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을 내면서
전경욱

지난해 중국 윈난성 쿤밍시에서 연구년을 보내며 ‘한류 열풍’을 실감하였다. 중국 어디를 가든,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만 알면 곧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 시시콜콜 캐묻곤 했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를 수출하기는커녕 수입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드라마는 아시아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류 열풍을 일으킨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바로 독자성을 바탕으로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수렴하여 독특하고 풍부한 연희 문화를 창출해 온 우리의 저력에서 기인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은 이미 깊이 뿌리내린 토착 연희 문화에서 비롯하였다. 일례로, 삼국시대에 서역과 중국에서 외래 연희들이 대거 유입되었지만 우리 연희 문화는 고유의 브랜드를 잃지 않고 고구려악, 신라악, 백제악과 같은 수준 높은 연희를 발전시켰다.

동아시아 공동의 문자인 한문이 삼국시대에 전래하고, 공동의 종교인 불교도 고구려에는 372년(소수림왕 2)에 들어왔다.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 문 화인 산악(散樂)·백희(百戲)도 삼국시대에 중국과 서역에서 전래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백희, 가무백희, 잡희, 산대잡극(山臺雜劇), 산대희(山臺戲), 나례(儺禮), 나희(儺戲) 등으로 불렀던 연희 종목들은 대부분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통 연희의 범주에는 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들과 조선 후기에 성립된 본산대놀이 가면극, 판소리, 꼭두각시놀이 등 발전된 양식의 연극적 갈래들이 포함된다.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유입된 궁중 정재(宮中呈才)도 전통 연희의 범주에 포함된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연행되던 산악·백희의 종목은 크게 곡예와 묘기, 환술(幻術),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동물 재주 부리기, 인형극, 골계희(滑稽戲), 가무희(歌舞戲), 악기 연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자생적인 전통의 산악·백희 종목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롭고 수준 높은 산악·백희의 종목들이 중국과 서역에서 다수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연희 종목들도 중국과 서역의 뛰어난 연희자들이 공연하는 수준 높은 연희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하였다.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를 벽화로 남긴 고구려 고분들은 3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악이 수나라 개황(開皇, 581∼600) 초에 칠부기 중의 하나로 중국 문헌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고구려에서는 이미 산악·백희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기는 수나라의 칠부기와 구부기에 들어 있었고, 백제기와 신라기는 칠부기 외의 외국악(外國樂)으로 존재했다. 이어 고구려기는 당나라의 십부기에도 들었고, 백제기는 십부기 외의 외국악으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삼국악은 이미 수나라 이전부터 중국에 전해졌고, 수준도 상당히 높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의 악(樂)은 오늘날처럼 음악만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라 춤·노래·연희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쓰였다.

또한 고구려는 서역계의 악기와 가면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에서도 백제악·신라악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고려악(高麗樂, 고마가쿠)이라는 명칭으로 전래되었다. 여기서 고려악은 고구려악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5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신라악·백제악·고구려악의 순서로 전래되어 병립했으나, 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래 악무(外來樂舞)를 정리할 때 당나라와 천축(인도) 등의 악무를 좌방악(左方樂)이라 하고, 삼국 및 발해의 악무를 우방악(右方樂)이라 하였다. 우방악은 일명 고려악이라고 하여, 고구려악이 삼국악의 총칭으로 불렸다. 고구려악은 24곡(曲)이었는데, 이 중 12곡은 가면무악(假面舞樂)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연희는 처용무와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에 묘사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 등 다섯 가지 연희를 들 수 있다. 이 연희들은 ‘향악’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서역계통악(西域系統樂)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팔관회·연등회를 비롯하여, 수륙재·우란분재·나례·수희(水戲), 왕의 행행(行幸)과 환궁, 궁중 연회, 개선장군의 환영 잔치 등에서 각종 연희를 공연했다. 그 연희 내용은 주로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곡예적 연희와 환술, 산악의 한 종목인 골계적 우희, 가면희, 교방 가무희(敎坊歌舞戲)인 궁중 정재 등이었다.

곡예적 연희와 환술은 여러 기록에서 잡희, 백희, 가무백희, 산대잡극, 산대희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지만, 결국 그 연희 종목들은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우희는 길거리, 궁중 연회, 사냥터, 절에서의 연회 등 다양한 곳에서 연행될 정도로 대중적인 연희로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 가면희의 예로는 『고려사』에 보이는, 최이(崔怡)가 고종이 베푼 연회에서 가면인잡희(假面人雜戲)를 바쳤다는 내용, 처용의 가면을 쓰고 처용무를 추었다는 내용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말로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자를 광대라 한다.”는 『고려사』의 기사를 통해서 전문 연희 자들의 가면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궁중 정재는 새로 생긴 것인데, 송나라의 가무희를 도입하여 팔관회와 연등회 등에서 연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문희연, 수륙재, 우란분재, 관아 행사, 읍치 제의(邑治祭儀), 동제(洞祭), 사대부가의 잔치 등에서 연희를 공연했고,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유랑 예인 집단들이 민간에서 연희를 공연하고 다녔다. 이 밖에도 내농작(內農作) 등 각종 궁중 행사와 지방관을 환영할 때에도 연희를 연행했다. 연희의 명칭은 나희, 나례, 산대나례, 채붕나례, 잡희, 백희, 가무백희, 산대희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지만, 그 연희 종목들은 대부분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났고, 전통 연희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는 국가적 행사인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궁정 중심의 각종 행사들이 위축되거나 소멸되었다. 반면에 국가 행사와 궁정 행사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민간에 퍼져 공연 활동을 벌였다. 이에 따라 기존 연희를 바탕으로 혁신적으로 재창조한 본산대놀이 가면극, 판소리, 꼭두각시놀이 등 새로운 연극적 갈래가 성립되었고, 민간을 떠돌면서 연희를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유랑 예인 집단들이 속출하였다.

삼국시대에 전래한 산악·백희의 종목들은 이후 더욱 발전하여 중국과 일본에 영향을 줌으로써 연희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황창무·처용무 등 자생적 연희도 생겨났다. 그리고 한국적 변용을 통해 토착화하면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본산대놀이 가면극, 꼭두각시놀이, 판소리 등 발전된 양식의 연극적 갈래를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006년 7월

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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