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 4. 조선시대의 연희 담당층
  • 재승 계통의 연희자
박전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존재하던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였다. 1451년(문종 즉위년)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재승 계통 연희자들도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191)『문종실록』 권2, 문종 즉위년 6월 10일 임오. 이 기록에 따르면, 승광대는 수척과 함께 웃고 희학하는 연희 즉 우희를 담당했다. 서연호는 승광대를 고려시대 재인승(才人僧)의 후예로 보았다.192)서연호, 앞의 책, 124쪽. 승광대는 조선 초기에 사원 혁파로 인해 절에서 쫓겨난 재승 출신 또는 절에 소속되어 있던 연희자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재승들은 승적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재승들은 사원에서 쫓겨나 호적도 없고, 부역도 하지 않으며, 조세도 부담하지 않는 유랑 예인 신분으로 전락했다. 1406년(태종 6) 불교의 사사 혁파 정책(寺社革罷政策)으로 인하여 사원이 혁파되었을 뿐 아니라, 사전(寺田)이 삭감되었고, 승려의 환속이 있었으며, 사사 노비(寺社奴婢)가 관아의 노비로 넘어갔고, 도첩제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에 불교 사원 안에서 의식을 담당했던 하품 잡승(下品雜僧)들이 맨 먼저 사원에서 쫓겨나 사원 주변이나 시정 주변 그리고 민간 마을을 돌면서 걸식을 하며 살게 되었다.193)최정여, 「산대도감극 성립의 제 문제」, 『한국학논집』 1,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73, 14∼15쪽.

조선시대의 재승은 이미 신라의 원효로부터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도 전승되었던 무애희의 담당층이었다. 세종 때까지도 무애라는 도구를 가지고 연희하는 승려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무애희를 하는 승려란 바로 재승으로 볼 수 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재승 동윤(洞允)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재승들이 조선시대의 연희 담당층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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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풍속도의 수륙재
기산풍속도의 수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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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화에 등장하는 재승 동윤은 글에 능하고 배(俳)를 잘했다고 하는데, 배는 배희(俳戲)를 의미한다. 배희는 배우희(俳優戲), 즉 흔히 우희라고 부르는 골계희다. 그리고 동윤은 송아지나 닭의 소리를 흉내 냈는데, 뭇 소와 닭들이 따라 울게 할 정도로 절묘했다고 한다. 이러한 동물 소리 흉내 내기도 우희에 속한다.

앞에서 살펴본 『문종실록』의 기록 가운데 승광대가 수척과 함께 우희를 담당했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이 기록보다 약 100년 후인 16세기 중엽에 활약했던 재승 동윤의 경우를 통해서 실제로 승광대가 우희를 연행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 중 수미(守眉)가 전라도에 있으면서 봉서(奉書)하여 아뢰기를, “승인(僧人)의 사장(社長)들이 혹은 원각사(圓覺寺)의 불유(佛油)를 모연(募緣)한다 일컫고, 혹은 낙산사(洛山寺)를 짓는 화주승(化主僧)이라고 일컬으면서, 여러 고을의 민간에게 폐를 끼치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 하였다.194)『세조실록』 권46, 세조 14년 5월 4일 계해.

(나) 거사라는 남자들과 회사(回寺, 절을 찾아다니며 곁붙어 사는 여인을 의미하는 방언)라는 여인들은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며 횡행하여 풍속을 그르치니, 법으로 금해야 합니다.195)『중종실록』 권19, 중종 8년 10월 3일 정유.

이상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장·사당·거사에 관한 기록을 시대 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이 기록들을 통해서 사장으로부터 놀이패인 사당과 거사가 유래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가)는 ‘승인의 사장’이라는 말을 통해 사장이 절과 관련된 사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원각사의 불유를 모연한다고 일컫고 혹은 낙산사를 짓는 화주승이라고 일컬으며 돌아다녔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일정한 절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희를 공연하고 다닌 것과 일치한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재승들은 촌락과 시정을 다니면서 사원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돈을 거두며 북과 장구, 깃발을 갖추어 노래하고 악기를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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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사 감로탱의 사당패
경국사 감로탱의 사당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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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당을 ‘회사(回寺)’라고도 불렀음을 알려 준다. 이 기록 역시 남녀를 거사와 회사(사당)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이 무리들이 떠돌아다니며 음탕한 짓을 하고 풍속을 그르친다고 했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사당패들이 가무와 연희를 펼친 후 매음(賣淫)을 하며 떠돌아다녔던 사실을 지적한 듯하다. 또한 재승 계통 연희자뿐 아니라 향리, 군인, 공·사 노비(公·私奴婢)도 사장의 무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익(李瀷, 1579∼1624)의 『곽우록(藿憂錄)』에 따르면, 유민들이 국역을 피해 사원에 의탁해 살길을 도모했다고 하는데, 유민들이 사원에 들어갔다는 사실과 창우(倡優)가 성행했다는 사실은 실질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장·사당패·남사당패·걸립패 등 유랑 예인 집단이 사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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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한시 「관승희(觀僧戲)」에서는 조선 후기에 민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연행하던 재승 계통 연희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연희자들은 북과 징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종이꽃이 달린 굴갓을 썼으며, 각 가정의 뜰 안으로 들어가 깃발을 들고 염불하고 기도하면서 동도주(東道主, 단골 주인)의 복을 빌고 춤을 추며 점도 보아주면서 걸립을 하고 있다.

이 시의 앞부분에는 “중의 무리 십수 명이 깃발을 들고 북을 둥둥 울리며 때때로 마을 안으로 들어와 입으로 염불을 외고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면서 속인의 이목을 현혹시켜 미곡(米穀)을 요구하니 족히 한 번의 웃음거리가 된다. 시 한 수를 지었으니 대개 실상을 기록한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다.196)『국역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1권, 「영처시고(嬰處詩稿)」 1, 관승희, 민족문화추진회, 1983, 74쪽. 승려들이 직접 연희한 후 곡식을 요구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놀이패는 중매구 또는 굿중패로 보인다.

이상의 여러 기록들과 내용을 통해 볼 때 조선 전기의 사장은 고려시대 재승 계통 연희자의 후예로서 조선 후기의 사당, 거사, 남사당, 굿중패 등으로 계승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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