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2장 출정에서 회군까지
  • 3. 회군과 논공행상
  • 포상과 진혼 의식
심승구

회군 의식을 마친 후 며칠 이내에 전쟁의 공로를 따져 논공행상의 절차에 들어간다. 포상에 앞서 우선 조정에서는 출정했다가 죽거나 다치거나 귀환하지 못한 병사를 위해 진혼제를 베풀었다. 물론 진혼을 위한 제사는 평소 여제(厲祭)의 예에 의해 사망자를 한 곳에 묻고 단을 쌓아 글을 지어 사제함으로써 넋을 위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중에는 아군이나 적군을 막론하고 한 곳에 묻고 단을 쌓아 여제를 베풀게 했다.154)『선조실록』 권34, 선조 26년 1월 을유.진혼제의 형태는 초혼, 전몰처 여제, 민충단 등 여러 유형으로 행해졌다. 한 예로 1510년(중종 5) 5월에는 경상도 왜변 때 피살된 272명을 위해 여제의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내 위로하였고, 가옥이 소실된 자는 진휼(賑恤)하며, 전사한 자는 5년 동안 복호(復戶)하고, 가옥이 소실된 자는 2년 동안 복호하고, 아울러 수년 동안 조세를 감면하게 했다.155)『중종실록』 권11, 중종 5년 5월 경오. 전쟁에서 다쳐 죽거나 병으로 죽은 장수나 병사의 가족에게는 곡식을 내려주고 요역이나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156)『세조실록』 권4, 세조 1년 7월 계해. 또한 전쟁 때의 공과는 물론이고 명령 불복종을 비롯해 죄를 따져 치죄하는 일도 했다.157)『세종실록』 권5, 세종 1년 9월 병인.

한편, 전쟁은 해당 국가뿐만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하나의 전쟁에 여러 나라가 관계되는 것은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은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비키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그러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당시 명군 가운데는 중국 병사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군인은 물론 ‘해귀(海鬼)’라고 해서 포르투갈의 병사들까지 참전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군인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한·중·일 삼국 간의 전쟁을 넘어선 국제적 사건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원군이 돌아가는 회군 절차가 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명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돌아가는 전별식도 성대히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노고에 대한 감사, 죽고 다친 원군에 대한 애도와 포상, 그동안 전투 과정에서 정들었던 동지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한다는 평화의 다짐, 고향으로 돌 아간다는 기대와 설렘 등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전별식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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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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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이래 삼국시대까지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과는 물론이고 삼국 사이에도 영토 확장을 위한 공방과 각축이 잇따랐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이후 전쟁의 양상은 주로 외침을 받는 형태로 바뀌었다. 다만, 조선 초기의 군사 전략가인 양성지(梁誠之)는 『삼국사기』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인과 싸우면 열 번 싸울 때 일곱 번 이기고, 왜인과 싸우면 열 번 싸울 때 세 번 이기고, 야인과 싸우면 열 번 싸울 때 다섯 번 이긴다.”고 했다.158)『세조실록』 권34, 세조 10년 8월 임오. 삼국시대에 한정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유난히 중국에게 강하고 북방 민족과는 대등하며 왜인에게는 약했음 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는 전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실제로 통일신라 이후에는 민족의 형성이 뚜렷해지면서 주로 이민족과의 전쟁이 위주가 된 시기다. 특히,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남왜북적(南倭北狄)’이라고 해서 남쪽의 왜(일본)와 북쪽의 오랑캐(중국, 여진, 거란, 몽고)를 대비하는 전략을 세워 총력전을 수행했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종전과 달리 공격과 방어가 혼합되어 있는 국방 체제에서 벗어나 거의 주변국의 침략을 받는 양상이 확연해지며 민족의식이 공고해지는 특징이 있다. 전쟁이 한민족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키워낸 셈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전쟁 의식은 고대에서부터 크게 발달해 왔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여 이에 대처하는 방식과 관행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즉, 고대에서부터 전쟁이 발발하면 장수의 임명에서부터 출정, 둑제, 행군, 적과의 공방, 전쟁의 결과와 회군, 논공행상과 진혼 의식 등으로 이루어졌다. 출정식은 성대하고 신중했다. 그만큼 전쟁의 결과가 곧 국가의 존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출정 과정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전쟁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절차와 의식은 갈수록 축소되었는데 전쟁이 그만큼 급박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기습적으로 대규모 군대가 쳐들어온 침략 전쟁이 발발하면 이에 대처하기 위한 의식과 절차는 간소하게 하거나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의 출정 의식과 회군 의식은 오례 가운데 하나인 군례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조선 왕조의 군례에서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는 출정 의식과 회군 의식이 사라졌다기보다는 그만큼 전쟁 의례가 간소화되고 비중이 약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치주의 사회 속에서 전쟁 의식의 중요성은 갈수록 축소되어 갔다. 그 대신 조선 왕조의 군례에서는 국왕 중심의 군사 의식을 강조했다.

고려시대의 군례 가운데 하나였던 출정 의례와 회군 의례가 조선 왕조 에 들어와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에서 사라진 점은 큰 변화다. 그 대신 출정식에 대신해서 둑제를 의례화한 점이 특이하다. 반면에 회군 의례는 사라지게 되었다. 왜 회군 의례를 폐지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유교 이념에 더 충실한 의례인 관사례, 대사례, 강무 제도, 대열, 취각령, 둑제 등으로 변화되었다.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의식은 둑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빠져 버렸다. 국가 의례에서 전쟁과 관련된 의례가 빠진 대신 전쟁을 대비하고 평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는 전쟁 예방적인 의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조선시대 군례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에 따라 실제로 조선시대에 전쟁과 관련된 의식은 매우 간소화되어 갔다. 전쟁의 의식이 중요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전쟁을 될 수 있으면 미연에 방지하고 전쟁보다는 외교로 갈등을 해결한다는 유교적인 국방관과 이념의 지향이 전쟁 의식을 국가 의례로 드러내지 않게 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조선시대의 전쟁 의례는 갈수록 생략되거나 간소화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 출정에서 회군까지의 여러 의식은 간략해지거나 크게 축소되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출정에서 회군까지의 전쟁 과정은 크게 바뀌지 않음으로써 전쟁 문화의 또 다른 단면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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