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5장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4. 조선시대의 인형극
  • 제의적 인형극의 다양한 양상
허용호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은 신격화된 인형을 모시고 섬기거나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놀리는 이전 시기의 전통을 이어받는 가운데, 이전 시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난다. 크게 다섯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양상은 다양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첫 번째 유형은 신격 또는 초자연적 존재로 의미화된 인형을 모시거나 섬기고 혹은 일정한 움직임을 부여하거나 놀리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제의적 인형극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비롯된 전통이다. 다음의 기록은 조선 성종 때 신격화된 인형을 섬기는 제의적 인형극이 존재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목멱산의 사우(祠宇)에 목우인(木偶人)을 만들어 신좌에 둔 것이 있다 하니, 내관(內官) 주서(注書)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과연 두 목우인이 있어, 하나는 장군의 형상이고 하나는 중의 형상이었는데, 의금부에 명하여 사우를 지키는 사람을 국문하여 아뢰게 하였다.252)『성종실록』 권165, 성종 15년 4월 16일 임신.

이렇게 단순히 모시고 섬기는 제의적 인형극은 상고시대에 비롯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오랜 전통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백월산 정난사 신당, 경상북도 안동시 수동 마을 국신당,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도둔리 각시당 등에서 신격화된 인형을 모시고 섬기는 제의가 여전히 벌어지 고 있다.

신격화된 인형을 단순히 모셔 놓고 섬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형이 직접 마을을 돌아보는 방식의 연행도 조선시대에 행해졌다.

그 지방(고성) 사람들은 해마다 5월 1일부터 5일까지 모두 모인다. 두 무리로 나뉘어 사당의 신상(神像)을 메고 푸른 깃발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술과 찬(饌)으로 신상에 제사 지내고, 연희자들(儺人)은 모두 모여 온갖 연희를 펼친다.253)『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고성현(固城縣), 사묘(祠廟) 성황사(城隍祠).

인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의적 인형극은 신격화된 인형이 직접 마을을 돌아보는 역동적인 연행 방식을 보여 준다. 신격화된 인형이 직접 마을을 돌아보는 연행 방식은 근래까지도 지속되어 왔다. 지금은 단절된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 내동 마을 당산제에서는 당산 할아버지 인형과 당산 할머니 인형이 소를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다녔다. 마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가 자신이 관장하는 마을을 직접 돌아보는 것이다. 현전하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 홍가 마을 장군제에서도 마을의 재앙을 몰아내는 장군 인형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닌다. 장군애비가 장군을 메고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군 인형을 대접하고 각 가정과 마을의 재앙을 몰아내는 연행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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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 마을 장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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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이 일정 지역을 돌아다니는 연행 방식은 입춘날 소 인형을 끌고 다니는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일찍이 김해부(金海府)의 입춘날을 보니 부사(府司)에서 목우(木牛)를 만들어 호장(戶長)이 공복(公服)을 입고서, 괭과리를 두드리고 날나리를 불며 앞에서 인도하는 악대를 따라 동쪽 성문 밖으로 나가 영춘장(迎春場) 안에서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치면 목우를 몰면서 땅을 가는 시늉을 했다.254)이학규,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 하, 동사일지(東事日知), 춘경제(春耕祭).

함경도 풍속에 입춘날 목우(木牛, 나무로 만든 소)를 관청에서 민가 마을까지 끌고 나와 돌아다닌다. 이는 흙으로 소를 만들어 순회하던 옛 제도를 모방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뜻을 지닌 행사이다.255)홍석모,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 입춘.

입춘 하루 전날 무격들을 주사(州司)에 모아서 목우를 만들고 용무늬를 그려 제사 지낸다. 진무(鎭撫) 두 사람이 들어와서 술잔을 올리는데, 우두머리 무격이 집사가 된다. 다음 날 아침 목우에 농기구를 갖춘다. 호장은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고, 몸에는 청사포를 입고, 인끈을 차고, 앞장서서 길을 인도한다. 여러 무당들은 무늬 있는 옷을 입고 호위한다. 한 사람은 목탁을 들었는데 채색 깃털로 장식했다. 한 사람은 가면을 썼는데, 오곡의 씨앗을 짊어지고 그 뒤를 따른다. 어린 기생 두 명은 붉은 옷에 깃털 삿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좌우에 있다. 이를 일러 소의 열기를 식히는 것(去牛熱)이라고 한다. 징과 북과 여러 악기들을 연주한다.256)이원조,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권3, 구례(舊例), 목우(木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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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풍년을 기원하면서 나무로 만든 소 인형을 끌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례가 김해·함경도·제주도 등지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전국적으로 유사한 제의적 인형극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다음과 같이 신격화된 인형을 직접 놀리는 연행도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왕봉에 오르는데 갑자기 안개와 구름이 자욱해지며 산과 하늘이 모두 캄캄해지고 봉우리 또한 보이지 않았다. 길을 안내하던 해공과 법종이라는 승려가 성모묘(聖母廟) 앞에서 작은 불상을 받들고 놀렸다. 내가 놀리는 까닭을 물으니, ‘세속에서 이와 같이 하면 하늘이 쾌청해진다고 하기 때문’이라 했다.257)김종직, 『점필재집(佔畢齋集)』 권1, 유두류록(游頭流錄).

김종직의 『점필재집』 「유두류록」에 의하면 성모묘에는 성모 석상이 있는데, “눈과 눈썹 그리고 머리털이 완연하며, 얼굴은 흰 분을 바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작은 불상은 성모묘 동편으로 돌담 안에 있었는데 국사(國師)라고 부르며, 속설에 국사가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한다.”고 했다. 따라서 인용한 대목에서 놀려진 신격들은 성모천왕과 국사신이다. 날이 좋아지기를 기원하며 지리산 산신 성모천왕 석상 앞에서 국사신을 의미하는 불상을 놀린 제의적 인형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팔관회에서 신숭겸 인형과 김락 인형을 놀렸던 제의적 인형극 전통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적인 제의적 인형극의 전통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티 마을 별신제의 몽달귀와 요사귀, 아산 우환굿의 이매망량과 독각이, 충청도 개비잡이의 남자 개비와 여자 개비, 충청도 미친굿의 인해 망자와 인해 망녀, 충청도 사혼제와 동해안 오귀굿 영혼 결혼식의 신랑과 신부 등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동적 인형의 예들이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두 번째 유형은 기우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기우제에서 용 인형을 연행하는 전통이 조선 시대에 좀 더 다양화되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흙으로 만든 용 인형을 연행한 사례만 나타나는 데 비해, 조선시대에는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을 흙은 물론이고 풀이나 짚으로도 만들어 일정한 연행을 행했음이 나타난다.

(가) 예조에서 가뭄을 근심하는데 필요한 사의(事宜)를 올리기를, “삼가 『문헌통고』와 전조의 『상정고금례』를 살펴보니 수와 당의 옛 제도를 본받았습니다. …… 가뭄이 심하면 우제(雩祭)를 지내는데, 처음에 빈 뒤 10일이 되어도 비가 안 오면, 시장을 옮기고, 도살을 금하며, 일산과 부채를 사용하지 않고 흙으로 용을 만든다(造土龍).’ 하였으며 …… 마땅히 고전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258)『태종실록』 권21, 태종 11년 5월 20일 경진.

(나) 흥천사 사리전에 기우를 하였는데, 풀로 한 몸에 머리가 아홉인 용을 만들고 불승 100명을 모아 기우정근(祈雨精勤)하게 하였다.259)『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6월 4일 갑자.

(다) 지금 수령들이 가뭄을 당하면 짚으로 용(芻龍)을 만들게 하고 붉은 흙을 칠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끌고 매질을 하여 욕을 보이게 하기도 한다.260)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권18,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

만들어지는 재료에 따라 용은 ‘초룡’, ‘토룡’, ‘추룡’ 등으로 일컬어진다. 이 용 인형은 기우제에서 비를 불러오는 초자연적 존재로 여겨지는데, 연행 방식은 (나)와 같이 모시고 섬기는 경건한 방식과 (다)와 같이 위협과 매질을 하며 욕보이는 무례한 방식으로 대별된다.

“풀로 한 몸에 머리가 아홉인 용을 만들고 불승 100명을 모아 기우정근” 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모시고 섬기는 방식은 분위기가 엄숙하고 경건하다. 이는 다음의 사례에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기우하는 예는 먼저 오부로 하여금 도랑을 치고 논둑을 다듬게 한 다음에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에 사대문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에 오 룡제를 지내는데, 동쪽에는 푸른 용, 남쪽에는 붉은 용, 서쪽은 흰 용, 북쪽은 검은 용, 가운데 종루가에는 누런 용을 만들어서(또는 그려서), 관원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여 사흘이 되어야 그치게 한다.261)성현, 『용재총화(慵齋叢話)』 권7 ; 『국역 대동야승(大東野乘)』 1, 민족문화추진회, 1985, 174∼175쪽.

이렇게 기우제 속에서 모시고 섬기는 용 인형은 비를 기원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불승(佛僧)이나 관원 같은 연행자들의 기원을 듣는 대상으로 인식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지만, 연행자들이 비를 기원하는 경건하고 엄숙한 움직임을 행하는 대상이 되고 있음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비를 불러올 수 있는 초월적 존재로 용 인형이 취급되어 연행자들의 기원을 담은 말과 움직임을 드러내 보이는 제의적 인형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위협과 매질을 하며 용을 욕보이는 연행 방식은 앞의 『목민심서』 기록 이외에 다음의 기록에서 역설적으로 파악된다.

하교하기를, “토룡제는 기우제 중에서도 가장 지극한 것인데, 용을 채찍질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제사의 뜻이 아니다. 그 오만불손함이 매우 심하니 이후로는 일체 제거하라.” 하였다.262)『영조실록』 권79, 영조 29년 5월 15일 경오.

흙으로 만든 용에 채찍을 가하며 기우하는 법은 없앤다.263)『대전통편(大典通編)』 권3, 예전(禮典), 제례(祭禮).

앞의 두 인용문은 용을 위협하고 직접 채찍을 가하며 자극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연행 방식을 취한 제의적 인형극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용에게 단지 기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하고 강권하는 말과 직접적 움직임을 보이는 연행이 존재했던 것이다.

인형에게 행하는 연행자들의 위협적 행동은 제웅치기에서 좀 더 강력해진다. 제웅치기에서는 위협의 수준을 넘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양상 까지 벌어진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세 번째 유형인 제웅치기는 『정조실록』,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서 ‘타체용(打體傭)’, ‘타초인(打草人)’, ‘처용희(處容戲)’, ‘타추희(打芻戲)’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웅치기에서 이용되는 인형은 『정조실록』에서는 ‘체용(體俑)’, ‘초인(草人)’, ’처용(處容)’ 등으로 나타나며, 『동국세시기』에서는 ‘추령(芻靈)’과 ‘처용(處容)’으로, 『경도잡지』에서는 ‘처용’으로 나타난다. 제웅치기의 인형 연행 방식은 다음 두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남녀의 나이가 나후직성(羅睺直星)에 들면 추령을 만든다. 이것을 사투리로 처용(處容)이라 한다. 짚으로 제웅을 만들고 머릿속에다 동전을 집어넣어 보름날 전날 곧 14일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을 막는다. 그러므로 이때가 되면 여러 아이들이 문밖으로 몰려와서 제웅을 내어 달라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내주면 다투어 머리 부분을 파헤쳐 돈만 꺼내고 나머지는 길에다 내동댕이친다. 이것을 타추희(打芻戲)라고 한다.264)홍석모, 『동국세시기』, 정월, 상원(上元).

14일 밤에 짚으로 인형을 만드는데, 이를 처용이라고 한다. 그 머릿속에는 동전을 감춘다. 그러면 아이들이 밤새워 문을 두드리며 처용을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처용 주인이 문을 열고 던지면 여러 아이들은 서로 잡아당기며 머리 부분을 파헤쳐 다투어 돈을 꺼낸다. …… 가장 꺼리는 것은 처용직성(處容直星)으로 이에 해당하는 자는 제웅을 만들어 길에 버림으로써 재액을 면한다.265)유득공, 『경도잡지』 권2, 세시(歲時), 상원(上元).

인용한 두 기록을 보면, 정월 14일 제웅을 만들어 버리는 이유와 아이들이 그 제웅의 돈을 꺼내고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제웅치기 의례의 전 과정이 파악된다. 정월 14일에 인형을 만들어 버리는 이유는 ‘나후직성’ 또는 ‘처용직성’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후직성 또는 처용직성에 해당되는 사람은 액운이 있어 만사가 여의치 않고, 병이 들거나 큰 화를 입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정월 14일 저녁에 제웅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정월 14일에 만들어 버리는 제웅은 액년에 해당되는 사람의 액운을 품은 대속물(代贖物)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액운에 해당되는 사람의 대수대명(代數代命) 혹은 대신대명(代身代命)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버려진 제웅의 머리를 갈라 헤쳐 놓고 돈을 꺼낸 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아이들의 행위는 액년에 해당되는 사람의 액운을 의미하게 되는 제웅을 절개하고 공격하여 쫓아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액운을 품은 대속물로서의 제웅이 길거리에 버려지고 몸이 파헤쳐지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등의 수모를 당하는 것이다. 기우제에서의 용 인형보다 제웅치기에서의 인형이 좀 더 직접적으로 모욕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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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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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웅치기에서 등장하는 인형은 대속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나례에 등장하던 황소 인형(黃土牛)과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악귀 구축이라는 나례 참여자의 기원을 한 몸에 받고 희생물로 사용된 황소 인형과 같이 제웅치기의 제웅은 인간을 대신하여 액운을 품은 희생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제웅의 경우 직접적인 위협과 폭력이 가해진다는 점에서 황소 인형과는 다르다.

인형이 희생양 혹은 재앙 그 자체로 인식되어 위협과 폭행을 당하는 제의적 인형극의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제주도 칠성새남굿, 제주도 불찍굿, 오티 마을 별신제, 아산 우환굿, 충청도 미친굿, 충청도 개비잡이, 경기도 도당굿 등이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형들은 하나같이 재앙의 원흉 그 자체 혹은 대수대명으로 인식되어 극 속에서 위협과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인형에게 가해지는 연행자들의 위협은 염매(魘魅·厭魅)라 불리는 주술적 제의 인형극에서 훨씬 강력하고 은밀하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네 번째 유형인 염매는 타인에게 상해를 입혀 병이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속적 저주술의 하나로, ‘염승(厭勝)’이라고도 하며, 무속적 저주술의 총칭인 ‘무고(巫蠱)’라고도 한다. 염매는 보통 나무나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공격함으로써 타인에게 병이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 의례는 사람 형상으로 만든 인형에다가 화살 쏘기, 칼을 꽂아 두거나 찌르기, 일정한 장소에 매달아 놓기, 일정한 장소에 매장하기 등 다양한 방법이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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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려지는 몽달귀 인형과 요사귀 인형
놀려지는 몽달귀 인형과 요사귀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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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핀 고려 고종 때의 염매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문헌 자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민간과 궁중을 막론하고 염매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염매의 양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에 사는 전 사정(前司正) 고순의의 처 장이가 숙부 김언의 전처 자식 김진의와 간통하여 …… 고순의의 모발 한 웅큼을 잘라서 풀로 고순의의 몸 형상 둘을 만들어 각기 사지를 갖추게 하고 유자 가시를 가득히 꽂아서 신당 두 곳에 갖다 놓고 …… 종이 10장에 고순의는 3일 내에 급사하라고 써서 …… 고순의가 과연 며칠 되지 않아 병이 나서 죽었다.266)『세종실록』 권25, 세종 6년 9월 21일 계사.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안팽명(安彭命)이 졸(卒)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안팽명은 강직하고 청렴하여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여겼고, 강개(慷慨)한 성격으로 과감하게 말하여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다. 금년 정월(正月) 초하루에 원수진 집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길에 버렸는데, 몸체와 머리를 따로 버리게 하고 그 배에다 ‘안팽명의 시신이다.’라고 썼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하였다.267)『성종실록』 권268, 성종 23년 8월 20일 무오.

이달 초하루에 대비전께서 추문(推問)하셨는데 그 추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모이강)가 지난 3월 28일 송백당(松栢堂) 동쪽 뜰에서 비자(婢子) 금이·은향·자귀·정이·귀인 등과 동모(同謀)해서 빗자루와 긴 참나무로 인형(人形)을 만들고 감다(甘茶)로 저고리(赤古里)를 베어 인형에게 입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레를 가지고 오라.’ 하여 그 인형을 죄인처럼 여겨 싣고 가서 형을 집행했고, 그리고 나서 불에 태울 때는 두루 끌고 다니면서 경계하기를 ‘너희들 가운데 이 인형과 같이 될 사람이 누구냐?’ 하고 칼로 참형(斬刑)을 가하면서 ‘그의 자식과 족속들도 모두 이렇게 만들겠다.’ 했으며, 이어 온갖 말로 질책했다는 것이었습니다.268)『중종실록』 권58, 중종 22년 4월 18일 갑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벌어졌던 염매는 타인에 대한 저주라는 속성 탓에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인용한 대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형이 많이 이용되었다. ‘신상(身象)’, ‘목우(木偶)’, ‘목우인(木偶人)’, ‘가상(假象)’, ‘흉물(凶物)’, ‘목인(木人)’, ‘목동자(木童子)’ 등으로 기록된 인형들은 인간의 모발,269)『세종실록』 권25, 세종 6년 9월 21일 계사. 참나무와 여우 뼈270)『광해군일기』 권121, 광해군 9년 11월 25일(병술).와 같이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풀, 볏짚, 빗자루, 나무, 종이 등이 많이 이용되었다.

염매라는 제의적 인형극에서 인형들의 연행 방식은 인형에 대한 일방적인 저주와 폭력이었다. 염매의 연행자들은 인형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저주의 말과 움직임을 취한다. 해를 입거나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저주의 대상으로 의미화된 인형들은 연행자들에게 위협과 저주를 당하며 묻히거나 매달리고, 심지어 사지가 절단되어 형체가 훼손되거나 파손되기까지 한다. 염매라는 제의적 인형극 속에서 인형들은 일방적으로 위협당하고 심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연행자들의 일방적인 저주와 폭력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다섯 번째 유형으로 궁중 내농작(內農作)이 있다. 등장하는 인형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이나 말이 없는 것은 기우제, 제웅치기, 염매의 경우와 유사하지만 진열이라는 연행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동국세시기』에는 “조선시대 옛 행사에 정월 보름날 대궐 안에서 빈풍(豳風) 칠월편에 경작(耕作)하고 수확하는 형상을 본떠 좌우로 나누어 승부를 겨루었다. 이는 풍년을 비는 뜻”이라고 내농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궁중 내농작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1463년(세조 9)에 처음 기록이 나타난 이후로, 풍년을 기원하는 ‘기년 행사(祈年行事)’인가 아니면 단순한 놀이인 ‘희완지사(戲玩之事)’인가 하는 논쟁이 지속되다가 중종 때를 고비로 하여 명맥이 끊긴다. 내농작에 관한 기록은 1562년(명종 17) 이후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취를 감추는데, “19년 동안 오래 폐해 온 일”271)『명종실록』 권28, 명종 17년 12월 7일 정사.이라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중종 말년부터 궁중에서 중지되었던 것 같다.272)김택규, 『한국 농경 세시의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5, 121쪽.

1463년에 처음 나타나는 기록을 보면 궁중 내농작의 전반적인 양상에 대해 파악이 가능하다.

충순당에 나아가 예문 문신 및 성균관 유생들의 강경(講經)을 듣다가 후원(後苑) 농잠지상(農蠶之狀)을 보시고는 승지 등에게 의롱(衣籠) 한 가지씩을 주었다. 세속에서는 매년 상원일(上元日)에 전가(田家) 농잠(農蠶)하는 모 습을 차리고는 1년 풍년 드는 징조로 여겼다. 신사년부터 임금이 승정원에 명령하여 좌우로 나누어 후원에 장소를 마련케 하고 관람했다. 농기구 손질 및 밭갈이하는 모습, 누에 먹이는 모습, 노인이 취하고 어린아이가 배부른 모습으로부터 금수초목(禽獸草木)의 모양까지 모두 대나무 줄기를 만들고 풀을 묶어 형상을 만들었는데 없는 모양이 없을 정도였다.273)『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 정월 15일 을사.

인용한 기록에 의하면 내농작은 민간에서 전승되어 오던 풍속이 궁중에까지 전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잠하는 모습을 차리고는 1년 풍년 드는 징조로 여겼다.”는 언급으로 보아 풍년을 기원하는 ‘모방 주술적 농경 의례’274)김택규, 앞의 책, 114쪽.의 하나로 행해진 것이 내농작이다. 그런데 내농작에서 인형을 만들어 진열하고 있다. ‘대나무 줄기와 풀’을 재료로 하여 ‘농기구 손질 및 밭을 가는 모습’, ‘누에 먹이는 모습’, ‘노인이 취하고 어린아이가 배부른 모습’, ‘들짐승과 날짐승의 모습’ 등을 만들어 진열하고 있는 것이다. 『성종실록』에는 진열된 인형의 모습이 “날짐승과 밭갈이하는 지아비, 들밥을 나르는 지어미, 누에치는 여자, 베 짜는 할멈의 모양” 등으로 나열되어 있다.275)『성종실록』 권236, 성종 21년 정월 6일 기미.

궁중 내농작에서 인형의 진열이라는 방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시경(詩經)』의 빈풍 칠월편으로 보인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시경』 칠월장에 실려 있는 인물의 형상을 모방하여 밭 갈고 씨 뿌리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고276)이긍익,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2, 정교전고, 속절잡희(俗節雜戲). 되어 있으며, 1514년(중종 9)의 다음 기록에서도 인형 진열을 통해 빈풍 칠월편을 재현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내농작의 모든 기구를 후원에 배설하였는데 왼편은 경회지 북쪽 첫 섬돌로부터 북쪽 담장 소문 안에 이어졌고 오른편은 충순당 앞 섬돌로부터 취로당 앞까지 이어졌다. 모두 빈풍 칠월편을 모방한 것으로 오른편에는 주공(周公)이 무일편을 드리는 형상을 만들었으며, 왼편에는 주공이 칠월편 을 드리는 형상을 만들었다. 또한 그 글씨를 써서 건 족자는 해태로 종이로 만들고 벚나무 껍질로 조작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기산 사시(岐山四時)의 경치를 만들었는데 모두 기화, 이초, 충어, 금수, 인물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277)『중종실록』 권19, 중종 9년 1월 14일 무인.

인용한 기록을 보면, 주공이 무일편을 드리거나 칠월편을 드리는 부분은 인형으로 연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분히 연극적인 장면을 첨가시킴으로써 전체적인 분위기에 좀 더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278)홍미라, 『산대 건설의 의미와 구조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185쪽. 그리고 기산 사시의 경치는 빈풍 칠월편의 구체적인 내용을 입체적인 조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시로 되어 있는 빈풍 칠월편을 입체적인 조형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제작하여 병풍으로 만들거나 벽에 붙이기도 했던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라는 그림의 존재나, 다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에 장식된 『시경』 빈풍 대목의 입체 조형 등이 바탕이 되어 표현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산 동쪽에는 봄 3개월의 경치를 만들었고, 남쪽에는 여름 경치를 꾸몄으며, 가을과 겨울 경치도 또한 만들어져 있다. 『시경』 빈풍도(豳風圖)에 의하여 인물, 조수, 초목 등의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려 놓았는데, 칠월 한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279)『세종실록』 권80, 세종 20년 정월 7일 임진.

궁중 내농작이라는 제의적 인형극에서 인형들은 움직임이나 말이 없다. 연행자들이 인형들에게 하는 말이나 움직임 역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중 내농작 속의 인형들은 단순히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진열된 인형들은 일정한 움직임을 표현한 정지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일 년 농사를 미리 예견하고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인형을 통해서 표현한 것이다. 표현된 인형들은 ‘농기구 손질 및 밭 가는 모습’, ‘누에 먹이는 모습’, ‘노인이 취하고 아이가 배부른 모습’ 등을 하고 있으며, 주공이 무일편을 드리는 모습과 칠월편을 드리는 모습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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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풍칠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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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형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세간에 잘 알려지거나 혹은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전후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시경』이라는 문자 텍스트를 통하여, 그리고 빈풍칠월도라는 회화 텍스트를 통하여 이미 세간에 널리 공유가 된 장면인 것이다. 그래서 정지된 상황 연출만으로도 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인형이 움직이고 인형이 드러내는 인물 간의 갈등 양상이 역동적으로 펼쳐진 것은 분명 아니지만, 전형적인 상황 연출을 했다는 것은 궁중 내농작 속의 인형이 단순한 장식용 소도구가 아니라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연행 인형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익히 알려진 전형적 모습을 한 채 정지된 인형이 연출한 일종의 전시 연행 혹은 진열 연행이 궁중 내농작의 연행 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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