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1장 전통 연희의 전반적 성격
  • 2. 전통 연희의 종류와 외국과의 교류 양상
  • 골계희
전경욱

골계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 흔히 소학지희(笑謔之戲)라고 불렀던 연희다. 중국에서는 전문 ‘배우’가 연희하여, 흔히 골계희를 우희(優戲)·배우희(俳優戲)·창우희(倡優戲)라고 불렀다.

그동안 학자에 따라 우희를 소학지희·조희(調戲)·화극(話劇)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에는 대부분 우희·배우희·창우희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명칭이나 중국과 일본의 예로 볼 때 우희가 가장 적당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유입된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 우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희로 계승되고, 이 전통 속에서 우희가 판소리·가면극·재담·만담 등에 영향을 끼쳤다.

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 중 월전(月顚)은 우희로 볼 수 있다.

어깨를 높이고 목을 움츠리고 머리털은 빳빳 / 肩高項縮髮崔嵬

팔소매를 걷은 여러 선비들이 술잔 다툰다 / 攘臂群儒鬪酒盃

노랫소리를 듣고서 모두 웃어 젖히며 / 聽得歌聲人盡笑

밤들어 꽂은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네 / 夜頭旗幟曉頭催

월전은 구경꾼의 반응을 통해 골계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인사문(人事門) 이유위희(以儒爲戲)조4)이익,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2, 인사문(人事門), 이유위희(以儒爲戲).에 따르면, 이유위희는 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쓴 선비로 분장한 연희자가 꾸며 낸 이야기와 억지웃음으로 온갖 추태를 연출하는 내용이다. 이는 흔히 유희(儒戲)라고 하는 연희로 우희의 일종이다. 곧 월전은 시사(時事) 풍자적인 내용을 다루는 우희였던 듯하다.

고려시대의 우희는 길거리, 궁중 연회, 사냥터, 절에서의 연회 등 다양한 곳에서 연행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다음 인용문과 같이 우희(優戲)·창우희(倡優戲)·배우희(俳優戲)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가) 염흥방(廉興邦) 집의 노비와 이림(李琳)의 사위인 판밀직 최렴(崔濂) 집의 노비들이 부평에 살면서 권세를 믿고 방자하여 횡포가 심하였다. …… 흥방이 일찍이 아비가 다른 형인 이성림(李成林)과 함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말과 마부가 길에 가득 찼다. 어떤 사람이 우희를 하는데, 그 내용은 극세가(極勢家)의 노비가 백성을 괴롭혀 조세를 거두는 것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성림과는 달리 흥방은 즐겁게 구경하면서 깨닫지 못하였다.5)『고려사(高麗史)』 권126, 열전39, 염흥방.

(나) 충렬왕 14년(1288) 9월 임자일. 이날은 세자의 생일인 까닭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상장군 정인경(鄭仁卿)은 주유희(侏儒戲, 난장이 놀이)를 하고 장군 간홍(簡弘)은 창우희를 했으며, 왕도 손뼉을 치며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6)『고려사』 권30, 세가30, 충렬왕 14년 9월.

(다) 고려 장사랑(將仕郞) 영태(永泰)는 배우희를 잘했다. …… 또 영태가 충혜왕을 따라 사냥을 갔을 때도 늘 우희를 하니, 임금이 그를 물속에 던져 버렸다. 영태가 물을 헤치고 나오니, 임금이 크게 웃으며 “너는 어디로 갔다가 지금 어디서 오느냐?” 하니, 영태는 “굴원을 보러 갔다가 옵니 다.” 하였다. 임금이 “굴원이 뭐라고 하더냐?” 하니, “굴원이, ‘나는 어리석은 임금을 만나 강에 몸을 던져 죽었지만, 너는 명군(明君)을 만났는데 어찌 하여 왔느냐?’ 했습니다.” 하니, 임금은 기뻐서 은구(銀甌) 하나를 주었다.7)성현, 『용재총화(慵齋叢話)』 권3.

(가)는 당대 권세가의 횡포를 풍자하는 시사성을 띤 우희가 민간에서 연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왕이 베푼 연회에서 상장군 정인경은 난장이 놀이, 즉 난장이를 흉내내는 주유희를 했고, 장군 간홍은 창우희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때 장군 간홍이 했다는 창우희가 우희인 것으로 짐작된다.

(다)는 장사랑 영태가 관리로서 배우희·우희를 잘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다)와 같은 내용의 우희는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을 『태평광기(太平廣記)』 고최외(高崔嵬)조에서 『조야첨재(朝野僉載)』를 인용해 소개하고 있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중국의 우희가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장사랑 영태는 우희를 즉흥적으로 펼친 것이 아니라 전래된 우희를 익혀서 보인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우희는 형식과 주제가 중국의 우희와 매우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연희 내용은 우리나라의 정서와 배경을 반영하여 새롭게 창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우희의 공연은 궁중의 진풍정(進豊呈), 세시의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문희연 등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라) 중종 때 정평 부사 구세장은 탐욕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말안장 파는 사람을 관가로 끌고 가 친히 값을 흥정하면서 싸다느니 비싸다느니 따지기를 며칠이나 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관가 돈으로 샀다. 우인이 세시에 그 상황을 연희로 만들었는데, 임금이 묻자 대답하기를, “정평 부사가 말 안장을 산 일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명을 내려 그를 잡아다가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배우 같은 자도 능히 탐관오리를 규탄하고 공박할 수 있다.8)어숙권, 『패관잡기(稗官雜記)』 권2.

(마) 잡희가 함께 시작되어 밤 이고(二鼓)에 역귀를 쫓는 우인들이 연희를 통하여 서로 문답하면서 관리의 탐오(貪汚)하고 청렴(淸廉)한 모양과 민간의 더럽고 자질구레한 일에 이르기까지 들추어내지 않는 것이 없었다.9)『세조실록』 권34, 세조 10년 12월 28일 정미.

(바) 임금이 구중궁궐에 깊숙이 살아서 정치의 득실이나 풍속의 미악(美惡)을 듣지 못하는 것이 있다. 따라서 비록 배우의 말이나 어떤 것은 규풍(規風)의 뜻이 있어 채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나례를 설치하는 까닭이다. 요즈음 들어 본뜻을 잃어 버리고 단지 기기(奇技)와 음교(淫巧)로 마음과 눈을 현혹하게 하니 설치하지 않는 것만 못 하도다.10)『명종실록』 권27, 명종 16년 12월 29일 갑신.

(라)는 이른바 ‘탐관오리놀이’인데,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부패한 관원을 비판한 시사 풍자적 성격의 우희다.

(마)는 나례에서 우희를 연행하는 내용으로, 연희자가 관리들의 탐오하고 청렴한 모양과 민간의 더럽고 자질구레한 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을 들추어내어 다루었음을 전해 준다. 즉, 탐관오리 풍자와 민간의 시사 풍자를 말한다.

(바)는 우희의 시사적 성격과 풍간(諷諫)의 기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희가 임금에게 정치의 득실이나 풍속의 미악을 깨우치게 한다는 내용이다.

중국의 우희에는 임금을 풍간하는 내용, 부패한 관원을 풍자하는 시사적인 성격을 띤 내용, 흉내내기 연희, 주유희가 있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시대의 우희도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명칭도 우희·창우희·배우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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