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1장 전쟁의 기원과 의식
  • 5. 전쟁과 의식의 상호 작용-‘왕’의 탄생
박대재

전통적인 패러다임에서 전쟁은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이나 발전 과정과 관련된 문명의 산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래서 국가 이전의 원시 사회 전쟁은 단지 유희적이고 의식적 성격이 강한 소박한 분쟁에 불과했으며, 본격적인 전쟁은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의 출현과 함께 발생했다고 보았던 것이다.68)K. F. Otterbein, 앞의 책, 796쪽.

그러나 최근 세계 각지의 민족학적 연구에서 전쟁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만의 것이 아니라, 국가 이전의 원시 사회에서도 본격적인 전쟁이 존재했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인 연구에서 전쟁은 독점적 중앙 집권을 전제로 하며, 독점적 권력은 전쟁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근래의 비판적 연구에 따르면, 전쟁은 독점적 권력 이외의 연합 관계를 기반으로 한 지도력에 의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전쟁에서 독점적 권력만을 강조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연합의 측면까지 새롭게 주목하는 것이다.69)박대재, 앞의 책, 50∼51쪽.

전쟁의 연합적 측면은 바로 의식의 기능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의식과 전쟁은 언뜻 보기에 전자는 정적이면서 융합적이고, 후자는 동적이면서 권위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내면에서는 융합(연합)과 권위(질서)를 동 시에 생산할 수 있는 공통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외면상 상반되어 보이는 의식과 전쟁의 관계는 음과 양의 관계를 통해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국가의 주 동인(prime mover)은 전쟁, 무역, 관개(灌漑) 등과 같은 외형상 역동적인 남성의 요소들로 설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적인 여성의 역할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의식’이 국가 운영의 내면적 주 동인(이데올로기)으로 점차 주목을 받고 있다.70)S. M. Nelson, “Ideology, Power, and Gender: Emergent Complex Society in Northeastern China”, In Pursuit of Gender: Worldwide Archaeological Approaches, (eds.) S. M. Nelson and M. Rosen-Ayalon, Walnut Creek AltaMira Press, 2002. pp.73∼80.

의식이 반드시 여성에 국한되는 요소는 아니겠지만 기존의 남성 편향적인 요소들과 달리 여성의 기능이 월등히 발휘될 수 있는 통로로 분명히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고대의 의식이 여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사례들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라에서 시조 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추앙되었던 알영(閼英)과 신라를 수호하는 삼사(三祀)의 신으로 모셔졌던 선도산신모(仙桃山神母), 고구려에서 시조 주몽과 함께 국가의 신으로 모셔졌던 하백녀(河伯女) 등은 모두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던 여성 신들이다. 또한 신라의 남해차차웅 때 시조묘의 제사를 주관한 왕의 누이동생 아노(阿老),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두루 확인되는 노구(老嫗)의 주술성71)최광식, 「『삼국사기』 소재 노구의 성격」, 『사총』 25, 1981. 등은 모두 여성과 의식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는 예들이다.

고대 국가에서 의식을 반드시 여성적인 요소로, 전쟁을 남성적인 요소로 분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의식과 전쟁의 상대성을 음과 양의 개념에서 이해한다면, 의식과 전쟁은 마치 음양처럼 서로 상반되면서도 필수적으로 공생 조화하며 ‘상호 작용(interaction)’하는 관계에 있었다. 음과 양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음은 양의 속성을, 또 양은 음의 속성을 그 바탕에 가지고 있어 두 가지가 공존하게 된다. 따라서 음(여성)과 양(남성)이 언뜻 상반되어 보이지만 서로가 불가결한 한 쌍을 이루고 동반하듯이, 의식과 전쟁 또한 따로 떨어져 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존하며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과 의식의 동반 관계는 선사시대 원시 전쟁의 형태인 ‘석전’과 원시 신앙의 공간인 ‘서낭’ 사이의 상호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국내 각지의 민속 조사를 통해 서낭이 돌을 쌓아 놓은 누석단(累石壇)을 가리키거나 또는 누석이 서낭(당)의 중요한 구성 요소를 이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낭은 신수(神樹)에 잡석을 쌓아 올린 누석단이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이고 부락 공동의 수호 신앙으로 마을 입구, 고갯길 옆, 산자락 등에 위치하여 우리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민간의 보편화된 신앙이다.72)김태곤, 「서낭당 연구」, 『한파 이상옥 박사 회갑 기념 논문집』, 교문사, 1970, 255쪽. 이처럼 서낭의 일차적인 특징이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는 점과 마을의 입구나 요지에 위치한다는 현상 등을 근거로, 서낭을 석전을 위한 일종의 군사 기지 내지 무기고와 같은 군사적 방어 시설로 이해하기도 한다.73)신복룡, 「서낭(城隍)의 군사적 의미에 관한 연구」, 『학술지』 26(인문·사회 과학편), 건국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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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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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이 원시 전쟁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돌이라는 표면적 소재뿐만 아니라 서낭의 기원을 통해서 추구해 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낭의 의미에 대해서 중국 성황(城隍)의 와전(訛傳)이라고 본 시각도 있었으나,74)『성호사설(星湖僿說)』 성황묘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화동음사변증설(華東淫祀辨證說). 근대 이후에는 대체로 서낭은 재래의 고유 신앙이고 성황은 중국에서 전래한 것인데 양자의 신앙적 기능이 서로 비슷하여 복합된 것일 뿐 연원은 다르다고 이해되고 있다.75)손진태, 「조선의 누석단과 몽고의 오보(鄂博)에 취하여」, 『조선 민족 문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48, 169쪽 ; 조지훈, 「누석단·신수·당집 신앙 연구-서낭(城隍)고-」, 『문리논집』 7(문학부편), 고려대, 1963, 58쪽. 중국의 성황은 성 둘레에 파놓은 연못인 황(隍), 곧 해자(垓字)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 국가나 고을의 방어 시설을 일컫는 것이었는데, 성지(城池)의 신을 성읍의 수호신으로 믿게 되면서 성황 신앙으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서낭도 수호 신앙의 의미가 있었던 관계로 한자의 성황(城隍)에서 취음(取音)하여 표기한 것인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양자는 변별성을 상실하고 혼용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76)주강현, 「서낭당이냐 성황당이냐」,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한겨레신문사, 1996, 172∼187쪽.

토착적인 서낭의 연원에 대해선 ‘산왕(山王)’의 전음(轉音)으로 보거나,77)김태곤, 앞의 글. 또는 마을의 방위를 의미하는 ‘골맥이(防村)’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78)신복룡, 앞의 글. 서낭과 성황이 거의 구분 없이 혼용되는 것을 보면, 서낭에도 성황과 같은 마을 방위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성황이 성을 둘러싼 해자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에 주의해 보면, 앞서 살펴본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을 둘러싸고 있던 환호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성곽의 해자는 선사시대의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환호 시설이 발전한 것으로, 성황의 기원이 바로 선사시대의 환호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중국과 우리의 환호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을 보여 주지만, 마을의 수호와 관련된 신앙이 거기서 기원하였을 가능성은 공통적으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 고고학 발굴 조사에 의하면 환호는 방어적 목적뿐만 아니라 신앙 의례적 기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환호가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묘역을 둘러싼 경계로 이용되거나, 또는 인골을 화장하거나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환호 내부에서 유물을 고의로 파손 폐기한 흔적이 발견된다는 사실 등은 환호가 모종의 의식과 관련된 공간이었음을 시사해 준다.79)정의도, 앞의 글.

전쟁과 의식의 관계는 역사 시대에 이르면 한층 더 뚜렷하게 확인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을 통해 형성된 영웅 신앙과 그에 대한 의식은 폴리스의 영역을 수호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했으며,80)H. Bowden, “Hoplites and Homer: Warfare, hero cult, and the ideology of the polis”, War and society in the Greek world, (eds.) J. Rich and G. Shipley, London: Routledge, 1993. pp.45∼63. 고대 중국 주(周)나라의 지배 계급은 전쟁 기간 내내 전쟁의 한 과정으로 의식을 거행하였다.81)R. D. S. Yates, “Early China”, War and Society in the Ancient and Medieval Worlds, (eds.) K. Raaflaub and N. Rosenstein,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99. pp.9∼25. 전쟁과 의식의 동반 관계는 고대 마야 문명에서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는 현상이었다.82)D. Webster, “Warfare and Status Rivalry: Lowland Maya and Polynesian Comparisons”, Archaic States, (eds.) G. M. Feinman and J. Marcus, Santa Fe: School of American Research Press, 1998. pp.337∼339. 고대 국가에서 의식과 전쟁은 서로 배타적인 동인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국가를 지속시키는 불가결한 동반 요소의 역할을 했다. 고대 국가에서 의식과 전쟁의 불가결한 동반 관계는 다음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기록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달려 있다. 제사에는 집번(執膰)의 예가 있고, 전쟁에는 수신(受脤)의 예가 있으니 이들은 모두 신을 섬기는 중요한 절차이다.83)『좌전』 성공(成公) 13년 3월.

이 기록은 고대 국가의 중대사 중에서 제사와 전쟁만큼 중요한 일이 없음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전쟁과 제사의 동반 관계도 언급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장수는 전쟁에 출정하기에 앞서 국가의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그 앞에서 제육(祭肉)을 받는 수신(受脤) 의례를 거행했는데, 그 성패가 곧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공경을 다해 의식에 임했다고 한다.84)楊伯峻, 『春秋左傳注』, 北京: 中華書局, 1981, 860∼861쪽. 그러므로 여기서 ‘융유수신(戎有受脤)’은 전쟁에 앞서 거행된 일종의 출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록은 의식과 전쟁이 고대 국가의 두 가지 큰일인 동시에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동반함을 확인시켜 준다. 전쟁과 의식의 동반 관계는 우리 고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을 하게 되면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占)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였다.85)『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

고대 부여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 발굽을 이용해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부여의 점복은 동물을 이용한 점의 형식으로 그 방법은 중국 은(殷)나라의 갑골 점복(甲骨占卜)과 유 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86)임동권, 「삼국시대의 무·점속」, 『백산학보』 3, 1967. 국내 여러 유적에서 복골(卜骨)이 널리 발견되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전쟁-제사-점복’의 병행은 부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고대 사회의 보편적인 풍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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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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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쟁과 의식이 동반하는 현상은 고대 국가의 중요한 제사 장소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87)최광식, 「신라의 대사·중사·소사의 제장 연구」, 『역사민속학』 4, 1994. 이상과 같이 의식과 전쟁이 동반하며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의식과 전쟁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 때문이다. 만약 의식이 집단 내부의 연합만을 양산하고, 전쟁이 지휘자 일인의 권위만을 발달시킨다면 양자는 서로 공존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의식과 전쟁은 연합과 독점의 양면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양자가 동반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의식은 집단 내의 연합뿐만 아니라 질서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은 지배자의 권력만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성원들의 연합과 결속을 다지는 기능도 한다.

그리고 전쟁과 의식이 복합성을 갖게 되는 근본적인 배경은 인간 심성의 양면성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수직적 인지(認知)뿐만 아니라 수평적 인지를 함께 통합해 이중적으로 심성을 구성하게 된다. 수직적 인지가 현상을 위계적이고 단선적으로 보게 한다면, 수평적 인지는 그것을 다선적(多線的)이고 공간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최근 ‘인지 고고학(cognitive-archaeology)’에서 주목하고 있는 ‘위계적 인지(hierarchical cognition)’와 ‘분산적 인지(decentration cognition)’의 복합 현상은 바로 인간 심성의 양면성을 설명하는 좋은 예이다.88)T. Wynn, “Two Developments in the Mind of Early Homo”, Journal of Anthropological Archaeology, vol. 12, 1993. pp.299∼322.

인간은 사회 현상을 위계적이고 계통적으로 인지할 뿐만 아니라 연계 적이고 다선적인 관계를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인식한다. 예컨대 정치 행위자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질서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연대 공생의 연합 관계 역시 중요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정치 행위자는 독점적인 행위와 함께 연합적인 행위를 동시에 병행해야 하며, 만약 균형을 잃고 연합과 독점 중의 어느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면 고립되거나 아니면 종속되어 버리는 것이다.89)M. Mann, The Sources of Social Power:vol. 1 A History of Power From the Beginning to A.D. 1760,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6. pp.6∼10.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왕권은 제사 등 의식에 기반을 둔 ‘도덕적 권위(moral authority)’와 전쟁 등 군사를 토대로 한 ‘강제적 권력(coercive power)’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90)豐田久, 「周王權の君主權の構造について: ‘天命の膺受’者を中心に」, 『西周靑銅器とその國家』, 松丸道雄 編,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80, p.407 ; K. C. Chang, Art, Myth, and Ritual:The Path to Political Authority in Ancient China,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83. pp.35. 국가 단계의 최고 권력자는 흔히 ‘왕(king)’이라 표현되는데, ‘왕’은 이전의 수장들(제사장, 군사 지도자)과는 다르게 제사권(祭祀權)과 더불어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권(軍事權)까지 독점하는 최고 통치자였다. 제사권과 군사권이 따로 구분되어 ‘대칭(對稱)’을 이루던 단계를 국가 이전 사회라고 본다면 두 권한이 ‘왕’에게 집중(독점)된 단계를 국가라고 보면 될 것이다.91)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동아시아, 2003, 159∼164쪽.

고대 왕권의 핵심은 제사권과 군사권이라는 두 축에 놓여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가 단계에 이르면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제정 분리가 곧 왕의 제사권 방기(放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단계에서도 제사권은 최고 권력자인 왕에게 긴밀하게 귀속되어 있었다.92)최광식,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 金子修一, 『古代中國と皇帝祭祀』, 東京: 汲古書院, 2001. 왕이 직접 제사를 집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의 가까운 친족으로 하여금 대신 주제(主祭)하게 하였던 것이다. 왕권의 도덕적 기반인 제사의 권한을 다른 세력에게 양도한다는 것은 정당성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고대의 왕들은 더욱 굳건히 제사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대의 왕들은 국가 제사의 주제자로서 ‘사제왕(司祭王, priest-king)’ 또는 ‘무왕(巫王, shaman-king)’이라 이해되었던 것이다.

왕이 제사 등의 의식을 통해 과시하는 권위는 전쟁 때 보여 주는 강제적 무력적 권력과 달리 도덕적이고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러한 왕의 도덕적 권위는 그전의 수장이 가지고 있던 제사권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절대자(신)로부터 내려 받은 불가침의 신성권이었다. 고대 국가의 왕은 강제적 권력과 도덕적 권위를 함께 보유할 때 진정한 왕자(王者)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고대 국가에서 제사(의식)와 전쟁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대사였으며, 이에 따라 제사권과 군사권은 최고 권력자인 왕의 가장 중요한 세력 기반이었다.93)박대재, 『삼한의 ‘왕’에 대한 연구-전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2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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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에서 ‘왕’의 탄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치우(蚩尤)의 시대 이전부터 인민들은 나무를 깎아 전쟁을 하였는데, 거기서 승리한 사람이 우두머리(長)가 되었다. 우두머리는 잘 다스리기에 아직 부족하기에 임금(君)을 세우게 되었고, 임금 역시 잘 다스리기에 부족하여 천자(天子)를 세우게 되었다. 천자는 임금으로부터 나왔고, 임금은 우두머리로부터 나왔으며, 우두머리는 전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94)『여씨춘추』 권7, 탕병(蕩兵).

‘전쟁→우두머리(長)→임금(君)→천자(天子)’의 진화 과정은 왕이 전쟁에서 발단했음을 보여 준다. 전쟁의 승리자로 등장한 ‘장’은 바로 전쟁 시의 군사 지도자(군사 수장)이며, 거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군’은 곧 ‘왕’의 존재로 이해된다.95)李學勤 主編, 『中國古代文明與國家形成硏究』, 昆明: 雲南人民出版社, 1998, 239∼241쪽.

왕의 연원(淵源)이 전쟁이었음은 글자의 어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왕(王) 이라는 글자의 어원에 대해선 그동안 많은 해석이 있었으나,96)허진웅, 『중국 고대 사회-문자와 인류학의 투시-』, 동문선, 1991. 42∼46쪽 참조. 고대에 군사 통수권을 상징하던 부월(斧鉞)의 형상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97)白川靜, 앞의 책, 62쪽.

그렇다면 왕은 전쟁에 의해 잉태되고 성장한 권력의 결정체라고 보아 도 좋을 것이다. 전쟁에 필요한 군사 통수권의 획득을 통해 왕은 원시 사회의 우두머리(장)에 비해 다분히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한비자(韓非子)』에서는 “대저 왕이란 다른 사람을 공격할 능력이 있는 자(夫王者能攻人者也)”98)『한비자』 권19, 오두(五蠹).라 하였고, 또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살생(殺生)을 결정하는 위세를 왕(制殺生之威之謂王)”99)『전국책』 권5, 진(秦) 3.이라 했던 것이다.

요컨대 왕은 전쟁에서 잉태된 원시 사회의 우두머리(장)가 국가 단계에 이르러 전쟁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최고 통치자였다. 그리고 왕의 탄생 과정에는 전쟁을 통해 한층 성장한 강제적 권력 이외에 앞서 살펴본 의식(제사)을 통한 도덕적 권위의 신성화 작업이 동반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왕은 음양과 같이 동반하는, 전쟁과 의식의 상호 작용(interaction)에 의해 탄생한 폭력적이면서도 신성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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