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2. 궁정 연회의 공연 공간
  • 행렬 의식의 공연 공간
사진실

고려시대 행렬 의식의 공연 공간은 이색의 한시 「동대문에서 대궐 문 앞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바라(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 잘 나타나 있다. 시의 제목에서 동대문에서 대궐 문 앞에 이르기 까지 공간의 이동을 명시하고 있어 이때의 산대잡극은 행렬 의식의 일환으로 거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산대를 맺은 것이 봉래산 같으니 / 山臺結綴似蓬萊

과일을 바치는 선인이 바다에서 왔네 / 獻果仙人海上來

놀이꾼의 풍악 소리 천지를 진동하고 / 雜客鼓鉦轟地動

처용의 소맷자락은 바람을 따라 휘돈다 / 處容衫袖逐風迴

장대에 의지한 사내는 평지를 가듯 움직이고 / 長竿倚漢如平地

폭죽은 번개처럼 하늘을 찌르네 / 瀑火衝天似疾雷

태평스러운 참 기상을 그려 내고자 하나 / 欲寫太平眞氣像

늙은 신하의 글재주 없음이 부끄럽도다56)이색, 『목은집』 권33, 「자동대문지궐문전산대잡극전소미견야(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 / 老臣簪筆愧非才

첫머리에서 “산대를 맺은 것이 봉래산 같다.”고 하였는데 봉래산은 오산(鰲山) 또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선이 살며 장생불사의 약초가 난다는 선계(仙界)를 말한다. 여기서 봉래산은 단지 신비한 산의 모습을 비유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뒤이은 구절에서 “과일을 바치는 선인이 바다에서 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과일을 바치는 선인은 봉래산에 사는 신선으로 장생불사의 과일을 바치러 온 것이고, 이때의 산대는 분명히 전설 속의 봉래산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선이 과일을 바치는 장면은 산대 위에 잡상(雜像)을 만들어 형상화하였을 수도 있고,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서왕모가 선도를 바치는 모습을 표현한 정재 헌선도를 공연하였을 수도 있다. 산대를 만드는 전통에 따라 봉래산 위에는 잡상으로 연출한 신선들의 세상이 펼쳐져 있고, 산대 앞 광장에서는 봉래산에서 날아온 듯57)신화에 따르면, 서왕모는 곤륜산에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재 헌선도의 창사에서 서왕모는 자신이 봉래산에서 왔다고 노래하고 있다. 서왕모의 모습으로 분장한 기녀가 선도를 바치는 장면을 상정할 수도 있다.58)이혜구, 앞의 책, 505∼506쪽.

이러한 공연 방식은 조선시대 임금의 환궁 행사에서 공연된 교방가요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방가요에서는 산대의 일종인 침향산을 거리에 세워 두고 정재인 학무와 연화대를 공연한다. 침향산은 나무판자로 산 모양을 만들고 앞면과 뒷면에 피나무로 산봉우리를 조각하여 붙이고 사찰과 탑, 부처와 승려, 고라니와 사슴 등의 잡상을 만들어 설치하고 채색하여 만들었다.59)이색의 한시에 나타난 산대의 연출 방식에 대해서는 사진실, 「금강산의 팔선녀: 산대의 이념과 미학」, 『국문학연구』 8, 국문학회, 2002, 18∼20쪽 참조. 침향산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백학과 청학, 연꽃에서 나온 동녀(童女)는 정토(淨土)인 침향산에서 날아온 듯 연출되었다.

연도의 행렬 의식인 환궁 행사는 교방가요의 정재에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광화문에 이르러 산대 앞 가무백희의 공연에서 극대화되었다. 장생불사의 신화를 간직한 봉래산이 큰길 좌우에 높이 솟아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모인 재인, 광대들이 백희를 연행하였다. 산대 앞 광장이나 거리에서 펼쳐치는 여러 가지 놀이들은 인물정태(人物情態)가 뒤섞인 세속 그 자체이며 온 나라 백성들의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거리에서 벌어진 난장적인 축제의 힘은 산대를 통하여 수직으로 상승하고 봉래산의 상징성과 결합하여 사회적인 지배 이념으로 수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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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향산
침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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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나례에는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큰 경사를 만방에 자랑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화려한 볼거리와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온 백성의 기쁨과 왕실의 번성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임금을 높이고 경사를 축하하는 뜻을 담아 세운 거대한 기념물이 바로 산대다. 그래서 산대의 모습은 하늘을 향하여 높이 솟아 있고 온갖 장식으로 화려함을 추구하였다. 산대는 동아시아 중세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궁정 문화의 상징이었다.

선조 때의 사례를 보면 봄산(春山), 여름산(夏山), 가을산(秋山), 눈덮인 겨울산(雪山) 등 사계절 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산대를 세 웠다.60)『광해군일기』 권156, 광해군 12년 9월 3일(정축). 광화문 앞 좌우 연도에 사계절의 산대를 각각 세웠으니 모두 여덟 좌인 셈이다. 산대 하나를 만들기 위하여 90척 높이의 상죽(上竹)이 세 개씩, 80척 높이의 차죽(次竹)이 여섯 개씩 들어가는 등 수많은 기둥 나무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기둥 나무로 중심을 세우고 유연한 대나무인 상죽과 차죽으로 산의 외형을 만들었던 것 같다. 외형을 만든 다음에는 장인을 동원하여 기암괴석과 기화요초를 장식하였다. 이러한 대산대는 광화문 앞에 고정하여 가설하였다가 행사가 끝나면 해체하였다. 한번 세운 후 반복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인력과 물자가 소모되었다.61)산대의 규모와 공연 방식에 대해서는 사진실, 「산대의 변천과 무대 미학」, 앞의 책, 179∼20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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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도의 예산대
봉사도의 예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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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이 도성에 입성하거나 궁궐에 들어올 때도 산대나례를 거행하였다. 청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네 차례 다녀간 아극돈이 1725년(영조 1)에만든 화첩 봉사도 가운데 제7폭에 산대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림에 나타난 것은 대산대가 아닌 예산대(曳山臺), 곧 끌고 다니는 산대로 교방가요의 침향산과 유사하다. 예산대는 수레 위에 산대를 꾸며 거리를 행진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므로 임금이나 중국 사신의 행차를 전도하면서 화려한 장관 을 연출하였을 것이다.

예산대는 중국이나 일본의 연희 전통에서도 발견되는 산거(山車)와 같은 이동식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중세 연극사에 나타나는 수레 무대(pageant wagon)와도 상통하는 면모를 보인다. 궁궐이나 사찰, 교회가 위치한 도시의 중심부를 행진하면서 사회적인 지배 이념을 과시했던 행렬 의식은 중세 사회의 공통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신성한 산인 봉래산을 만들어 연행하는 전통은 동아시아의 중세적 보편성을 잘 보여 준다.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산대 문화에서는 봉래산(鰲山)과 곤륜산(崑崙山) 등 중국 고대 신화에 기반을 둔 ‘신성한 산’을 형상화하였다. 고대의 제왕들은 장생불사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신성한 산을 조성하여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면서 산대의 설행은 왕조의 영속성을 주지시키는 이념적 성격이 강화되었다.62)‘신성한 산’을 설행하는 동아시아 문화의 동질성과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사진실, 「동아시아의 산대 설행에 나타난 욕망과 이념」, 『공연 문화 연구』 12, 한국공연문화학회, 20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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