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2장 상장례의 역사와 죽음관
  • 2. 상장의 어원과 시원
정종수

상투를 틀어 머리를 올리는 예를 관례(冠禮)라 하고, 혼인하는 예를 혼례(婚禮)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죽음을 갈무리하는 상례(喪禮)도 관례나 혼례처럼 당연히 죽을 ‘사(死)’ 자를 써서 사례(死禮)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왜 사례라 않고 ‘상(喪)’ 자를 써서 상례라 했을까?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는 사(死), 종(終), 상(喪) 자가 있다. 사(死)란 육신이 죽어 썩는 것을 말하고, 종(終)은 사람 노릇을 끝냄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는 소인의 죽음을 의미하고, 종은 군자의 죽음을 뜻한다. 이처럼 사례, 종례 두 가지를 쓰기가 번잡하다 보니 ‘사’와 ‘종’의 중간을 택해 ‘없어진다’는 의미를 지닌 ‘상(喪)’ 자를 써서 상례라 한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용어는 죽은 자의 신분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기도 한다. 천자(天子)의 죽음을 ‘붕(崩)’이라 하고, 제후(諸侯)는 ‘훙(薨)’이라 하고, 4품 이상의 대부는 ‘졸(卒)’이라 하고, 선비(士)는 ‘불록(不祿)’이라 하고, 서인은 ‘사(死)’라고 한다. 또 시체가 놓여 있는 상태에 따라서도 달리 표현하는데, 상(牀)에 있는 것을 ‘시(尸)’라 하고, 관에 있는 것을 ‘구(柩)’라 한다.

그럼 상례의 발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예기』 「삼년간」에서는 상례의 시원(始原)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동물은 자기 족속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다. 큰 새나 짐승은 그 무리와 짝이 없어지거나 죽게 되면 반드시 돌아와서 돌며, 고향을 지날 때는 날개를 돌이키고 울부짖으며, 발을 구르며 주춤거리다가 가다가는 다시 돌아왔다가 간다. 작은 제비나 참새에 이르기까지도 잠시 동안이라도 지저귀며 울고 슬퍼한 뒤에라야 그곳을 떠나간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두며, 승냥이와 물개는 제사 지내는 시늉까지 한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금수조차도 본능적으로 자기의 족속이 죽으면 슬픔을 나타내는데, 하물며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 대해 어찌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년상은 25개월이면 끝난다. 이것은 사마(駟馬)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39)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처럼 빨리 지나간다는 뜻이다.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왕이 이를 위해서 중도(中道)를 세우고 예절을 제정해서 상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생명과 신체를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사랑과 교육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 은덕은 하늘같이 높고 땅같이 후한데 어찌 부모에게 보은을 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는 예로써 극진히 대접함은 물론이고 죽어서도 계속 장송(葬送)의 예와 제사로써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례란 바로 인간에게 있는 가장 순수한 본연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살아 계실 때는 예의가 좀 부족하고 아쉬움이 있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지만, 이미 돌아가신 부모는 다시 봉양할 수 없다. 때문에 생전에 하지 못한 예를 다할 수 있는 것은 상중(喪中)밖에 없어 온갖 정성과 예를 갖추어 상례를 치르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유교식 상례의 절차, 즉 생자가 사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부터 염습, 안장, 탈상에 이르는 과정이 공경과 효를 나타내는 의식으로 구성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처럼 상례는 효의 발로에서 나왔고, 한편으로는 사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에서 비롯하였다. 그것은 다른 통과 의례가 모두 생자를 주인공 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데 반하여, 상례는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중심이 되어 치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자에 대한 효 관념과 두려움이 복합되어 상장 의례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매장의 시원에 대해 살펴보자.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불에 태우는 화장, 물속에 묻는 수장(水葬), 시신을 토막 내 독수리 먹이로 주는 조장(鳥葬), 나무 위에 매달아 두는 수상장(樹上葬), 땅에 묻는 토장(土葬) 등 시대와 민족에 따라 여러 장법이 시행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행하는 장법은 토장이다.

시신을 땅에 묻기까지의 절차를 장례(葬禮)라 한다. 장례는 상례의 한 절차인데 시체 처리 방법, 매장에 관련되는 예절로 장의(葬儀) 또는 양의(襄儀)라고도 한다. ‘葬(장)’ 자를 풀면 ‘艸+死+艸’가 된다. 곧 시체를 땅이나 널빤지 위에 놓고 다시 풀로 덮어 놓은 형상이다. 장례의 장(葬) 자는 곧 감춘다(藏)는 뜻이다.

『주역(周易)』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따르면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두고 풀이나 나뭇가지로 덮고 나무나 봉분도 하지 않았다. 상복을 입는 기간도 결정되지 않았다. 후세에 성인이 이를 고쳐서 관곽(棺槨)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시신을 묻지 않고 그냥 들에 두다 보니 부모의 시신이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활을 가지고 지키기까지 했다.40)『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조문할 조(弔) 자의 형상은 시체를 풀로 덮어 장사 지내고 활을 들고 짐승을 쫓는 모양이라 했다. 또 『오월춘추(吳越春秋)』에도 부모의 시신이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지키게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상고시대에는 시신을 그냥 들이나 산에 버리거나 초목으로 덮는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시신을 묻지 않고 들에 그대로 방치한 모양의 무덤을 나타낸 글자가 바로 ‘장(葬)’ 자이다.

점차 사람들의 인지가 발달하고 효 관념이 생기면서 방치하던 시신을 구덩이를 파고 묻기 시작하였다. 말이 묻는 것이지 무덤 표면은 봉분은 물론이고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형태였다. 이 같은 평지묘 형태의 무덤이 묘(墓) 자의 형상이다. 이는 시신을 땅속에 매장하고 봉분 없이 평지처럼 한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장구(藤文公章句)」를 보면 왜 시신을 땅에 묻기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상고에 부모가 죽어도 장사 지내지 않는 시대가 있었는데, 부모가 죽자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다. 뒷날 자식이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 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 먹자, 자식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보지 못했다. 그 식은땀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흘린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로 나타나 흐른 것이다. 자식은 곧 집으로 돌아와서 들것과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 부모의 시체를 흙으로 덮는 것이 진실로 옳은 일이라면, 효자나 어진 사람들이 자기 부모의 시체를 덮어 장사 지내는 데에도 반드시 법도가 있어야 한다.

중국의 은나라 때에도 매장지가 없었으며,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무덤도 평지묘였다. 『한서(漢書)』 「유향전(劉向傳)」에도 옛날 무덤은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평평한 형태의 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짐승들이 파헤쳐 시신을 범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신을 짐승에게서 보호하고 무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것이 분(墳) 자 모양의 무덤이다. 글자에서 보듯 시신을 묻고 흙과 조개 껍데기를 수북이 쌓아 만든 무덤이 분이다. 墳(분) 자를 풀면 ‘土+十+十+十+貝’로서 흙과 조개 껍데기 30짐을 쌓아 봉분을 갖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조개 껍데기 속에 시신을 묻거나 흙과 섞어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에 조개 패(貝)를 쓴 것이다. 여기에서 흙과 조개 껍데기가 30짐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많다는 뜻으로, 이 정도면 봉분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과 같은 봉분 형태의 분구식(墳丘式) 무덤은 춘추시대 말기에 처음 만들어져 전국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41)楊寬, 『中國古代陵寢制度硏究』, 上海古跡出版社, 1985. 그것은 공자가 제자들과 나눈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공자가 이미 어머니를 방에 합장하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옛날에는 묘를 쓰고 봉분을 하지 않았으나, 지금 구(丘)는 동서남북의 사람이니 표지를 해 놓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봉분을 만드는데 높이가 4척이나 되었다. 공자가 먼저 들어오고 문인(門人)이 뒤에 오는데 비가 몹시 내렸다. 문인이 오자 공자가 “돌아오는 것이 왜 이처럼 늦었느냐?”고 하자, “방의 묘가 무너졌다.”고 하니 공자는 대답이 없었다. 세 번을 말하자 공자는 이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 들으니 옛날에는 묘를 수리하지 않았다.” 하였다.42)『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공자가 옛날에는 묘를 수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봉분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 이전에는 오늘날의 무덤처럼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 춘추시대 말기는 공자가 살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 결과에서 보듯 중원 지방의 춘추전국시대 분구묘의 출현 시기와도 일치한다. 봉분은 단순히 시신을 감추는 구실뿐만 아니라 무덤의 표시인 묘표(墓標)의 기능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늘날 무덤은 들에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장(葬)의 형태에서 봉분이 없는 평지묘(平地墓)로, 평지묘에서 봉분을 한 분(墳)으로 발전하였다. 즉 무덤의 역사는 장(葬)·묘(墓)·분(墳)의 형태로 변천한 것이다. 오래된 무덤은 옛 고(古) 자를 붙여 고분(古墳) 또는 고총(古冢)이라 부른다. 흔히 무덤을 통틀어 분묘(墳墓)라 한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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