년에 대한 생리학회, 1946년에 대한 병리학회와 대한 미생물학회 등 기초 의학 여덟 개 학회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발족하였으며, 1959년에는 대한 기생충학회, 1976년에는 대한 법의학회가 구성되어 현재의 기초 의학 열 개 학회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기초 의학 학회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차례로 학술지를 창간해 기초 의학 발전에 공헌했다.

한의학은 1951년 9월에 제정·공포된 국민 의료법에 양의사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의사 제도가 포함됨으로써 제도적으로 정착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보건부가 한의사 국가고시를 실시함에 따라 활기를 띠었다. 한의사들은 1952년에 대한 한의사 협회를 결성했고 1955년에는 대한 한의학회를 만들어 기관지 『동양 의약』을 발간하였다. 한의사 제도는 1960년대 초에 한때 위기를 맞았다.

4·19 혁명 이후 그동안 한의사 제도에 불만을 품어온 대한 의학 협회를 비롯한 양의사 단체들이 언론을 통해 한의사 제도 폐지론을 발표하고 아 울러 의료법 개정안을 내놓아 한의사 제도 폐지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노력은 5·16 군사 정변으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군사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강경해졌고, 1961년 6월 국가 재건 최고 회의에서 국민 의료법 중 한의사 제도를 삭제하고 한의과 대학을 폐지하는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한의계가 이에 강력 반발하여 한의학 부활 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는 1962년 3월에 기존의 의료법 전면 개정안(법률 제1035조)을 포기하고, 1963년 12월에 개정 의료법을 공포함으로써 한의사 제도가 부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의학 교육은 1946년 10월에 문을 연 동양 의학 전문 학원이 1948년 4년제 대학인 동양 대학관(東洋大學館)으로 설립 인가를 받으면서 제도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대학은 6·25 전쟁으로 인해 임시 휴교를 하였다가 1951년 국민 의료법에 한의사 제도가 규정됨에 따라 1952년 9월에 서울 한의과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55년 3월에는 다시 동양 의약 대학으로 개정, 인가되었다.

1955년 8월 1일에는 약학과가 증설되어 동양 의약 대학은 한의학과와 약학과의 두 개과로, 1964년에는 수학 연한을 양의학과 같은 6년(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연장한 동양 의과 대학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듬해에는 동양 의과 대학 행림 재단과 경희 대학교 고황 재단이 합병되어 한의학과는 경희 대학교 의과 대학 한의학과로, 약학과는 경희 대학교 약학 대학 약학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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