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1. 관왕묘와 무신
  • 임진왜란과 관왕묘의 건립
  • 임진왜란과 관왕묘
이욱

1592년 4월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전국 곳곳에 전쟁의 상처를 남겼는데, 높고 화려한 건물이 즐비하고 많은 사람들이 붐볐던 한양은 그 어느 곳보다 더욱 비참하였다. 임금이 떠난 궁궐은 왜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분노 한 백성들에 의해 불탔으며, 종묘와 사직 그리고 문묘 등 주요 전각들이 왜군에 의해 소실되거나 약탈당하였다. 1593년 10월에 한양으로 돌아온 국왕은 들어갈 궁궐이 없어 월산대군 집에 기거하였으며, 종묘의 신주도 제 곳을 찾지 못하고 개인 집에 임시로 모셨을 지경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민력을 동원해 건물을 지을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멈췄던 전쟁이 왜군의 침입으로 다시 시작되던 1598년 5월에 한양 남대문 밖 도제고현(都祭庫峴)에서는 독특한 행사가 치러진다. 한 달 전에 세워진 건물의 푸른 기와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서까래만큼이나 큰 글씨로 ‘협천대제(協天大帝)’, ‘위진화하(威振華夏)’라고 적힌 깃발이 높다란 장대에 매달려 바람에 따라 하늘을 이리저리로 가르고 있었다. 이 깃발 아래로 마당엔 광대들이 여러 가지 재주를 보이며 놀이를 펼쳤고 이를 구경하는 명나라 장수와 군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모여 있었다. 1592년 전쟁이 시작된 이후 오랫동안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축제 분위기였다.

확대보기
남관왕묘의 정전
남관왕묘의 정전
팝업창 닫기

사람들이 모인 기와집엔 진한 대춧빛 같은 붉은 얼굴에 봉황의 눈을 하고 수염을 배까지 드리운 관우의 상(像)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날은 관우의 생일로 관왕묘의 낙성식을 거행하는 중이었다. 이 관왕묘는 당시 원병으로 조선에 왔던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인(陳寅)이 세웠다. 진인은 울산성 싸움에서 왜적의 탄환에 맞아 한양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숭례문 밖에 가옥 한 채를 얻어 중국에서 가져온 관우상을 모셨다. 이를 본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 등 여러 사람들이 비용을 내고 나라에서도 이를 도와서 새 건물을 지어 관우를 모셨는데 이것이 한양에 처음으로 건립된 남관왕 묘(南關王廟)다.

확대보기
동관왕묘 전경
동관왕묘 전경
팝업창 닫기

관우의 사당 건립을 몸소 감독했던 진인은 듣는 사람들이 허망된 것으로 여길 정도로 관우의 영험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199)『선조실록』 권99, 선조 31년 4월 기유. 그러나 당시 관우에 대한 신앙은 비단 진인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 관왕묘의 건립에 양호를 비롯한 여러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참여했으며, 완공된 후 군사들은 전쟁에 나아갈 때면 이곳에서 전승과 안위를 빌었다. 또한 진인이 세운 남관왕묘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성주, 안동, 남원 그리고 강진의 고금도에서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명나라 군사들이 자신의 주둔지에 세운 것이다. 안동의 관왕묘는 명나라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안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도성 내 북쪽 산에 세웠다. 성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던 유격장 모국기(茅國器)는 승리의 감사와 전쟁의 종식을 빌며 성주읍 동문 밖에 관왕묘를 세웠는데 그 상은 매우 영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명나라 군사들이 물러간 후인 1601년에 한양 동대문 밖에 동관왕묘가 세워짐으로써 관왕묘 건립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현재 동묘(東廟)로 알려진 이 동관왕묘 역시 명나라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 관왕묘의 건립 동기를 보면 당시 조선에 왔던 중국 군사들의 관우 신앙을 알 수 있다.

지난번에 우리나라에 온 중국 장사들이 모두들 “전투가 있는 날이면 번번이 관왕의 신이 나타났습니다. 그 까닭에 평양에서의 승리, 한산도(閑山島)의 싸움과 삼로(三路)에서 왜구를 쫓는 싸움에서 모두 그 이적을 드러내어 황제의 위엄을 선양하고 왜구들을 크게 겁주고 악한 기운을 소탕하여 마침내 삼한(三韓) 옛 땅을 속국(屬國)에게 돌려주게 되었으니, 제사 지내어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천자께서는 “그렇다.” 하고는 바로 4,000금을 신하 만세덕(萬世德)에게 내리고 조선 왕경에 사당을 지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200)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6, 문부(文部)13, 비(碑), 「칙건현령관왕묘비(勅建顯靈關王廟碑)」 : 송기채 외, 『국역 성소부부고』, 민족문화추진회, 1983.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 군사들은 평양에서의 전투와 한산도 그리고 곳곳에서 있었던 전투의 승리를 관왕 곧 관우에게 돌리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사당을 세우고자 하였다. 국가 제사의 기본 정신이 공로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다면, 임진왜란을 종식한 최대의 공로자로 관우신이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관왕묘는 이렇게 임진왜란의 위기적 상황에서 관우신을 하늘 같이 모시는 명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화려하게 조선 사회에 들어왔다.

<표> 선조 때의 관왕묘 건립 현황
건립 장소 건립 시기 건립자
한양(남관왕묘) 1598(선조 31) 유격장 진인
한양(동관왕묘) 1601(선조 34) 신종의 명
성주 1598(선조 31) 유격장 모국기
안동 1598(선조 31) 진정영도사 설호신
고금도 1598(선조 31) 도독 진린
남원 1599(선조 32) 도독 유연

관우는 원나라 말 명나라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역사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가 읽고 있는 『삼국지연의』는 이를 1600년대에 모종강(毛宗崗)이 개정한 판본이다. 관우는 유비(劉備), 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고 그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면서 촉나라 건설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충절과 학식 그리고 용맹을 두루 갖추었던 그는 조조에게 잡혀 있을 때 온갖 좋은 조건을 내걸고 자기편으로 삼으려는 조조의 간곡한 요청을 끝내 거절하고 유비에 대한 충의를 지켰으며, 손권의 군사에게 사로잡혀 죽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관우에 대한 이야기는 정사(正史)보다 소설을 통해서 좀 더 극적인 이야기로 발전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확대보기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성제군(關聖帝君)
팝업창 닫기

끝까지 충의를 지키다가 참수당한 관우는 사후 형주 지역의 수호신에서 점차 전국적인 신으로 발전해 갔다. 관우가 사후에 국가로부터 대접 받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인 760년 무성왕묘(武成王廟)에 배향된 때부터이다. 그 후 송나라에 들어와 초기에 무성묘에서 축출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지위는 꾸준히 성장하여 명나라에 이르러 국가로부터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명 태조의 경험과 연관이 있었다. 그가 강서성 북쪽의 파양이란 호수에서 싸울 때 얕은 바닥에 배가 막혀 전멸할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관우가 구름 속에서 나타나 바람을 돌려주었기에 적함을 불사르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태조는 황제에 즉위한 후 순천부 정양문에 관우를 위한 사당을 세워서 자신을 도와준 공덕에 보답하 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은 관우의 영험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4년에 관우는 관제(關帝)로 추봉되었으며, 1614년에는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이란 긴 봉호가 붙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