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6장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3.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과 조선 후기의 유흥 문화
  • 본산대놀이와 조선 후기 서울의 유흥 문화
전경욱

조선 전기에 국가적 행사인 나례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연희자인 경중 우인(京中優人)과 전국의 외방 재인(外方才人)이 모두 동원되었다. 경중 우인들은 평상시에 의금부(義禁府)의 관리를 받으며 왕실 내부의 오락 유흥에 복무하였다. 이들은 종친이나 사대부의 사노(私奴)로서 배우로 양성된 경우와 외방 재인 가운데서 발탁되는 경우가 있었다. 외방 재인 출신의 경중 우인들은 의금부 등의 관노로 예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금부는 보통때 경중 우인을 관리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인 산대나례를 벌일 때는 좌변나례도감의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외방 재인 가운데 무재(武才)를 떨쳐 서울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주로 임금의 친위 부대인 금군(禁軍)에 속하여 시위(侍衛)의 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경중 우인의 일을 겸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적어도 재인 집단과 친연 관계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균관의 노비인 반인들도 경중 우인으로 활동하면서 가면극(본산대놀이)을 공연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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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쾌도(大快圖)
대쾌도(大快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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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포도청·용호영 등과 친연 관계를 유지했던 경중 우인들은 원만한 생업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왈짜 집단은 중간 계층으로 서울 유흥 문화의 주역이었는데, 의금부·포도청·용호영 등의 하급 무관도 그 일원이었다. 왈짜에 포함될 수 있는 부류는 북경 역관(譯官) 같은 기술직 중인(中人)의 일부, 각사 서리(書吏)와 각집 겸종(傔從) 같은 경아전층(京衙前層), 대전별감(大殿別監)과 무예별감(武藝別監)과 같은 액례(掖隷), 군영(軍營) 장교와 포교(捕校) 같은 군교(軍校), 승정원 사령(使令)이나 나장(羅將, 특히 의금부 나장) 같은 관서(官署) 하례(下隷), 시전 상인 등이다.

강이천의 「남성관희자」에 액정서 하례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들리는 소리 남문 밖에 / 聞說南城外

무대를 가설하고 한판 논다는구나 / 設棚爲戲具

노인 부축하고 어린애 끌고들 / 扶老更携幼

구경꾼 구름처럼 몰리는데 / 觀者如雲霧

홍의 입고 뽐내는 건 액정서 하례요 / 紅衣掖庭隷

백발로 앉았으니 떡 파는 할미라네 / 白髮賣餠嫗

이 시에 따르면, 인형극과 가면극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액정서 하례가 이 공연에 참석하고 있다. 이 내용만으로는 그가 이 공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액정서 하례인 액례들도 조선 후기 서울 유흥 문화의 주역이었던 왈짜 집단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액례가 이 공연을 주선했거나 관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왈짜들은 서울 시정의 풍류객이면서 놀이패의 흥행 활동을 장악한 자기들의 기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러한 볼거리를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서울 시정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 정도의 행사였다면, 서울의 순라(巡邏)와 포도(捕盜)를 담당했던 의금부나 포도청의 허가나 협조가 필요했을 것인데, 액례들은 이러한 허가나 협조를 구하기 쉬웠을 것이다.

한편 『게우사(무숙이 타령)』에 “산두(山臺)노름 하는 때는 총융청 공인 등대하고”라는 내용이 있는 점으로 보아, 산대놀음의 악사로 총융청의 공인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산대놀음은 가면을 준비했던 점으로 보아 가면극인 본산대놀이를 가리킨다. 총융청에는 취고수 26명과 세악수 13명 등 전문 음악 연주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산대놀음의 악사로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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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융청(摠戎廳) 전경
총융청(摠戎廳)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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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이 지은 『유우춘전(柳愚春傳)』의 주인공 유우춘은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해금의 명인으로, 용호영에 소속된 세악수였다. 그는 종친이나 대신들에게 불려 가거나, 선비들의 모임에 참가하거나, 시종별감과 오입쟁이 한량들의 놀이판에 초대되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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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풍속화첩의 무동
단원풍속화첩의 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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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장악원이나 오군영(五軍營)의 군악대 같은 국가 소속의 음악 기관이 상업화되었다. 장악원의 음악은 원래 종묘 제례, 임금의 행차, 왕실의 진연(進宴), 고급 관료들의 연회 등 국가와 왕실의 음악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민간의 수요에도 응했다. 구체적 사례로 『이춘풍전』의 ‘장악원 풍류하기’와 『게우사』의 ‘장악원 풍류’를 들 수 있다. 좀 더 시정적 감각을 띤 것은 오군영의 악대였다. 한문 단편 『개수(丐帥)』에서 용호영 군악대의 우두머리인 이패두는 용호영의 악공들과 서울 장안의 기생들을 데리고 각종 연회에 초청되고 있다. “당시 주금(酒禁)이 엄하여 상하의 연회에 술은 못 쓰고 기악을 숭상했으니, 특히 용호영의 풍악을 불러오는 것으로 자랑을 삼았으며, 불러오지 못하면 한 수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내용은 이패두가 연회에 불려 다니느라 피곤해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기록으로 보아 오군영에는 전문 연희자인 재인 출신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원종은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첩의 자식, 재인, 백정으로 무재(武才)가 있는 자는 모두 겸사복(兼司僕)에 입속시켰습니다. 선왕조(先王朝)에서부터 수렵하는 일이 번잡했기 때문에 무재가 있는 자는 모두 겸사복에 입속시켰습니다. 이제 우림위(羽林衛)가 따로 설치되었으니, 첩의 자식은 겸사복에 입속시키지 마소서. 귀화인(歸化人) 같은 것은 그 수효를 줄이는 것이 불가합니다. 조종조로부터 귀화인은 극히 후대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341)『중종실록』 권4, 중종 2년 10월 29일 기해.

이 기록에 따르면, 첩의 자식, 재인, 백정 등 신분이 낮은 부류들을 우림위에 입속시켰음을 알 수 있다. 겸사복, 우림위는 내금위와 더불어 금군이라 불리는 왕의 친위 부대로서, 1755년 용호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다음 기록도 전문 연희자들이 말단 군병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전해 준다.

문졸(門卒)은 일수(日守), 혹은 사령(使令), 혹은 나장(羅將)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본래 모두 근본이 없는 떠돌이들인데, 혹은 창우(倡優)로서 투입했고, 혹은 굴뢰(窟儡)로서 변신한 것으로 가장 천하고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이다.342)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권4, 이전육조(吏典六條), 어중(馭衆).

나장은 의금부의 핵심 병력을 이루었다. 의금부의 나장이 재인으로 충원되었다면 포도청의 군졸도 재인으로 충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금부는 군사적인 성격을 띠는 순작(巡綽)·포도(捕盜)·금란(禁亂), 사법 기관으로서 왕권에 도전하거나 질서를 유린하는 범인의 체포·구금·심문·판결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병조에 속한 포도청이 설치되어 포도를 전담하게 되었다. 본래 의금부의 기능 가운데는 여러 행사를 거행할 때 좌변나례도감이 되어 광화문 밖에 설치하는 좌산대(左山臺)와 잡상(雜像)을 제작하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산대와 잡상을 제작하는 장인들과 산대 앞에서 각종 연희를 공연하는 재인들도 의금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의금부의 기능 가운데 서울의 순라와 포도를 이어받은 포도청은 서울 지역의 공연 문화에도 관여했고, 특히 의금부처럼 서울에 거주하는 연희자들을 관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전회통(大典會通)』의 “화랑(花郞)·유녀(遊女)나 무녀(巫女)가 성중(城中)에 머물러 있으면 벌을 받는다.”는343)『대전회통(大典會通)』 권5, 형전(刑典), 금제(禁制).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의 성문 안에는 화랑·유녀·무녀가 거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을 색출, 검거하는 일을 맡은 것이 바로 포도청이었다. 따라서 경중 우인은 단지 연희만 전업으로 하지 않고 다른 일도 병행했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 후기 포도청과 서울 지역 공연 문화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조선 후기에 색주가의 포주는 대개 왈패로서 포도청 포교들의 끄나풀이었으며, 그들은 수입의 일부를 포교에게 상납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례(嘉禮)·진연(進宴)·진찬(進饌) 때 여령(女伶)을 동원할 경우에는 좌·우포도청에서 서울 시내의 주상(酒商)과 유녀를 거느리고 대령했다고 한다.

송석하는 서울 본산대놀이의 연희자를 서울에 거주하면서 포도청에 예속되어 있던 편놈이라고 밝혔는데, 이두현은 이 편놈을 반례(泮隷), 즉 반인과 동일한 사람들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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