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2장 상장례의 역사와 죽음관
  • 4. 고려시대 사람들의 사생관과 상장례
정종수

고려 건국 초기에는 국가 제도가 완전히 정비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예제(禮制) 같은 풍속에 관한 사회 문제, 즉 상장(喪葬) 의례 체제가 정비되지 못하여 신라시대 때 예제를 답습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또 신라시대처럼 고려에서도 불교가 융성하여 화장과 같은 장법은 귀족층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계승되었다.

한편 삼국시대에 전래되기 시작한 유교는 고려 성종 때 보급·발전되어 불교적 분위기에 유교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918년(성종 4)에 숭유 정책을 표방하고 관제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예제를 정비하기 위해 죽은 자와의 친소 관계에 따라 삼년·기년(1년)·대공(9월)·소공(5월)·시마(3월) 등 상복을 입는 기간과 형식을 달리하는 오복 제도(五服制度)를 최초로 반포하여 성문화하였다.

이러한 유교식 상례를 제정·반포하였지만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여전히 전래적 요소가 강한 무속과 불교 의례가 합쳐진 무불식(巫佛式) 상례와 백일상제(百日喪制)가 널리 시행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 초기 정도전(鄭道傳)이 무속과 불교가 혼합된 상장례의 타파를 주장하며 개탄한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근세 이래로 상제가 크게 무너져서 으레 불교 의식으로 행하게 되는데, 초상을 당하여 아직 매장도 하기 전에 진수성찬을 낭자하게 차리고, 종과 북소리를 떠들썩하게 울려 대며, 남녀가 뒤섞여서 웅성대는가 하면, 상주 되는 이는 오직 손님 접대가 불충분한 것만을 염려하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죽음을 슬퍼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백일의 복제를 입었다 할지라도 얼굴이 수척하거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으며, 말하는 것이 평일이나 다름이 없다. …… 이른바 추천(追薦)이란 것은 다만 남의 보는 눈을 아름답게 할 뿐, 마침내는 집안을 망치고 탕진하는 자까지 또한 있게 된다. 이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무익한 낭비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무궁한 근심을 끼치는 일이니, 그것이 헛된 짓임은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법을 만들어서 막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48)정도전, 『삼봉집』 권13, 「조선경국전」 상, 상제.

또한 고려시대에는 유교식 장법인 토장과 상반되는 불교식 화장법과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추천재(追薦齋) 같은 설재(設齋)가 주류를 이루었다. 화장법은 불교식 장법으로 불교가 전래될 때 함께 들어온 이질적인 요소였으나 불교가 융성하면서 신라 말부터 고려시대 내내 성행하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승려를 다비(茶毘)한다든지 유기된 시체나 전장에서 죽은 자 등을 합법적으로 화장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 화장은 본래 유교적 사상에 위배되는 것인 만큼 당연히 금지 대상이 되었다.

고려의 불교식 화장법은 묘지명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사망-불사(佛寺) 부근에서의 화장-습골(拾骨)-권안(權安, 일정 기간 절에 유골을 안치하는 것)-매장(埋骨)의 과정을 겪는다. 권안을 권빈(權殯)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의 권빈 습속은 다음과 같은 『고려사』의 기록에도 잘 나타난다.

근래에 세상 일이 점점 나빠지고 풍속이 야박하여 부모의 상복을 입고 방탕하게 노는 일도 있으며, 자기 부모의 해골을 임시로 절에 두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매장하지 않는 자도 있다. 해당 관리에게 이런 사실을 조사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되 만일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관가에서 장례 비용을 주어야 할 것이다.49)『고려사』 권16, 세가16, 인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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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절에 권빈하는 습속이 일반적이었으며, 유해를 절에 권빈하려면 화장이나 이차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시대 귀족층은 일반적으로 불교 의식의 상장례를 많이 시행하였으며, 화장묘와 석실묘가 성행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골호(骨壺)를 사용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골호 대신 1m 내외의 소형 석관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사용한 석관은 조립식으로 되어 있으며 뚜껑이나 관의 네 면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같은 사신도(四神圖)나 성운도(星雲圖)를 양각하거나 그렸다. 또한 석관에 명문을 새기기도 하였다.

또한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윤회 봉사(輪回奉祀)와 외손 봉사(外孫奉祀)가 널리 시행되었다. 하지만 고려 말이 되면 불교식 상장례의 폐단을 지적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화장 금지가 처음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인 1389년(공양왕 원년)이다.

장(葬)이란 감춘다는 뜻으로 장사를 지냄으로써 해골을 감추어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근래에 불가의 화장법이 성행하여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들어다 뜨거운 불 속에 넣어 장사를 지낸다. 이리하여 모발을 태워 버리고 피부를 익혀 다만 뼈만 남기며, 심한 자는 뼈를 태워 그 재를 날림으로써 물고기나 날짐승에게 선사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천당에 갈 수 있 고 서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생긴 뒤로는 사대부의 고명한 자들조차도 다 이에 유혹되어 죽은 뒤에 땅에 장사를 지내지 않는 일이 많도다.50)『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공양왕은 아비도 모르는 오랑캐의 법을 따를 수 없다면서 화장하면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불교 장속의 화장법이 조선에 와서도 계속 시행되자 이를 폐속으로 규정하여 1395년(태조 4)에는 삼일장과 화장을 헌사(憲司)에게 금지하게 하였다.51)『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6월 경인.

그러나 화장이 근절되지 않자 1421년(세종 2)에 다시 공양왕 원년 사헌부에서 내린 화장 금지 관련 수판(受判)과 장사에 상두꾼을 모아 술 마시고 노는 폐풍에 대하여 거론하면서 화장의 금지를 강조하였다.52)『세종실록』 권10, 세종 2년 11월 신미.

하지만 1432년(세종 14)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 등의 상소에 따르면 “상제에 부도(浮屠)를 쓰지 않는 자가 10명 중에 3∼4명에 지나지 않는다.”53)『세종실록』 권55, 세종 14년 3월 갑자.라고 한 점으로 보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화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죽은 다음 처음에는 화장을 않고 매장하였다가 뒤에 파분(破墳)하여 화장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54)『세종실록』 권114, 세종 28년 12월 을해 ; 『중종실록』 권55, 중종 20년 11월 갑술.

조정의 이러한 화장 금지 노력에도 일부에서는 화장이 계속되었다. 1470년(성종 원년) 2월에 예조와 사헌부에 전지(傳旨)를 내려 “화장 금지는 조종 이래로 금지시켰는데 이를 행하여 풍속을 허물어뜨리고 인륜을 망치고 있으니, 안에서는 사헌부에서, 밖에서는 감사(監司)·수령(守令)이 엄하게 다스려 죄를 논하고, 또 그 족친(族親)이나 인리(隣里)에서 알면서도 금하지 않은 자도 아울러 처벌하도록 하라.”고 하였다.55)『성종실록』 권3, 성종 원년 2월 병진. 이와 같이 강력하게 화장을 규제하고 『주자가례』의 상장 의례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자 성종 집권 후반기로 오면서 상례에 부도를 쓰는 자가 드물어56)『성종실록』 권261, 성종 23년 1월 경자. 화장이 감소되고, 대신 유교식 장법인 토장이 점차 일반화되어 갔다.

복제도 고려는 조선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백일장을 행했으며, 심지어 는 삼일장을 하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후(公侯) 이하는 3일 만에 장사한다.”고 하였으며, 1395년(태조 4) 6월 헌사(憲司)에서 올린 내용에서도 “모든 전현직 관원은 삼년상을 지내고, 삼일장과 화장을 금지하며 신분에 따라 삼월장(三月葬)과 유월장(踰月葬)을 시행토록 하라.”고 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장례 기간이 매우 짧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장례를 치르는 역월제(易月制)를 행하였다. 역월제란 이일역월지제(以日易月之制)로 하루를 한 달로 바꾸어 행하는 단상제(短喪制)이다. 고려의 역월제는 한나라 문제(文帝)의 다음과 같은 유서에서 비롯하였다.

대개 천하 만물의 탄생에는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는다는 것은 천지의 이치요 사물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어찌 그렇게 슬퍼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날의 세상에는 탄생은 기뻐하면서도 죽음은 싫어하여 생업을 파하면서까지 후하게 장사를 지내고 생활을 잃으면서 상복을 중하게 여기니 짐은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짐은 덕이 없어서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지금 죽는데 또다시 상복을 오랫동안 입게 하고 오랫동안 곡을 하도록 해 추위와 더위에 힘들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유언을 천하의 이민(吏民)들에게 내려 삼일 동안 나아가 곡을 하고 상복을 벗게 하라. 그리고 아들을 장가보내거나 딸을 출가시키거나 제사나 음주, 고기를 먹는 따위의 일을 금하지 말고 스스로 상사 중에 복을 입고 곡을 하도록 하되 음식은 진설(陳設)하지 못하게 하라.57)『한서』 일기(전 12책), 중화서국, 131∼132쪽.

한나라 문제는 비록 국상을 당하더라도 관리와 백성은 3일 만에 상복을 벗도록 하는 단상제를 시행토록 하였다. 또 음주나 고기를 금하는 철선(撤膳)을 하지 못하게 하고, 상중의 가취(嫁娶)를 금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의 불편을 덜도록 하였다. 또한 역월제를 써서 36일 만에 상례를 마치도록 하 였다.58)『한서』 일기(전 12책), 중화서국, 131∼132쪽.

고려 왕실의 역월 단상제는 4대 광종 때 시작되어59)『증보문헌비고』 권65, 예고(禮考)12, 국휼(國恤). 5대 경종, 11대 문종 비 인예 태후, 12대 순종, 15대 숙종, 16대 예종, 17대 인종, 24대 원종 등이 행하였고, 22대 강종은 유언에서 “역월지복삼일이제(易月之服三日而除)”라 하여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던 복제 기간을 오히려 3일 만에 옷을 벗도록 하였다. 이처럼 한나라 문제의 유조(遺詔)에서 비롯한 단상제는 사실상 고려시대 내내 시행되었다.

단상제는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시행되었는데, 1432년(세종 14)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올린 상소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때에는 사민(士民)들이 역월제 때문에 부모의 상을 삼년상으로 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혹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국가에서도 정표(旌表)하였습니다.60)『세종실록』 권58, 세종 14년 12월 계미.

유교식 상례를 내세운 조선에서도 이러한 단상제는 세종 집권 초기 잠시 폐지되었다가 연산군 때 부활되기도 했다. 조선 초의 단상제는 태조의 국상을 맞아 처음 시행되었다. 태종은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상복 기한은 송나라의 역월제를 써서, 즉 하루를 한 달로 바꾸어 13일에 소상하고, 25일에 대상, 27일에 담제를 지내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되, 제도는 모두 문공 가례에 따르도록 하라.”61)『태종실록』 권15, 태종 8년 5월 계유. 하였다. 정종의 비인 정안 왕후가 돌아가셨을 때도 태조의 국상 때와 마찬가지로 역월제를 써서 25일 만에 복을 벗었다.62)『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6월 무인.

이처럼 태조·태종 때에는 원칙적으로 삼년상을 따랐으나 태조 때에는 고려시대 백일상제를 원용하였고, 태종 때에는 역월제에 따른 단상제를 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월 단상제는 태종의 국상을 세종이 주관하면서 폐지되고 삼년상으로 확립되었다.

사대부들이 부모상을 당하면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관직에서 물러나 거상을 하듯이 국왕도 약 27일 정도 정사를 보지 않았는데 이를 청정(聽政)이라 했다. 왕은 조선 초기만 해도 장사를 마치고 나서 다시 한 달 뒤 졸곡(卒哭)을 마친 뒤에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집무를 보지 않은 기간이 6개월 정도였다. 하지만 국왕은 사서인(士庶人)의 예와 같지 않고 상중이라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폐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라 기간이 단축되었다.

태종은 부왕 태조가 승하했을 때 자식된 도리로 삼년상을 치러야 함에도 왕권의 누수와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역월제를 써서 27일 만에 상복을 벗고 정사를 보았다. 태종은 왕비 원경 왕후가 죽었을 때도 아들 세종에게 상복을 13일 만에 벗으라고 하였다. 원래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 하지만 역월제를 써서 계산하면 12일은 12달, 즉 1년이 된다. 실제로 1년 만에 치러야 할 소상을 12일 만에 치르고 13일째에 대상을 행하여 형식상 일년상을 마치게 하였다. 이처럼 태종이 역월제를 써서 상기를 단축하려 한 것은 세종이 하루빨리 상복을 벗고 정상적으로 정사를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역월 단상제는 연산군 때 정순 왕후(인혜 대왕비)의 상을 당하여 다시 부활하였으며, 마침내 1504년(연산군 10) 4월 소혜 왕후(인수 왕대비)의 상을 계기로 표출된 단상제 시도는 연산군이 점점 광포해짐과 함께 급기야 사대부 단상령(短喪令)으로 발전하여 사대부는 27일 만에, 서인은 12일 만에 상복을 벗는 것을 골자로 하는 단상령이 공포되었다.63)박연호, 「조선 전기 사대부례의 변화 양상」, 『청계 사학』 7,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청계 사학회, 1990, 209쪽. 하지만 역월 단상제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삼년상제가 회복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역월제는 고려시대에는 왕실을 비롯해 일반에서도 시행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주로 왕실에 국한하여 적용하였다. 왜냐하면 역월제가 삼년상에 반하는 예법이었지만, 왕이 죽은 뒤의 정치적 공백을 최소화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지방관들이 현지에서 왕의 죽음을 애도하게 하여 왕권 교체기에 있을 혼란을 미리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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