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5장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5. 인형극의 시대별 특징과 역사적 전개 과정
  • 인형극의 시대별 특징
허용호

우리나라의 인형극은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기반이 마련되었고 제의적 인형극과 오락적 인형극도 존재했었다. 상고대에서 삼국시대 그리고 남북국시대로 이어지는 동안 인형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인형이 신격화되어 사당에 모셔졌는가 하면, 상·장례에서 망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 망자가 저승에서 영화와 행복을 누리도록 망자의 봉사자, 지킴이 등의 의미를 가지고 함께 묻히기도 했다. 때로는 전쟁에서 적군을 속이기 위한 위장용 병사나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술책의 하나로 인형이 이용되기도 했다. 인형을 이용하는 상황은 제의적 성격과 전쟁의 성격이 복합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인형 이용의 양상은, 인형극을 위한 기반이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고 인형극 역시 연행되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고려시대 이전에 인형극이 연행되었음을 추론하게 하는 사례들은 많다. 신라에서는 탈해왕의 뼈로 만든 인형을 동악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냈고, 고구려에서는 나무로 인형을 만들어 부여신과 고등신이라 일컬으며 국 중 대회나 제천 의식 때 제사를 지낸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신격화된 인형을 대상으로 제사를 올린 사람들은 비록 인형들이 움직임이 없고 말도 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기원이나 움직임에 반응하여 초월적 역량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그 움직임이 눈으로 보이지 않고 말이 귀로 들리지 않지만, 제의라는 문맥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초월적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신격화된 인형을 대상으로 행하는 제의적 인형극뿐만 아니라 오락적 인형극 역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여러 문헌에서 즐거운 잔치 때 행해지는 고구려 인형극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점과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진상품 중의 하나로 바쳤다는 점은 고구려 인형극의 독특함이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름의 독특함과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다는 것은, 곧 인형극이 성행했음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인형극은 이전 시기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제의적 인형극에서 나쁜 기운을 한몸에 품은 희생물의 의미를 가진 인형이 등장한다. 궁중 나례에서의 황소 인형이 이에 해당한다. 황소 인형은 나례에서 말을 하거나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지만, 악귀 구축이라는 나례 참여자들의 기원과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받고 쫓기어 가는 대상물로 등장한다. 나쁜 기운을 온몸에 품는 것은 염매에 쓰인 인형 역시 마찬가지다. 고려 고종 때 나타난 염매라는 제의적 인형극에서 인형은 손이 묶이고 이마에 못이 박힌 채로 땅에 묻히거나 우물에 넣어진다. 여기서의 인형은 해를 입기를 바라는 저주의 대상이다. 고려시대에 주목되는 제의적 인형극의 새로운 면모는 동적 인형의 등장이다. 팔관회에서 행해진 신숭겸과 김락의 추모 행사에서 두 공신의 우상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말을 타고 뜰을 돌아다닌다. 이는 이전 시기 자료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동적 인형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고려시대의 오락적 인형극 역시 이전 시기에 나타나지 않았던 면모들이 나타난다. 혜민국 남쪽 거리에서 벌어진 인형극 사례는 민간까지 확장되어 넓혀진 인형극 향유층의 존재를 말해 준다. 인형극을 대상으로 한 이규보의 한시 「부답병서」와 「관롱환유작」에서 보이는 작자의 태도 역시 고려시대 인형극이 활성화되었다는 추론의 근거가 된다. 작자는 인형극에 대한 낯설음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만큼 인형극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규보의 두 시에서는 인형 조종사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형 조종술의 뛰어남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의 존재 그리고 단청을 만들었다가 순식간에 거두어 버리는 내용 역시 고려시대 오락적 인형극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움이다.

조선시대의 인형극은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지고 발전된 면모를 보인다. 이전 시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양상의 인형극 유형이 포착됨과 동시에 이전 시기에 비해 한층 발전된 면모들이 인형극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제의적 인형극은 대략 다섯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유형은 이전 시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신격화된 인형에게 어떤 기원과 일정한 행동을 하고 나아가 인형을 놀리기도 하는 것이다. 목멱산 사우에 모셔져 섬겨지는 목우인의 존재는 적어도 고구려 때부터 비롯된 제의적 인형극의 역사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신상을 메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고성 지방의 성황사 관련 기록이나, 입춘날 목우에게 제사를 지낸 후 끌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김해·함경도·제주도의 사례들은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특징을 보여 준다. 천왕봉에서 김종직이 경험한 지리산 산신 성모천왕 앞에서 국사신을 놀리는 내용의 인형극은 고려시대 팔관회에서 신숭겸 우상과 김락 우상을 놀렸던 제의적 인형극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두 번째 유형은 기우제라는 문맥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비를 불러오는 존재로 인식된 용 인형을 만들어 경건하게 기원을 하거나 아니면 위협과 매질을 가하는 것이다. 비를 불러오는 초자연적 존재인 용에게 경건한 기원을 하는 것은 이전 시기 신격화된 인형을 모셔 놓고 제사를 드리는 양상과 큰 차이가 없다. 고려시대에는 기우제 때 흙으로 용을 만들어 기원을 했다. 하지만 초자연적 존재인 용에게 위협적인 언사와 직접적인 매질을 가하며 무례하게 욕보이는 양상은 이전 시기에는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의적 인형극 연행 방식의 다양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형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는 제의적 연행 방식은 세 번째 유형인 제웅치기에서 좀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 제웅치기에서 연행자는 위협의 수준을 훨씬 넘어 제웅의 몸을 파헤치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기까지 한다. 제웅은 고려시대 나례에서 등장했던 황토우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악귀 구축이라는 나례 참여자의 기원을 한몸에 받고 희생양으로 사용된 황토우와 같이, 제웅치기의 제웅은 인간의 액운을 대신하여 품은 희생양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제웅에 대한 연행자들의 인식은 황토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황토우는 그야말로 희생양이어서 약간의 연민의 감정이 남아 있는 반면, 제웅은 인간의 액운을 한몸에 품은 없어져야 할 존재로 인식될 뿐이다.

인형에게 위협적 언사와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연행 방식은 네 번째 유형인 염매에서도 나타난다. 인형에게 가하는 연행자들의 위협과 폭력은 제웅치기에서보다 훨씬 강력해지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염매의 사례들을 보면, 해를 입거나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저주의 대상으로 의미화된 인형들이 저주의 말과 함께 땅에 묻히거나 공중에 목이 매달리고 있다. 심지어 사지가 절단되어 형체가 훼손되거나 파손되기까지 한다. 제의적 인형극의 부정적 면모와 더불어 연행자들의 일방적인 저주와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인형의 존재가 염매 사례들을 통해 확인된다.

다섯 번째 유형은 궁중 내농작이다. 인형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이나 말이 없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기우제, 제웅치기, 염매와 유사하다. 하지만 진열이라는 연행 방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인형의 진열이라는 방식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시경』의 빈풍 칠월편 내용이다. 일 년 농사를 미리 예견하고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인형의 진열을 통해 표현한다. 문자 텍스트인 『시경』과 회화 텍스트인 빈풍칠월도를 통하여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이기에, 진열이라는 정지된 상황 연출만으로도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궁중 내농작의 연행 방식은 인형의 조종이나 목소리 연기를 통한 인형극 연행과는 또 다른 연행 방식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의 오락적 인형극도 다양함을 드러낸다. 한발 더 나아가 그 다양함이 인형극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궁중과 민간을 막론한 인형극의 확산과 성행, 개성적 외양을 한 다양한 모습의 인형 등장, 다양한 인형 형태의 존재와 연행술의 발전, 말하는 인형의 본격적인 등장과 극적 구조를 갖춘 인형극의 등장, 산대잡상놀이의 성행 등이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을 특징짓는다.

성현과 박승임의 한시는 조선 전기에 궁중과 민간을 막론하고 인형극이 확산되고 성행했음을 추론케 하는 자료들이다. 성현의 「관나」와 「관괴뢰잡희」를 통해 포장 무대로 나타나는 궁중 오락적 인형극의 무대, 줄을 통한 인형 조종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박승임의 「괴뢰붕」은 인형 조종사의 뛰어난 조종술과 말을 하는 인형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말하는 인형의 존재는 인형 연행자의 목소리 연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적어도 조선 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이 인형의 신기한 묘기 놀음 중심에서 일정한 스토리를 전달하는 극 중심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조선 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다양하고도 발전된 모습은 나식의 「괴 뢰부」에서 절정을 이룬다. 개성적인 외양의 인형들과 세상살이의 여러 문제를 두루 다루는 연행 내용, 말하는 인형에 의한 연행 전개 등이 「괴뢰부」에 나타나 있다. 막대 인형적 조종 방식, 손 인형적 조종 방식, 주선 인형적 조종 방식, 줄 인형적 조종 방식이 두루 이용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다채로운 연행 내용과 다양한 연행 방식은 인형극 수준을 한층 발전시켰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오고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확산과 성행 그리고 발전이 여기서도 포착된다.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흥성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 영조 때 김기석의 상소나 박제가의 한시 「성시전도응령」 등을 통해 민간 오락적 인형극이 성행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강이천의 「남성관희자」는 조선 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흥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다채로운 모습의 인형들, 다양한 연행 내용, 진전된 연행 방식 등은 조선 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 못지않다. 등장 인형들의 개성있는 모습과 전개되는 연행 내용은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인형 연행자들의 다양한 연행 방식은 현전하는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과 유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 목 베기와 신체 찢어발기기 같은 독특한 장면이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양상은 산대잡상놀이의 성행이다. 인형 연행자의 인형 조종과 목소리 연기가 중심이 되는 인형극과는 다른 차원의 인형극이 산대잡상놀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이 이미 널리 공유된 전형적 상황을 정지된 모습으로 표현하는 볼거리 중심의 연행이다. 산대잡상놀이는 세밀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의 진열을 통해 전형적 장면을 표현한다. 연산군 때 궁중에서의 산대잡상놀이, 봉사도에 나타난 산대잡상놀이, 『기완별록』의 금강산놀이, 팔선녀놀이, 신선놀이, 상산사호놀이 등이 확인된 산대잡상놀이들이다. 산대잡상놀이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부분적 움직임을 반복하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대체로 움직임이 없는 정적 인형이며, 말이 없는 인형이다. 인형극에 있어 이른바 정적 인형에서 동적 인형으로의 발전, 그리고 말이 없는 인형에서 말하는 인형으로의 발전이라는 도식이 산대잡상놀이에 이르면 무의미해진다. 산대잡상놀이는 동적 인형의 시대에서 다시 정적 인형으로 회귀한다. 또 말하는 인형의 시대에서 말이 없는 인형으로 회귀한다. 산대잡상놀이는 제한적으로 인형을 움직이는 연행 방식을 드러내기도 하고, 산대라는 무대 자체를 이동시키는 전혀 새로운 연행 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무대 자체의 이동은 일정한 공간에 고착된 관중이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관중을 설정하는 연행 방식이다. 산대잡상놀이라는 독특한 인형극의 존재는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의 풍성함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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