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4. 정재의 역사적 전개 양상
  • 조선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
  • 궁중 정재의 변형기
사진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정재와 관련된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전국 각 도의 크고 작은 고을마다 기생을 두어 음악을 배우게 하여 운평(運平) 300명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채홍준리(採紅駿吏)를 각 도에 두고 미녀와 양마(良馬)를 뽑아 올렸다. 1505년에는 장악원을 원각사로 옮기는 동시에 가흥청(假興淸) 200명, 운평 1,000명, 광희(廣熙) 1,000명을 두고 음률을 익히게 함으로써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 여악 기관의 구성과 활동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연산군 초기에는 혜민서와 상의원·내의원 등을 악무와 관련된 기관으로 정하고 본래의 직책 외에 여악과 정재에 동원하였다. 이에 의녀들의 수가 성종대에 비하여 52명이 증가하여 130명이 되었다.

또한 1501년(연산군 7) 8월에는 일본 사신 접견 때 보허자를 빠른 박으로 연주하게 하였고,109)『연산군일기』 권41, 연산군 7년 8월 28일(계유). 1502년 11월에는 무무(武舞)인 정대업에 창기를 썼다.110)『연산군일기』 권47, 연산군 8년 11월 16일(을유). 1504년(연산군 10) 12월에는 처용 가면을 여자 얼굴같이 고치자고 하였다. 1505년 3월과 4월에는 왕이 말 위에서 직접 처용무를 추며 노래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칼을 휘두르며 처용무를 추기도 하는 등 궁중 정재 형식 에 많은 변형을 가져왔다. 제례무보다는 연례무에서 더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향발 100쌍을 만들어 춤을 추게 하고,111)『연산군일기』 권60, 연산군 11년 12월 20일(경오). 열흘마다 풍두무(豐頭舞, 처용무를 개칭한 이름)를 잘 추는 사람을 다섯 명씩 간택하여 풍두무를 초요경무(楚腰輕舞)하듯, 즉 가느다란 허리의 미인이 가볍게 춤을 추듯 하게 하며,112)『연산군일기』 권61, 연산군 12년 1월 2일(임오). 흥청악 500명에게 학춤을 추게 하는113)『연산군일기』 권61, 연산군 12년 1월 4일(갑신). 등의 변화로 볼 때, 춤의 구성과 형태가 달라지고 규모 또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재의 의상이 화려해지고 금·은·옥·침향 등으로 치장했으며, 처용 가면을 여자같이 하고,114)『연산군일기』 권56, 연산군 10년 12월 21일(정축). 춤도 가느다란 허리의 미인이 가볍게 추듯 하게 한 것으로 보아 춤사위가 유연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궁중 정재는 연산군대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연산군이 재위하는 동안 정재는 조선 초 성리학에 입각한 예악 사상에는 위배되었으나, 새로운 여악 기관을 두고 여기들의 전문화를 추구하여115)『연산군일기』 권57, 연산군 11년 2월 13일(기사). “흥청·운평·광희악 중에서 각각 재기 있는 사람을 가려 장악원이 날마다 시재(試才)하되, 매양 한 달 안에 한 차례 불통한 자에게는 태 10, 여러 차례 불통한 자에게는 장수를 차차 더하여 최고 태 50에 이르러 그치며, 그 스승이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지 않거든 당직청에 잡아다가 곧 결죄하고, 그 부모는 그 사로 하여금 가벼이 논죄케 하라.” 운평·흥청·광희 등의 등급을 둠으로써 정재무의 기능성 향상과 예술성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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