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1. 궁정 연회의 규범
  • 궁중 연향과 정재의 공연
사진실

『고려사』 「예지」에 기록된 가례와 빈례의 의주(儀註)에 따르면, 임금이나 왕세자 등 행사 주인공에게 술을 올리는 예식 절차와 더불어 교방의 음악이 연주된다. ‘대관전(大觀殿)에서 군신(群臣)을 연회(宴會)하는 의주’에 따르면,37)『고려사』 권68, 지22, 예10, 가례(嘉禮), 대관전연군신의(大觀殿宴群臣儀). 연회가 시작되기 전 태악령(太樂令)이 교방의 악관(樂官)을 거느리고 들어가 자리로 나아간다. 임금이 자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음악 연주가 필요한 까닭이다. 태자 이하 신하들이 술잔을 올릴 때마다 임금이 잔을 들면 음악을 시작하고 내려놓으면 음악을 멈춘다. 임금이 태자 이하 신하들에게 술이나 차를 내릴 때에도 잔을 들면 음악을 시작하고 내려놓으면 음악을 멈춘다. 이때의 음악 연주는 바로 교방 가무희, 곧 정재의 공연을 가리킨다.

궁중 연향에서 정재를 공연하는 절차는 조선시대 진연(進宴)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진연은 국가적인 경사를 맞아 특별히 거행하는 대규모의 연회를 가리키기도 하고 진풍정(進豊呈), 진찬(進饌), 진작(進爵)과 같은 연회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였다.38)이재숙 외, 『궁중 의례와 음악』,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84쪽. 진연은 다시 외연(外宴)과 내연(內宴)으로 나뉘는데, 문무 대신 이하 신하들이 참석하는 외연을 거행하고 나서 궁궐의 비빈(妃嬪)과 내·외명부(內·外命婦) 등 여자들이 참석하는 내연을 거행하였다.

궁중 연향은 예악론의 이념을 바탕으로 거행되었다. 의례 절차를 통하 여 예(禮)의 원리를 실천하고, 정재의 공연을 통하여 악(樂)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39)진연을 거행하여 정재를 공연하는 절차를 예악론 관점에서 분석한 논의는 사진실, 「진연과 정재의 공연 미학과 예악론」, 『공연 문화의 전통』, 태학사, 2002 참조. 예가 대상을 차별하여 질서를 이루게 한다면 악은 대상을 동화시켜 조화를 이루게 한다. 예악의 원리는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함께 작용한다. 예가 승하여 거리가 생기는 폐단을 악으로 보완하고 악이 승하여 절제함을 잃는 폐단을 예로 보완한다는 것이다.

진연은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잔치로서 술과 음식, 재주를 바친다. 술잔을 바치는 절차는 일반적으로 제1작에서 제9작까지 이어지며 한 차례의 헌작(獻爵)에 한 차례의 정재가 수반된다. 이러한 예식 절차를 통하여 진연 절차와 정재 공연에 구현된 예악의 이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1630년(인조 8) 진풍정에서 제1작을 올린 후 정재를 공연하는 부분이다.40)이하 인용한 내용은 의궤의 절차를 요약하여 항목으로 나눈 것이다. 원문 및 번역문은 송방송·고방자 외 옮김, 『국역 풍정도감의궤』, 민속원, 1999, 101∼103쪽 참조.

1. 상궁의 인도로 전하가 주정의 동쪽에 이르러 북쪽을 향하여 선다.

2. 제1작을 따라 꿇어앉아 전하에게 올린다.

3. 전하가 작을 받아 대왕대비의 자리 앞에 나아가 꿇어앉는다.

4. 전찬의 창(唱)에 따라 왕세자 이하 모두 꿇어앉는다.

5. 전하가 상식에게 작을 준다.

6. 상식이 작을 받들어 대왕대비의 자리 앞에 놓는다.

7. 전하 부복하고 일어나서 배위로 나아가 꿇어앉는다.

8. 전언이 대왕대비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전하의 치사(致詞)를 대신 올린다.

9. 전하가 대치사(代致詞)에 이르기를 “경사스러운 달 좋은 날에 공경히 예연을 베풀어 삼가 천천세수(千千歲壽)를 올리나이다.”라고 한다.

10. 상의가 대왕대비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대왕대비의 전지(傳旨)를 대신 내린다.

11. 대왕대비가 선지(宣旨)에 이르기를 “전하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하 노라.”라고 한다.

12. 대왕대비가 작을 든다.

▶악작(樂作) 헌선도(獻仙桃)

13. 상식이 나아가 빈 작을 받아 주정에 돌려놓는다.

▷악지(樂止)

14. 전찬의 창에 따라 전하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평신한다.

15. 왕세자 이하도 같이 한다.

16. 상궁의 인도로 전하가 소차에 들어간다.

이때의 진풍정은 대왕대비의 축수(祝壽)를 위한 내연으로 임금 이하 아홉 명의 참석자들이 대왕대비전에 술잔을 올리게 된다. 제1작을 올리기 위해서는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거나 물러가고, 꿇어앉거나 서고 엎드려 절하는 예식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술을 따르고 올리는 절차는 집사자(執事者)가 대신 집행한다. 대왕대비전에 술잔을 올리는 데 필요한 모든 순서와 동선 등에는 예의 차별과 질서가 구현되어 있다.

술을 올리는 예식 절차는 ‘재주를 바친다’는 정재의 공연 행위와 맞물려 예와 악이 합일되는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차별과 질서를 명시하는 예의 원리가 구현되는 가운데 조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악인 정재가 연출된다. 대왕대비가 술잔을 들면서 악이 시작되어 술잔을 내려놓으면 끝나게 된다.

이 진풍정의 제1작에서는 당악 정재 헌선도(獻仙桃)를 공연하였다. 헌선도는 조선시대 거의 모든 내연에서 제1작의 정재로 연출된다. 대부분의 내연이 대왕대비의 만수(萬壽)를 기원하여 거행되는 까닭이다. 헌선도는 곤륜산(崑崙山)에 살며 인간의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주관하는 서왕모(西王母)가 한 무제(漢武帝)를 방문하여 불사의 과일인 선도(仙桃)를 바쳤다는 고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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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의 여령 정재(女伶呈才)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의 여령 정재(女伶呈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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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작의 헌선도에 이어 수연장(壽延長), 금척(金尺), 봉래의(鳳來儀), 연화대(蓮花臺), 포구락(抛毬樂), 향발(響鈸), 무고(舞鼓), 처용무(處容舞)의 아홉 정재가 공연되었다. 정재의 작품을 선정하고 순서를 정할 때는 진연의 목적에 따른 원칙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연장도 마찬가지로 수명 연장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제2작 정재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금척과 봉래의는 국가의 위업을 드러내는 정재로서 제3작과 제4작으로 공연되었다. 금척은 조선 왕조의 창업 사적을 담아 정도전이 지은 악곡을 성종 때 당악 정재로 창작한 작품이다. 봉래의는 악장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얹어 부르는 향악 정재로서 금척과 마찬가지로 조선 왕실의 위엄과 정당성을 나타내고 있다. 제5작 연화대와 제6작 포구락은 중국에서 전래한 당악 정재로서 놀이의 성격이 짙어 진작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다. 제7작 이후의 정재는 모두 향악 정재이며, 특히 무고와 처용무는 기원이 고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으로서 민간의 풍속이 담긴 정재라고 할 수 있다. 처용무 는 언제나 진연의 절차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공연되었다. 처용무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뜻을 담은 나희(儺戲)의 차원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이다.41)향악 정재와 당악 정재의 일반적인 설명은 다음의 저서를 참조하였다. 성경린, 『한국 전통 무용』, 일지사, 1979 ; 장사훈, 『한국 무용 개론』, 대광 문화사, 1995 ; 송방송, 『한국 음악 통사』, 일조각, 1998.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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