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3. 통일 신라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새로이 편입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의 귀족 문화와 불교 문화가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돌무지덧널무덤을 대신하여 돌방무덤이 왕을 비롯한 귀족에게 수용되었고, 불교 문화가 확산되면서 화장 용기로 도장무늬토기가 제작되었다. 통일 신라 중에서 8세기는 신라 문화가 가장 융성한 시기로, 정치·경제적으로도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

통일 신라의 무덤인 돌방무덤은 6세기경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받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평야 지대에 만들었으나 차츰 주변의 언덕이나 야산에 축조하였다. 돌방 한쪽 벽에 출입 시설을 두어 추가장 등 몇 차례 더 사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평지에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에 비교한다면 대체로 작은 무덤이라 할 수 있다.131)임세권, 「고분-통일 신라-」,『한국사론』 15(한국의 고고학 Ⅲ), 국사 편찬 위원회, 1985 ; 이은창·강유신, 「경주 용강동 고분의 연구-용강동 고분의 발굴 조사를 중심으로-」, 『고문화』 40·41, 1992.

돌방무덤은 지상에다 깬돌이나 판돌로 방의 네 벽을 쌓아 올려 널방을 만들고, 널방의 네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면적을 좁힌 뒤 그 위에 큰 천장돌을 올려 무덤방을 만들었다. 널방의 바닥에는 주검을 안치하는 받침대가 있고, 한쪽 벽에는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널길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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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토우총
장산 토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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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돌방무덤에서는 시상(屍床)이라는 받침대 위에 시신을 안치하였다. 발굴 조사한 무덤에는 대부분 시상 위에 돌베개(石枕)와 다리받침(足座)이 놓여 있었고, 시상 위에서 기와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신라의 돌방무덤에서는 나무관 없이 시신을 직접 시상 위에 안치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노서동의 쌍상무덤(雙床塚)은 초기 돌방무덤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이 집중되어 있는 곳에 있어서 평지에 나타나는 돌방무덤 중 가장 앞선 시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도굴되어 남아 있는 유물은 없지만 높이 70㎝의 시상이 두 개 마련되어 있고, 북쪽 받침대 위에는 판석 6매를 연결한 시상이 있는데, 그 표면에 주검의 윤곽을 음각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경주 보문리 부부무덤(夫婦塚)은 무덤 두 기가 나란히 있는 쌍무덤(雙墳)인데, 남편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고 아내의 무덤은 돌방무덤으로 무덤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또한 포항 냉수리 무덤은 곁방(側室)이 달린 돌방무덤으로 봉토 가운데에 이중으로 돌을 쌓았다. 고구려 돌방무덤과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특징이 잘 결합된 형태로 출입 시설을 조사한 결과 두 차례 이상 추가장을 한 흔적이 있어 당시의 장례 의식을 살필 수 있다.

통일 신라의 무덤 양식은 당시 왕릉 조성에서 가장 완성된 단계에 도달하는데, 흙으로 덮은 봉토(封土)뿐인 옛날 양식에서부터 당대(唐代)의 석물(石物), 신도(神道)가 완비된 형식에 이르기까지 발전 형식을 갖추고 있다. 봉토 주위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자락에 호석(護石)을 돌리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십이지상(十二支像)이 새겨진 판석을 새우기도 하였다. 경주 괘릉에는 십이지상뿐만 아니라 무덤 앞길에 문인상(文人像)·무인상(武人像)을 세우고, 돌사자 등 동물의 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십이지상, 돌사자상 등의 배치는 고려·조선의 왕릉에까지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이 한국식 왕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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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
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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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십이지상은 무덤의 호석에 무덤의 주인공을 수호한다는 뜻에서 쥐(子), 소(丑), 범(寅) 등 동물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12방향으로 방위를 지키는 방위신(方位神)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중국 은(殷)나라에서 시작되었고 무덤 양식에 적용된 것은 당나라 때이다. 우리나라의 십이지상은 처음 당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여기지만 중국에는 무덤 둘레에 십이지상을 돌린 예가 없다. 이렇듯 무덤 주위에 십이지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현상으로, 당에서 얻은 기본 요소를 신라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십이지상은 김유신 묘와 괘릉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며, 이후 왕릉의 호석 면에 계속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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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항아리(왼쪽의 높이 33㎝)
뼈항아리(왼쪽의 높이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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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면서 뼈를 항아리에 담아 묻는 화장 무덤이 성행하였다. 월지(雁鴨池)의 건물지 아래에서 뼈항아리(骨壺)가 발견된 것처럼 삼국 통일 이전에 이미 화장 풍습이 있었으며, 통일 이후 지배층에서 화장을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화장 용기는 대부분 큰 그릇 안에 다시 작은 그릇을 담은 형태이다. 일반적인 형태의 뼈항아리는 다소 장식적인 면이 가미되기도 하였으나 생활 용기로 사용하던 토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화장을 위한 특수 용기도 많이 제작하였는데 토기 표면에 화려한 도장무늬를 새겨 넣었고, 뚜껑과 몸체가 분리되지 않도록 고리를 부착하기도 하였다. 또 경주 조양동 출토 뼈항아리처럼 당삼채(唐三彩)항아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사찰에서는 고승(高僧)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불교식인 화장을 하고 부도(浮屠)를 세웠는데,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 등이 알려져 있다.132)강경숙, 「경주 배리 출토 토기 골호 소고」, 『삼불 김원룡 교수 정년 퇴임 기념 논총』 Ⅱ, 일지사, 1987.

한편 신라가 주변국을 통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지역적인 특색이 있던 무덤 양식이나 껴묻거리는 신라의 양식으로 바뀐다. 전국적으로 신라계 무덤과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신라 영토로 편입된 지역을 신라가 통제하면서 그 영향이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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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유뼈항아리(왼쪽의 높이 13.3㎝)
연유뼈항아리(왼쪽의 높이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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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던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에게 정복되었다. 대가야 지역에 신라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은 무덤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도 관찰할 수 있는데,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 지산동 72호 무덤에 잘 나타난다. 이 무덤은 두 번에 걸쳐 축조되었는데, 대가야계의 뚜껑접시가 껴묻히는 돌덧널무덤에서 짧은 굽다리접시가 출토되는 돌방무덤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나타난다. 이것은 가야의 멸망과 신라계 유물의 확산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강 유역에서도 산자형 금동관 등 신라계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이 고구려 세력을 밀어내고, 신라가 백제를 기습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한강 유역은 경제·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당나라와 교류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다. 이 지역의 무덤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잘 나타나는데, 여주 매룡리, 상리, 파주 법흥리, 성동리 등지의 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에서 신라계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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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유뼈항아리와 석함(뼈항아리의 높이 16.4㎝)
연유뼈항아리와 석함(뼈항아리의 높이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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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동해 등 영동 지역은 5세기에 이르러 신라의 영향을 받는데, 동해 추암동 고분군에서는 신라의 영향을 받은 직사각형의 앞트기식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이 무덤 양식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특히 펴묻기한 여성의 머리 부분에서 퇴화된 양식의 산자형 동관(銅冠)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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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동 무덤 출토 토용(말의 높이 16.0㎝)
용강동 무덤 출토 토용(말의 높이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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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백산맥의 서쪽 지역, 즉 통일 전 백제 지역에서는 통일 신라의 고분도 나타나지만 지역색을 보이기도 한다. 통일 신라의 무덤은 영동 가곡리, 군산 도암리, 순천 용당동, 진안 평지리 등에서 나타나는데, 지역에 따라 돌방무덤, 돌덧널무덤 등 다양한 무덤 양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가 유행하면서 화려한 유물을 부장하는 풍습은 사라져 갔다. 서악리(西岳里) 돌방무덤의 예만 보아도 무덤 주인공의 장신구 착용은 대단히 간소해졌고, 또 한 벌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순금 제품을 대량으로 묻는 풍습은 사라지고 토기나 토용 등 흙으로 만든 것, 간단한 금속제품 등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제 화려한 유물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시대가 지나고 불교와 유교 문화가 들어오면서 내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시대로 전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사회 분위기는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 많지는 않으나 경주 용강동 무 덤에서는 토용(土俑)과 청동제 십이지상(靑銅製十二支像)이 출토되었다. 토용은 모두 28점으로 남자상은 15점이고 여자상은 13점이다. 이들 토용은 사실적인 수법을 보여 주고 있으며 특히 채색된 토용은 흙을 빚은 뒤 백토를 입히고 그 위에 붉은색 물감으로 칠한 것이다. 토용은 삼국시대에 행해진 사람을 순장하는 풍습을 개선한 것으로 사람 대신에 사람의 모습을 한 토용을 묻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청동제 십이지상은 머리는 동물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133)이은창·강유신, 「경주 용강동 고분의 연구-용강동 고분의 발굴 조사를 중심으로-」, 『고문화』 40·41, 1992.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부터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는데, 짧은 다리에 넓은 굽이 달려 있고 네모·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뚜껑사발(有蓋盒)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도장무늬토기(印花文土器)는 이전 시기의 삼각형과 원형의 무늬를 긋는 방식에서 무늬를 새긴 도장을 찍어 무늬를 내는 것으로, 중국의 문양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의 본격적인 교류와 불교 미술의 영향으로 다양한 형태의 토기들이 만들어지는데 대표적인 토기가 뼈항아리와 병(甁)이다.134)김원룡, 「토기-통일 신라-」, 『한국사론』 15(한국의 고고학 Ⅲ), 국사 편찬 위원회, 1985 ; 최병현, 「신라 후기 양식 토기의 성립 시론」, 『삼불 김원룡 교수 정년 퇴임 기념 논총』 Ⅱ, 일지사, 1987.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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