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2. 삼국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 원삼국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원삼국시대는 초기 철기시대가 끝나는 기원 전후 시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 체제를 갖추어 삼국 체제가 성립되기 시작하는 기원후 300년까지를 뜻한다. 이 시기에는 낙랑을 통해 중국 문화가 들어오면서 한반도에서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무덤에서는 중국, 북방, 일본계 유물도 출토되어 대외 교류도 활발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농기구가 철제로 바뀜에 따라 토지 생산력이 증대되고,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사회 계층이 더욱 분화되었다. 무덤 양식에도 변화가 나타나 남쪽 지역에서는 앞 시대의 고인돌, 돌널무덤 등이 사라지고 소형의 돌덧널무덤과 덧널무덤이 출현하였으며, 북쪽에서는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양식상 다소 변화가 있지만 널무덤과 독무덤은 계속 만들어졌다.116)이원광, 「한국 방형주 구묘의 일 고찰」, 『문화재』 33, 국립 문화재 연구소, 2000 ; 조상기, 「원삼국시대 묘제」, 『한국 고대 문화의 변천과 교섭』, 서경 문화사, 2000.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땅인 환인(桓仁) 지방에 분포하는데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그 위에 널을 놓은 후 다시 돌을 쌓은 형식이다. 남쪽에서는 한강 유역인 춘천 중도, 제천 양평리, 양평 문호리 등지에 약간 분포되어 있다. 중도 유적은 한강 유역의 원삼국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인데 그 가운데 돌무지무덤은 초기 고구려 무덤인 돌무지무덤과는 약간 다르지만 전반적인 특징이 고구려의 무덤 양식과 비슷하여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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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호리 1호 무덤 껴묻거리 바구니
다호리 1호 무덤 껴묻거리 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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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무덤은 청동기 후기와 초기 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사용되었고, 남쪽 지역에는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경주 조양동 38호 무덤,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경주 사라리 130호 무덤 등은 부장품이 풍부하고 화려하여 지배층의 무덤으로 본다.

다호리 유적은 원삼국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무덤군으로, 오늘날로 치면 같은 부족의 공동묘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덤 수십 기가 발굴되었는데 일부 독무덤을 제외하면 대부분 널무덤이다. 다호리 널무덤에서 주목되는 점은 껴묻거리 구덩이가 있다는 것이다. 1호 무덤의 경우 널 아래와 묘광(墓壙) 바닥 사이에 껴묻거리를 넣어 둔 구덩이가 있고, 껴묻거리를 직사각형의 대나무 상자에 담아 구덩이 안에 매납하였다. 이렇게 무덤 바닥에 구덩이를 파서 껴묻거리 상자를 묻는 풍습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다호리 유적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대나무 상자 안에는 옻칠을 한 동검, 철검 등 무기와 화폐로 사용한 쇠도끼, 문방구인 붓과 손칼, 청동 거울 등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1호 무덤은 다른 무덤에 비해 껴묻거리의 내용이 풍부해서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는데, 대나무 상자에서 발견된 여러 물건은 당시 지배층의 생활과 내세관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호 무덤에서는 주검을 안치하였던 통나무널이 그대로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으며 원삼국시대의 장제(葬制)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참나무로 만든 이 널은 길이는 240㎝, 너비는 85㎝ 정도인데, 지름 1m 정도 되는 나무를 잘라내 이것을 다시 세로 방향으로 잘라 반으로 나누고, 각각의 내부를 파내어 주검을 안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널의 뚜껑과 몸체에는 두 개씩 ‘ㄴ’자형 구멍이 있고, 이 구멍 안에는 굵은 밧줄을 묶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폭이 좁은 쪽의 널 바깥 부분에는 구멍 대신 납작한 홈이 네 곳에 나 있어 역시 줄을 걸어 당길 수 있게 고안하였다. 따라서 당시 매장할 때 줄을 사용하여 안전하게 하관(下棺)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호리 64호 무덤에서는 철광석도 출토되었다. 보통 무덤에 넣는 껴묻거리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이나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64호 무덤에서는 6㎏이 넘는 자철광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당시 철 생산이 활발하였고, 철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생계 수단으로 인식되었음을 뜻한다. 또 17호 무덤에서는 쇠망치가 출토되었는데 64호와 17호 무덤에 묻힌 사람이 모두 철 생산과 관계된 대표자급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다호리 무덤에서는 칠기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릇을 비롯해 농공구, 붓, 부채 등 다양한 물건에 칠을 해서 사용하였다. 대부분 나무 제품에 검은 칠을 한 것이지만 붉은 칠이 된 것도 있다. 그리고 부채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에 대한 실물 자료로 의의가 있다. 이 부채는 아마 조직을 지휘하거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경주 사라리 유적에서도 원삼국시대의 널무덤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남한 지역에서 발견된 무덤 중 가장 큰 규모인 사라리 130호 무덤에서는 다호리 1호 무덤과 같은 껴묻거리 구덩이가 발견되었으며, 그 안에서 유기물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130호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토광 바닥에 쇠도끼인 판상철부 70점을 7열로 깔고 그 위에 널을 놓았다는 점이다. 껴묻힌 다량의 판상철부는 이 지역 집단이 철 생산지 확보와 교역을 통해 유력한 집단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며, 무덤 주인공의 정치적인 위상과 지위를 반영해 주는 좋은 자료이다.117)이건무·송호정·정성희·한봉규, 「창원 다호리 유적 발굴 진전 보고(Ⅳ)」, 『고고학지』 7, 한국 고고 미술 연구소, 1996 ; 박승규, 「경주 사라리 유적 130호 묘에 대하여」, 『신라 문화』 14, 동국 대학교 신라 문화 연구소, 1997.

덧널무덤은 원삼국시대 후기에 나타나 점차 발전하면서 삼국시대 전 반기까지 널리 유행한 무덤 양식으로, 널의 둘레에 나무판으로 목곽을 만들어 널 바깥 부분을 감싸는 이중 구조이다. 덧널무덤은 주로 산기슭이나 언덕 말단부의 대지 위에 만들었으며 널무덤과 섞여 있기도 하나 널무덤에 비해 껴묻힌 토기나 철기의 수량이 급격히 많아지고 화려해진 점으로 보아 지배자 또는 통치 집단의 무덤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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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리 130호 무덤
사라리 130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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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의 묘제가 널무덤에서 덧널무덤으로 점차 바뀌는 상황을 잘 나타내 주는 유적은 경주 조양동 유적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5호 무덤은 판재로 만든 나무널을 사용하였으며, 다음 단계인 38호 무덤은 같은 널무덤이지만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청동 거울이 출토되어 1세기 전반에 만든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널무덤은 구덩이의 폭이 좁고 깊이가 깊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얕아지는데,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묘제인 덧널무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덧널을 설치하고 그 안에 널을 안치하여 폭이 넓고 깊이는 얕으며, 출토 유물도 청동기는 전혀 보이지 않고 철기가 많이 나왔다. 이 유적을 조사해 원삼국시대의 묘제 변천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초기 철기시대의 널무덤 전통을 이어받아 덧널무 덤으로 바뀐다는 것이 밝혀졌다.

조양동 5호 무덤에서 발견된 쇠뿔손잡이항아리는 무문 토기의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토기로 밝혀졌다. 토기의 색깔이 검고 표면이 마연(磨硏)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앞 단계의 흑색토기긴목항아리의 전통을 이었는데, 원삼국시대 전기에 들어서면 토기의 질은 와질로 바뀌고 밑바닥이 둥글게 변한다. 이 토기는 원삼국시대 후기의 무덤인 덧널무덤에서는 출토되지 않기 때문에 영남 지역의 널무덤의 시기를 따지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또한 철기시대의 무문 토기와 원삼국시대의 와질 토기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연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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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리 162호 무덤
양동리 162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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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양동리 유적에도 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변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이 유적에서는 널무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덧널무덤을 만들기도 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덧널무덤은 널무덤에 비해 껴묻거리가 다양하고 수량도 많아졌다. 양동리 322호 덧널무덤에서는 청동 세발솥이 출토되었는데, 이 솥은 중국 한나라 때 만든 것으로 중국과 교류하였음을 증명한다. 양동리 162호 덧널무덤은 사라리 130호 널무덤과 같이 바닥에 판상 쇠도끼를 깔고 그 위에 널을 얹은 형식이다. 껴묻거리는 상자에 넣은 상태로 묻었는데 검, 화살촉 등 모든 무기류가 철제이면서 다량으로 껴묻혔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무덤은 와질 토기와 청동 거울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2세기 말∼3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데, 적어도 이 시기에는 거울 같은 위세품(威勢品)을 제외하면 모든 무기 종류는 철로 만들면서 철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울산 하대 유적은 원삼국시대 후기의 무덤 유적으로, 덧널무덤이 대부분이다. 유물도 원삼국 후기의 것으로 굽다리접시(高杯), 다리뚜껑단지 등 와질 토기류와 검, 창, 재갈, 고리자루칼(環頭大刀) 등 철기류와 꾸미개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23호 무덤에서는 양동리 유적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동 세발솥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 중 큰 무덤에서는 길이 1m가 넘는 검, 고리자루칼, 대형 투겁창, S자형 대형 재갈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실제로 사용한 것도 있겠지만, 장식적이고 의장적인 성격이 짙어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위세품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기본적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의 묘제를 사용하면서 주구묘(周溝墓)라는 특징적인 양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주구란 널구덩이 위쪽에 말발굽 모양이나 ‘ㄱ’자 모양의 도랑(구덩이)을 두른 것으로, 최근 서남부 지방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또는 장고형 고분의 전신(前身)이 바로 주구묘라는 설이 제기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주구묘는 천안 청당동 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후반에 걸쳐 만들어진 마한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유구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으로 나뉘며, 토기, 청동말모양띠고리, 철기,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5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말모양띠고리는 주검의 허리 부분에서 11개가 겹쳐진 채로 나왔는데, 충청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원삼국시대의 특징적인 유물로 평가되었다. 또한 중국제인 금박유리구슬이 출토되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 도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청당동 유적에서 발견된 25기의 널무덤과 덧널무덤은 원삼국과 백제 초기 무덤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광주 신창동에서는 저습지의 생산 유적과 더불어 독무덤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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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당동 주구묘
청당동 주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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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철기는 검(劍)·고리자루칼(環頭刀)·화살촉·꺾창(戈) 등 무기류, 도끼·끌·낫·낚싯바늘·송곳·가래·괭이(鋤)·밀개·반달칼 등 농공구가 있다. 이처럼 청동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이 제한적이던 앞 시대와는 달리 원삼국시대에는 다양한 철기를 좀 더 많은 계층에서 널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쇠따비, 판상쇠도끼, 이형(異形) 철기 등은 처음 받아들인 철기나 한나라의 철기와는 그 형태가 다른 것으로 독자적인 철기로 생산되었다. 그리고 사라리 130호 무덤이나 양동리 162호 무덤과 같이 무덤의 규모가 클수록 철제 무기와 철소재인 판상쇠도끼가 많이 매납되었는데, 이것은 정치 권력에 따라 철기 생산이 어느 정도 독점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삼한(三韓)은 구슬(玉)을 재보(財寶)로 귀히 여겼다.”는 역사 기록처럼 무덤에서 꾸미개로 쓴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정형화된 곱은옥과 6면체로 정교하게 다듬은 여러면구슬(多面玉), 대롱옥, 유리구슬이 가장 보편적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유리 제작 기술은 초기 철기시대부터 제철 기술과 함께 한나라나 낙랑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전해졌는데, 춘천 중도, 하남 미사리, 해남 군곡리,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유리구슬 거푸집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자체 생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꾸미개인 허리띠 장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동물모양허리띠장식은 북방 민족이 즐겨 사용하던 꾸미개로, 우리나라 원삼국시대의 유적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앞서 언급한 청동말모양띠고리는 충청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으며, 남부 지방에서도 동물모양허리띠장식이 출토되었다. 영천 어은동 널무덤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보는 허리띠장식은 말, 호랑이 모양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경주 사라리 130호 널무덤에서는 호랑이모양허리띠장식이 두 점 출토되었다. 이는 철기가 주된 무기와 도구로 사용됨에 따라 청동기가 점차 퇴화되는 시기의 청동제 유물로 다분히 형식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동물모양허리띠장식은 중국 한나라 무덤이나 낙랑 무덤에서도 발견되어서 있어 이것 역시 중국과 교류하면서 전해진 문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토기로는 단단하게 구운 민무늬토기가 계속 사용되는 한편,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을 도입하여 연질 토기와 와질 토기를 만드는데, 이는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후기에는 삼국시대의 전형적인 토기인 회청색경질(灰靑色硬質) 토기도 만들기 시작한다.118)박순발, 「한강 유역 원삼국시대의 토기의 양상과 변천」, 『한국 고고학보』 23, 한국 고고학회, 1989 ; 이성주, 「원삼국시대 토기의 유형, 계보, 편년, 생산 체제」, 『한국 고대사 논총』 2, 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편, 가락국 사적 개발 연구원, 1991.

연질 토기는 한데가마(露天窯)나 굴가마에서 입구를 개방한 상태로 구워져 보통 갈색을 띠고, 삿무늬나 문살무늬 등 두드림무늬가 베풀어져 있어 민무늬토기와는 기술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여긴다. 연질 토기는 항아리, 독, 굽다리접시, 시루, 솥, 쟁반 등 종류가 다양하고, 무덤에서 출토되기도 하지만 대 부분 집터나 조개더미에서 출토되어 생활용 토기로 볼 수 있다.

와질 토기는 기와의 질감과 비슷하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주로 영남 지방에서 출토된다. 그릇 모양은 한나라의 목기나 토기와 비슷한 요소도 있지만 앞선 시기의 민무늬토기에서 변화된 것들이 많다. 쇠뿔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조합식쇠뿔잡이(牛角形把手)토기와 주머니단지가 기본적인 형태로, 굽다리접시, 화로(火爐)형 토기, 오리모양토기도 있다. 이런 모양의 토기들은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껴묻거리용으로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본다.

와질 토기 제작 기술은 소성도가 점차 향상되고 옻칠을 하는 장식적 기법이 가미되면서 계속 발전하지만, 회청색 경질 토기가 등장하면서 그 기능을 잃게 된다. 회청색 경질 토기는 앞 단계의 흡수성이 강한 토기에서 좀 더 실용적인 토기로 발전하여 ‘토기 혁명’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는데, 와질 토기가 무덤에 껴묻거리 구실을 했다면, 이 토기는 생활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실용기로서의 기능이 좀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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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모양토기(가운데 토기의 높이 18.5㎝)
오리모양토기(가운데 토기의 높이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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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질 토기 중에서 특히 오리모양토기는 낙동강 중·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진한·변한 지역의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는 의기로서 주목할 만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변·진한조에는 “큰 새의 깃을 가지고 죽은 자를 보내는데, 그 뜻은 죽은 자가 날아가도록 하려 함이다(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라고 하였다. 즉 당시 사람들은 죽은 이가 하늘을 날기를 바라고,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믿음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고 죽은 이가 편안히 저승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 미에서 새모양토기를 만들어 무덤에 껴묻거나 장례와 관련된 의식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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