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5장 무속과 죽음
  • 4. 죽음의 축제화 전통과 상두꾼
주강현

죽음은 마냥 비장하고 엄숙한 것이기만 할까? 죽음은 의례에만 강박되어 경직된 것으로만 나타날까? 그렇지는 않았다. 무속에서 죽음을 달래는 조상굿 등이 살벌하고 한탄스럽기는 해도 충분히 유희적이라는 데서 죽음과 축제의 열린 만남이 가능해진다. 굿에서는 가무(歌舞)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굿으로 이루어지는 죽음의 의례는 대단한 축제이다. 더욱이 다시래기 같은 축제 성격의 장례는 유교 사회의 또 다른 측면을 잘 보여 준다.169)주강현,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한겨레신문사, 1997.

가상주 : 장삿집에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어디서 장사를 하나?

산받이 : 무슨 장사? 뭘 팔아?

가상주 : 장삿집에서 팔 거라고는 뻔하지.

산받이 : 뻔하다니?

가상주 : (비밀 이야기하듯이) 아비 송장을 팔아야지.

산받이 : 에끼 천하에 …… 진짜 상주가 들었단 말이야!

가상주 : 그건 자네 씨가 모르는 말씀이야! 내가 돈을 벌려고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그걸 저울질해 보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아버지 제사 밑 천 삼고, 비석도 해 드리고, 묘막도 짓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협조 정신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니, 얼마나 효성 지극하고 건전한 장사냐 말이야?

‘장삿집(상가)이니 아비 파는 장사’를 해야 한다? 아버님 영전 앞에서 ‘아비 송장’을 ‘장사’한다니 엄숙한 유교적 관습에서 보면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매우 오래된 전통이다. 오늘날까지 진도 등에 전해지는 다시래기는 장례식 날 ‘아비를 팔 만큼’ 웃기는 난장판을 꾸미는 장례 놀이이다. 양반 집에 초상이 나면 상민을 불러다가 상여를 메게 하고 단골이 소리를 메기는 전통이 있었다. 민촌에서는 마을 사람이 모두 상두꾼이 되어 상여 놀이를 한다. 슬픔에 잠긴 유족을 웃기게 하는 다시래기를 보노라면, 도대체 상갓집에 와 있는지 놀이판에 와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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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갓집에서의 놀이가 진도만의 독특한 풍습은 아니었다. 섬에 비하여 육지 쪽이 좀 더 일찍 소멸되었을 뿐, 장례와 놀이는 한 테두리로 묶여 이어져 왔다. 황해도에서는 생여돋음(상여돋음)을 놀았다. 해가 져서 밤이 이슥해지면 풍물을 치며 빈 상여를 메고 집집을 돌았다. 놀이 잘하는 사람을 태우고 우는 시늉, 상제 시늉, 재산 나누는 시늉 등으로 웃긴다. 상가에서는 이들에게 돈을 내주고, 닭을 잡아 술대접을 하는데, 술을 가져오면 안주를 내라는 식으로 아주 짓궂게 군다. 상여놀이로 돈도 벌어들여 모처럼 놀기도 하고, 공동 기금을 조성하여 상포계(喪布契)에 보태기도 한다. 상여 놀이가 끝나면 상가로 돌아와 마당에서 시신을 상여에 안치하고 상포계 계원들은 다시 선소리를 위시하여 각종 놀이를 놀고 곱새치기(투전)를 하면서 밤을 새운다. 경상도의 부유한 집에서도 장례놀이 대놀음을 행했다. 진도의 다시래기, 경북의 빈 상여놀이, 충북의 대드름, 충남의 호상놀이, 경기도의 상여놀이처럼 원래 한국의 장례 문화는 하나의 놀이판이었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 주재한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이탈리아 총영사가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책에도 이렇게 썼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가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 아시아 모든 민족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행진하고, 가족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데,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170)Carlo Rossetti, Corea e Coreani, 1904 : 꼬레아 꼬레아니, 서울학 연구소 옮김, 1996.

그동안 『주자가례』에 지나치게 주눅 들어 민족 고유의 장례 풍습은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오늘날의 상갓집 풍습은 엄숙한 예법이 분위기를 압도하여 혹시 웃기라도 할 양이면 불효로 징벌을 받을 판세이다. 그러나 에릭 울프(Eric R.Wolf)는 “농민 문화는 축제로 통한다.”라고 하면서 농민 문화의 전통에는 장례 축제도 포함된다고 설명하였다.

세계 각지의 농민은 여러 가지 축제를 통하여 자기네끼리 유대감을 높이고 이 유대감에 금이 가지 않도록 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런 축제의 형태는 스페인의 수호성자(patron saint) 예배에서부터 중국의 일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수호신을 찬양하기 위한 불꽃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이런 축제 중에는 예컨대 장례식처럼 개인적인 가정 사건을 구실로 열리는 것도 있다. 프레드 기어링(F. Gearing)은 그리스의 카르다밀리 마을 사람들이 장례에서 그들의 공동 의식을 다지는 모습을 기술한 바 있다. 장례식에는 죽은 사람의 친지나 친척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도 참석하며 적들은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171)Eric R. Wolf, Peasants, 1966 : 『농민』, 박현수 옮김, 청년사, 1985.

장례식이 단순하게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만의 통과 의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장례식은 사회적인 단합과 축제 문화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주자가례』가 강화되기 전에 이미 성립된 축제 형식의 장례 풍습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처음 상을 당했을 때는 곡을 하고 울지만, 장사를 지낼 때는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며 장례를 치른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후대의 유교식 장례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었다. 그로부터 1,000여 년이 흐른 뒤, 1398년 『태조실록』에서는, “외방 백성은 부모의 장례 일에 인근 마을의 향도를 모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조금도 애통해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1504년에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지금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져 있지만, 오직 향도만은 아름다운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의 천인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하는데 적으면 7∼9명이요, 많으면 혹 100여 명이 되며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향도 사람들끼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마련하거나 ……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라고 하였다.

성현의 표현대로 ‘참으로 좋은 풍속’이 아닐 수 없다. 향도는 상부상조하는 풍습의 전범으로 향도에서 놀이하는 장례 풍습과 상두꾼 전통이 나왔 다. ‘향도 → 향두 → 상두’로 변화·발전한 것이 그것이다. 조선 초부터 엄숙을 요구하는 유교식 장례가 강요되면서 향도식의 떠들썩한 장례는 거세되었다. 다행히 진도, 제주도 같은 변방에서만 전통이 이어진 셈이다.

상두꾼 행렬과 노래 역시 죽음을 축제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즉, 상두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죽음을 대하는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원초적 풍습이다. 함께 어울려 마시고 놀면서 죽음의 슬픔을 털어 내는 행위에는 어떤 달관의 경지마저 엿보인다. 그리고 북망산(北邙山) 길로 떠나는 이를 달래는 그 기막힌 가락의 상두가를 들으면 죽음은 두렵고 먼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친숙한 어떤 것처럼 느껴진다. 상두가를 부르는 전문적인 상두꾼 제도는 본디 고려 말 조선 초부터 분화를 거듭한 향도에서 비롯하였다. 향도 같은 마을 공동체적 강제에 따라 이루어지던 상례는 상포계 따위의 계 조직으로 축소되었으며, 상례를 집행할 상두꾼의 출현을 요구한 것이다. 향도가 전문 상두꾼으로 나아갈 조짐은 조선 후기 기록에 이미 여럿 나타난다. “향도는 우리나라 방언이다. …… 내가 30∼40년 동안 보니 서울의 민간에서 쌀로써 식리(殖利)하는 것을 향도미(香徒米)라 하며, 또 향도계란 칭호가 있는데, 이는 상도계라 해야 할 것으로서 상장 제구를 빌려 주고 상여를 메는 담군(擔軍)의 터전을 삼기 때문에 향도계라 한 것이다.”라고 하여 향도계, 즉 향도가 상도계로 자리를 잡고 있다.172)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권36, 향도변증설(香徒辨證說). 구림대동계(鳩林大同契)에서도 상역(喪役)과 결부되어 있으니, “과내의 사상(四喪) 영장(永葬) 시에 본 향도는 상가의 묏자리 만드는 일꾼을 내고 나머지 향도는 담군을 차출하되”라는 표현이 보인다.173)『구림대동계(鳩林大同契)』(1743), 동헌(東憲).

북쪽 지방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말 『경원부존행사목(慶原府尊行事目)』을 보면, 향도의 변화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상례에서 향도 계원들이 행해야 할 덕목을 세세한 대목까지 명문화하였다.174)① 향도 회의 때에 이유 없이 참가하지 않는 자와 참가하여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서 어른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체벌을 가한다. ② 공회(公會)의 결정으로 갖가지 물종을 나누어 배정한 후 계원 중에서 자의로 시비 논단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 자에 대하여는 체벌을 가한다. ③ 장사·역사 때에 계원 중에서 사고 있다고 하면서 늦게 오거나, 오지 않는 자에 대하여는 벌로서 정율(正栗) 두 말씩 징수한다. ④ 조운(遭運)을 운하(運下)할 때에는 매호 조 한 섬 한 말씩 운반하고 남은 것이 있더라도 대호(大戶)·소호(小戶)·여호(餘戶) 할 것 없이 다 가서 운반한다. ⑤ 회격을 쌓을 때는 음식물이 없을 수 없는 바, 회를 운반하는 날에는 떡 네 말, 탁주 한 동이씩 모아 음식 하고, 회를 쌓는 당일에는 떡 열 말, 탁주 네 동이씩 하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⑥ 개장(改葬)은 3년 후에 하고, 음식물은 떡 닷 말, 탁주 세 동이씩 하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⑦ 염병으로 사망한 경우의 장사는 5리의 거리까지 하고, 그것을 넘는 거리에는 행상하지 못한다. ⑧ 출가한 딸과 동생이 파가하고 합가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는 원 계원과 같이 취급하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황철산, 「향도에 관하여」, 『문화유산』, 1961년 2호, 평양 사회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조선 후기에는 『주자가례』의 보급과 상장례의 교화로 전래 장례 관습과 유교적 관습이 상호 복합적으로 결합되었다. 원래 전통적 상장례 풍습 은 음주 가무를 곁들인 놀이식의 장례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교적인 『주자가례』 예법을 보급시키려고 할 때 이들 상장례 풍습이 늘 관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향도의 장례 기능이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향도의 장례 기능은 축소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상두꾼 제도에 그대로 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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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상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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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를 근본으로 삼는 조선시대의 통치 정책에서 상장례는 매우 중요했으나, 막상 사람이 많이 필요한 양반층의 산역을 치를 때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전래 향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래 향도는 분화되면서 상민 집단이 중심이 된 상두꾼에 강력한 유제(遺制)를 남겼다.175)주강현, 『한국의 두레』 1, 집문당, 1997.

상두가가 애초에 향도에서 출발한 것은 향도가 일종의 집단 놀이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 태조 때 “외방 백성은 부모의 장례 일에 인근 마을의 향도를 모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조금도 애통해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유교적 장례와 판이함을 알 수 있다.176)『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12월 신미. 장례에 참가한 향도꾼들이 애통해 하기는커녕 즐겁게 놀고 마신다. 그렇다면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장례 풍습은 다분히 유교적인 관습에 의하여 이와 같은 장례놀이 풍습이 거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자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에는 장례 날 먹고 노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유교적인 교화책과는 반대로 민중의 풍습에서는 계속 가무하는 장례 풍습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77)문화재 관리국, 『장례놀이』(무형 문화재 조사 보고서), 1994. 장례 때에 행하던 향도꾼의 상사일과 놀이 풍습은 그대로 상두꾼의 상사일과 놀이 풍습에 이어졌다.

전래 향도 풍습이 현재까지 전래된 하나의 표본으로 제주도의 예를 살펴본다. 제주도에는 근·현대까지 향도 전통이 계속 이어져 왔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계인 차일장계의 책록에 보면, 장막과 상여 등 장제(葬祭) 기구를 보관하는 계로서 1707년의 기록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일장계의 책임자인 포좌감이 10여 세대에 걸쳐 지금껏 내려오고 있고 면임(面任)과 이임(里任), 집강(執綱) 등의 직함이 나온다.178)『제주의 마을』, 도서출판 반석, 1986.

제주도 상례 조직은 ‘골’이라고 부르는 강력한 장례계로 되어 있다. 보통 30호 정도의 단위로 이루어지는데, 이전에는 지방에 따라 100호가 넘을 만큼 자연 마을 전체가 참여하였다. 같은 마을, 같은 골에 장사가 생기면 으레 노력을 부담하는 것을 서로 엄격한 의무로 알았다. 장지가 너무 멀거나 산담까지 쌓아야 하면 두 골을 동원하는 수도 있지만 보통 한 골로 장례를 치렀다. 상두꾼들은 장례날 아침 상가에 초대되어 조반부터 대접받는데 돼지고기 석 점을 짚 끄나풀로 꿰어 나눠 받는 통례가 있다. 장지에서는 상가에서 식사를 마련하고 하관한 뒤 점심을 상두꾼들과 복친(服親)들에게 접대하는 게 보통이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당일 친척들이 장지에까지 마련해 온 부조떡, 곧 ‘고적떡’을 나눔으로써 식사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179)문화재 관리국, 「제주도민의 통과 의례」(무형 문화재 조사 보고서 23호), 1966. 10.

제주도 성읍(城邑)의 장례 조직은 강제적 성격의 향도가 어떻게 분화되었는지 알려 주는 소중한 사례이다. 성읍에서는 마을 단위의 장례조를 골이라 일컫는다. 성읍은 상골·하골·동골·서골로 나뉘었는데, 골 안에 장례가 생기면 모두 1명씩 내야 한다. 마을 안에 있는 모든 가구를 동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유전(留傳)되었는데, 이를 ‘도향(都鄕) 부린다’고 불렀다. 도향은 한 가구에 장정이 없다면 여자라도 한 명씩 내야 했을 정도로 강제성이 강하였고, 1940년까지 전승되고 있었다 한다. 도향을 부린 집에서는 황소를 한 마리 잡아서 문상객을 맞이하고 향도를 접대했다고 한다.180)『제주도의 민속 자료』, 제주도, 1987, 11∼12쪽. 향도라는 말을 쓰고 누구든 강제적으로 상부상조해야 한 것으로 보아 향도 전통이 상당히 강하게 이어진 것이며, 조선 전기 마을 장례의 상부상조 관행이 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도에서는 양반집 초상에 마을 사람을 불러다 상여를 메게 하고 단골이 소리를 메겼다. 민촌에서는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이 상두꾼이 되어 상여놀이를 한다. 앞소리꾼은 전반적인 상여 운상 과정을 소리로 인도하였는데 유능한 앞소리꾼은 상가의 형편에 맞게 소리를 이끌어 간다. 완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이 모두 참여하지만 큰 마을에서는 30호 단위로 반을 편성하여 상사를 치르며 상두꾼에 따라 상엿소리가 연행(演行)되었다. 공동체적 요소가 강한 향도는 차츰 향도계 같은 품앗이 형식으로 축소되었다.

만가(晩歌)는 상례 절차에 따르거나 노래 내용에 따라서 각기 그 명칭이 부여되었다. 이를 크게 나눈다면 출상 전에 망자의 넋을 위무하고 상주에게 망자의 부탁을 당부하는 축원 소리계 또는 관음 소리계와, 발인제를 지내고 출상과 운구 과정에서 불리는 상여 소리계, 장지에 이르러 마지막 하관 성분(成墳)할 때 불리는 달구질 소리계 또는 회다지 소리계로 분류한다.181)신찬균, 『한국 만가』, 삼성 출판사, 1990, 20∼21쪽. 만가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향두가(香頭歌)를 생각해 볼 수 있다.182)김성배, 『한국의 민속』, 집문당, 1980, 320∼321쪽.

향두(香頭)는 향도에서 앞장선 사람이 선소리를 잡으면서 상례를 치렀던 데서 머리 ‘두(頭)’ 자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즉, 향도가 분화되면서 한 가지 맥은 노동 조직인 황두로 갈라져 나갔으며, 다른 한 가지 맥은 전문 상두꾼으로 이어져서 향두가에 옛 향도의 유제로 전해 준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전기에는 마을 사람이 모두 결합된 ‘향도결계(香徒結契)’에서 이 루어진 상례가 차츰 전문 상여꾼의 등장으로 변해 가면서 한층 세련된 음악적 구성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재지 사족(在地士族)을 중심으로 한 동족 마을의 번성은 양반과 상민 마을을 뚜렷하게 구분하였으며, 상례는 전적으로 상민의 몫이 되었다. 양반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주자가례』를 논하고 있었지만 상민은 전래 향도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양반의 상례를 도맡아 처리했다. 이러한 까닭에 향두가에는 다분히 상민의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상례 자체가 노동이기 때문에 달구질, 회다지, 가래질 같은 노동요 성격의 향두가를 발전시켰다. 이들 향두가는 단순하게 향두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요로도 불렀다. 반대로 일상생활에서 불리던 노동요가 그대로 향두가에 전용되었다.183)진도 지역에서는 상례 반주 악기로 풍물이 동원된다.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원동 마을에서도 풍물로 상엿소리를 하는데, 장지에서 돌아올 때 ‘질꼬내기’도 부른다. 이 노래는 논매기를 마치고 부르는 풍장소리와 같다(최상일, 「전남 지역 민요의 분류와 분포」, 『한국 민요 대전』 2, 전라남도 민요 해설집, 1993, 46쪽). 반대로, 상엿소리를 그대로 논매기 소리에 가져다 쓰는 경우도 많다. 노동요와 상엿소리의 호환 관계는 죽음 의례가 대단한 축제라는 뜻도 된다. 예를 들어, 산역의 가래질소리는 농사에서 논두렁 붙이는 가래질소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즉, 향두가와 여타 민요는 노동을 축으로 하여 상호 호환되는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분화되기 전 향도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로 신앙적 측면 외에 노동적 측면이 있었거니와, 그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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