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1장 죽음이란 무엇인가?
  • 1. 육신과 넋
주강현

사람은 죽는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죽는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침에는 많은 사람이 눈에 띄지만, 저녁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저녁에는 많은 사람이 눈에 띄지만 아침이면 어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젊다’고 생각할지라도 죽어야만 하는 인간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맡기고 있다. 젊은 사람들도 죽어 간다. 남자도 여자도 차례차례 죽어 갈 뿐.

부처 자신의 감흥을 적어 놓은 우다나바가(Uda’navarga)에서 이른 말이다. 그렇다. 인간은 차례차례 죽어 갈 뿐이다. 그러나 어떤 죽음도 결코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다. 죽음은 그를 둘러싼 많은 이들과의 인간관계가 끝남을 의미한다. 죽음 자체는 개인적인 일이지만 어느 죽음도 사회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1)장 셰노(Jean Chesneaux)는 『과거를 없애버릴 것인가?(Du Passé Faisons Table Rase?)』(실천을 위한 역사학, 주진오 옮김, 이론과 실천사, 1987)에서 역사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논하면서 역사는 단기 지속과 장기 지속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장기 지속이란 일반 대중을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간에 오로지 소비하고 일하며, 기술을 발명하여 그것을 전수하거나 잊어버리고, 재생산하고, 병들고, 민속 문화를 발전시키는, 다시 말해서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를 수동적인 역사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장기 지속을 정치적이라고 보았으며, 그것의 연속성은 단지 외견적일 뿐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날카로운 단절과 격렬한 변동에 따라 중단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내적 본질은 장기 지속 현상과 갑자기 폭발하는 급작스러운 위기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그가 제시한 관점에서 볼 때, 상장례도 탈정치화된 양적인(massive) 역사로서의 장기 지속은 아니다. 상장례는 그 보수성 때문에 완강하게 이어지는 장기 지속성을 지니면서도 정치적인 측면이 강하다. 조선시대에 『주자가례』가 적극 보급된 것은 당연히 통치 이데올로기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창조자’, 즉 다수 민중의 문제라면, 상장례 역시 다수 민중의 처지에서 바라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 항목은 그러한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인간이 삶과 죽음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죽음의 강은 늘 무섭고도 경외가 가득 찬 곳으로 다가왔다. 죽음을 달래는 인간 심성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것이다. 장례는 망자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절차이므로 복잡할 뿐더러 정중해야 했다. 상장례(喪葬禮)는 본인을 위해서 치르는 것이면서도 막상 본인이 주관하지 못하는 유일한 의례이다. 죽은 자에 대한 공경심과 공포심 따위가 어우러지면서 상장례 예법은 어느 민족에게나 가장 ‘보수적인 문화’로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의 사정은 조금 더 복잡해졌다. 우리나라의 상장례는 전통적 무속 의례나 불교 의례로 이루어지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면 『주자가례(朱子家禮)』 예법이 덧붙여지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예법보다도 준엄성이 돋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가례』라는 꺼풀을 조금만 벗겨 내고 들추어 보면 우리의 상장례에는 『주자가례』와는 다른 맥락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주자가례』의 세례(洗禮)에 따라 장례 풍습이 바뀐 것으로 보는 주류적 견해가 있지만, 막상 예서(禮書)의 기준과 실제 민간의 관행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우리 민족의 토착 세계관은 무속(巫俗)이다. 무속에 관한 논란이 자못 많지만 무속적 세계관이 한국인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토양임을 부인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무속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영혼을 믿는다. 인간의 영혼은 사후에 저승으로 건너가서 영생(永生)하거나 다시금 현세로 환생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무속적 세계관은 일찍이 불교적 세계관과 융합되어 양자의 경계가 애매하기도 하다. 무속에서 영혼은 죽은 사람의 영혼인 사령(死靈)과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안에 깃든 생령(生靈)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망자의 넋이 저승으로 가는 것을 뜻하며, 후자는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어 이승에서 살고 있음을 뜻한다.

개성 근교에는 공민왕릉이 있다. 공민왕 자신이 살아생전에 노국 공주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몸소 설계하였다는 무덤이다. 현실(玄室) 내부에는 사면 벽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얼굴을 한 인물군을 그려 영혼이 십이간지의 순환을 통하여 재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벽면에는 작은 구멍을 파 노국 공주와 공민왕의 혼이 나와서 만날 수 있게 설계하였다. 육신은 죽었지만 혼만큼은 자유롭게 만나서 영생불멸(永生不滅)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불교적 윤회관(輪廻觀)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전형적인 무속의 세계관과도 부합한다. 또한 이것은 고구려 풍습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육신은 죽었지만 혼만큼은 살아남아 전생의 삶이 부럽지 않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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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
공민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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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속에서 사령은 조상과 원귀(寃鬼)로 나뉜다.2)김태곤, 『무속과 영의 세계』, 한울, 1993. 사령은 순조롭게 살다가 저승으로 들어간 영혼으로 신령(神靈)이 되고, 원귀는 생전의 원한이 남아 저승으로 들어가지 못한 영혼으로 인간을 괴롭히는 악령(惡靈)이 된다. 사령은 사람이 죽은 뒤에 저승으로 가는 영혼이고, 원귀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속에 깃들어 현세인 이승에 머물러 있는 영혼이다. 사령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초상이 났을 때 부르는 초혼(招魂)과 제사를 비롯해서 무속 제의(祭儀)인 집가심, 자리걷이, 지노귀, 오구굿, 씻김굿, 수왕굿, 망무기, 해원굿, 그리고 일반 제의인 굿에 반드시 삽입되는 조상굿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 제를 올리는 것 등이다.

살아 있는 신령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무속 자료로는 노인의 사후 내세천도를 비는 굿인 평안도 다리굿, 경상도 산오굿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굿 에서는 생존한 육신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위하여 제를 올린다. 또한 민간에서 사람이 잠자는 동안 영혼이 육신을 떠나서 떠돌아다니며 보는 것이 꿈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것, 자는 사람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놓든가 천이나 종이로 얼굴을 덮어 놓으면 잠든 사이에 떠나가 돌아다니던 영혼이 육신에게 돌아올 때 제 얼굴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의 육신으로 알고 다른 데로 가서 그 사람이 죽게 된다고 믿는 것, 중병이나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의식이 흐려지는 것은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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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진오귀굿
서울 진오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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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은 선대 조상과 무속의 대신·말명이고, 원귀는 왕신·몽달귀신·객혼·영산·수비·수부 등이다. 사령은 잘만 위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는데 원귀는 다르다고 우리 민족은 믿어 왔다. 원귀는 요절·횡사·객사하여 원한이 풀리지 않아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부혼(浮魂)으로 악령적 성격을 띤다. 선령과 악령으로 나뉘게 되는 영혼의 이중적 성격은 한국인에게 매우 전통적인 것이다. 선령은 영혼과 인간 사이에 인륜성 (人倫性)이 작용하여 인간의 영혼을 안주하게 하며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인륜의 의무를 지게 된다. 반면에 악령은 인간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 인간이 피동적으로 악령에게 순종하게 된다고 믿어 왔다.3)김태곤, 『한국 무속 연구』, 집문당, 1981, 300∼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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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
저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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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육신과 영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였을까? 우리 민족은 인간의 죽음을 전통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육신에서의 영혼 이탈, 또는 분리로 규정하였다. 영혼의 육신 이탈 과정은 임종 순간에 가장 절박하게 묘사되며, 이탈당하지 않으려는(죽지 않으려는) 인간과 저승의 명을 받고 이승으로 ‘출장’을 나와서 이탈을 강요하는 저승사자의 갈등으로 그려진다. 망자가 저승사자에게 끌려갈 때, 육신은 남고 영혼만 끌려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충남 서산 지역에서 망인의 저승길을 닦아 줄 때 부르는 무경(巫經)인 ‘황천해원풀이’에서 강림도령이 모생(某生)을 붙잡으러 온다.4)『한국 무가집』 2권, 집문당, 1971, 322쪽. 강림도령이 모생의 실낱같은 목을 옭아매고 철퇴로 두드리자 모생의 혼이 몸에서 분리된다. 이제 혼이 된 모생은 할 수 없이 저승으로 간다.

이승 사자 강림도령 영문 안에 들어서서

팔뚝 같은 쇠사슬로 망자씨 실낱같은 목을 올거

철퇴로 두다리니 정신조차 암암하다

위 영(靈)이라 할 일 없이 저승길을 갈려 하고……

함경도의 망인 천도굿인 망묵굿 가운데 타승굿에서도5)『한국 무가집』 3권, 집문당, 1971. 망자가 입었던 저고리를 벗겨 지붕에 올라가 ‘복호, 복호, 복호’를 세 번 거듭 부르니 ‘이제는 할 수 없이’ 망자가 세상을 떠나 사자들을 따라서 수천 리 저승길을 떠나게 된다. 초상이 나면 혼을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혼은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혼은 늘 불러올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제례(祭禮)는 기본적으로 혼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무속에서만 혼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유교나 불교의 제의에서도 원리는 동일하다. 예를 들어 씻김굿에서 혼맞이굿을 하는데, 혼을 맞이해야만 굿을 시작할 수 있다. 씻김굿에서 망자의 넋은 창호지로 만든 신체를 쓴다. 망인의 넋의 움직임은 이 조형물로 판정한다. 종이로 만든 망자의 넋은 망자의 현현(顯現)인 동시에 씻김의 모든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무구(巫具)이기도 하다. 수망자(水亡者)의 넋을 건지는 혼건지기굿은 영육(靈肉)의 분리를 적실(的實)하게 보여 준다. 물에 빠져 죽은 육신은 못 건져도 혼이라도 건지면 된다는 믿음에는 육신에서 혼을 분리시키는 우리 무속의 생사관(生死觀)이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제주도 무속인 ‘넋들임’은 ‘넋’과 ‘들임’의 복합어로 보인다. 이 무의(巫儀)는 문자 그대로 인간의 육체에서 빠져나간 혼을 원래의 육체에 들여 놓는 의례이다. 인간의 혼은 셋이라 하기도 하고, 일곱이라 하기도 해서 분명하지 않으나, 이 혼이 육체에 안정하여 있을 때는 건강한 상태이지만, 만일 혼의 일부가 육체에서 이탈해 나가 버리면 병이 된다. 죽음은 육체의 혼이 전부 이탈하여 다시 육체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관에서 넋들임 무의를 하는 것이다.6)현용준, 『제주도 무속 연구』, 집문당, 1986, 306쪽. 넋들임은 무당이 집행하는 제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습속(習俗)으로서의 넋들임도 있고 단순한 비념 형식의 넋들임도 있다. 물론 무의의 성격을 정교하게 보여 주는 것은 굿형식에서 볼 수 있는 넋들임이다.

그렇다면 망자의 넋이 차지하는 위상은 어떠한가? 망자의 넋은 신과 동격이기도 하고, 종합적이기도 하다. 씻김굿에서 넋은 신과 혼동되기도 한다.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로 유일신관(唯一神觀)이나 유일적 종교관이 사람들의 인식에 각인되기 전에 일반적 의미에서 신은 넋과 다를 바 없었다.

넋이로세 넋이로세

넋인 줄을 몰랐더니 오늘 보니 넋이로세

신이로세 신이로세

신일 줄을 몰랐더니 오늘 보니 신이로세

넋일랑은 오시거든 넋당삭에 모셔 오고

신일랑은 오시거든 신상에 담아 모셔 오고

신넋이 오시거든 화기사단에 모십시다7)국립 민속 박물관, 『진도 무속 현지 조사』, 1988, 118쪽.

죽은 이에게 혼이 있다면 산 자에게도 혼이 있다. ‘정신 나갔다’, ‘얼이 빠졌다’, ‘넋 나갔다’는 등의 표현은 산 자에게서도 혼이 나갈 수 있음을 말한다. ‘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은 ‘정신(情神)’이란 개념이 다시금 복원되었음을 의미한다. 혼, 넋, 얼 등은 정신을 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산 사람에게도 생령이 있다고 믿으며, 그에 따라 생령굿을 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생령을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의가 나이 먹은 노인층에서 행하는 산오구굿(경상도)이다. 동해안 지역 무당이 행하는 굿은 크게 별신굿과 오구굿 두 종류가 있는데, 오구굿은 보통 오구굿과 산오구굿이 있다. 산오구굿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굿이다. 사실 산오구굿은 불교적 의식으로 주로 부산 지역에서 성행하였으며 다른 지역에는 별로 하지 않았다. 이는 부산 지역의 무속이 좀 더 불교적 색채가 짙기 때문이다.8)최길성, 『한국 무속의 연구』, 아세아 문화사, 1978, 199쪽. 불교적 색채가 짙다고 하여 생령의 존재가 전적으로 불교적인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고창 지역의 씻김굿에서 부르는 장자 풀이에서 장자는 저승길을 피하기 위하여 수를 쓴다. 저승사자가 잡아가는 것은 인간의 혼이다. 저벅거리면서 저승사자가 다가오면 인간은 그만 혼절하여 죽고 만다. 그 순간 영은 저승사자를 따라서 문밖으로 나서며 육신은 남아서 유족이 장례를 치른다. 사마장자는 저승사자에게 일종의 ‘로비’를 하여 저승 명부(名簿)에서는 이 름이 빠졌으나 죽은 뒤에도 저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객귀(客鬼)가 되고 만다. 무속에서는 혼의 처리 문제, 혼의 귀속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육신의 생사와 무관하게 혼이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신원 신화(伸冤神話)라고도 할 수 있는 함경도 망묵굿의 진가장굿에서는 죽은 삼형제의 혼이 원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육신은 잠시 빌렸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혼이다. 삼형제의 혼은 원수인 진가장의 혼을 빼어 목숨을 끊어 놓는다. 원수를 갚은 삼형제는 이승에서의 육신에 상관하지 않고 다시금 파란 나비, 노란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혼이 있고 생령이 존재하다가 그 혼이 빠져나가면 죽음에 이른다. 죽은 뒤에 남은 육신은 유족이 장례 절차를 밟아서 처리하지만 영원히 문제가 되는 것은 넋이다. 육신에서 분리된 넋은 영원히 남아서 조상신으로 후손들을 돌본다. 또한 넋도 저승길로 찾아가는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안착할 수 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넋은 원귀가 되어 떠돌기 때문에 넋을 위해서나 후손을 위해서나 좋은 일이 못 된다. 무속적 절차는 이 같은 일을 하기 위하여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어 있다. 설령 유교적 제사나 불교적 재공양(齋供養)을 올리더라도 씻김굿 따위의 굿판을 벌여 넋을 다스렸다. 즉, 육신과 분리된 넋, 그리고 그 넋을 다스리는 일은 우리 무속이 가장 집중적으로 고민한 대목이며, 여기에서 가장 한국적인 죽음의 의미망(意味網)과 진수가 드러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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