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1. 관왕묘와 무신
  • 관왕묘와 무묘
  • 관왕묘와 무성왕묘
이욱

1691년(숙종 17) 2월 임오일에 숙종은 정릉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하리에 이르러 열무(閱武)하고 동관왕묘를 방문하였다. 이 행차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남관왕묘에 행차한 이후 국왕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숙종은 이 행차를 송나라 태조가 무성왕(武成王)의 사당에 행차하였던 고사를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무성왕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주(周)나라를 세울 때 공이 컸던 강상(姜尙)을 가리킨다. 강태공(姜太公)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위수 가에서 당시 서백후(西伯侯)였던 문왕을 만난 후 국사(國師)로 봉하여져 문왕과 무왕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군대 지휘자로 활약하였던 주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다. 이후 강태공은 중국에서 공자와 대비되어 무성왕으로 추대되었다.

강태공이 국가 전례에서 공자와 비견될 정도로 존숭되었던 시기는 당나라였다. 이때에 들어와 양경(兩京)과 지방에 제태공묘(齊太公廟)라는 이름으로 그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760년(상원 원년)에 강태공은 무성왕으로 봉해져 공자인 문선왕(文宣王)과 짝을 이루었다. 그리고 782년(건중 3)에는 문묘를 본떠 무성왕묘에 역대 장수들을 10철, 72제자로 구분하여 종향(從享)하였다.208)심승구, 앞의 글, 413쪽. 그러나 이러한 당나라 때의 정책은 788년(정원 4) 이후 문(文)과 무(武)를 분리할 수 없으며, 무묘가 문묘와 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성왕묘에 모셔진 종향위들을 모두 제거하고 강태공만을 모시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무성왕묘를 다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 송나라 태조 때였다. 송 태조는 무성왕묘를 건립하고 다시 문묘와 대등하게 지위를 높이고 직접 행차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숙종은 이러한 송 태조의 행적을 본받은 것이다. 여기서 관왕묘를 무성왕묘로 간주하여 문과 대비되는 무의 상징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관왕묘를 무성왕묘, 곧 무묘로 여긴 사례는 동관왕묘를 건립할 때인 선조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선조는 남쪽에 관왕묘를 또 건립하려는 중국의 의사를 최대한 막아 동쪽에 건립하고자 하였는데, 만약 이것이 거절될 경우엔 관왕묘가 무성묘를 대신하는 것이므로 훈련원(訓練院) 근처 에 건립하고자 하였다.209)『선조실록』 권111, 선조 32년 4월 무인.

왜 선조와 숙종은 무성왕묘를 건립하지 않고 굳이 관왕묘로 대신하려고 하였을까? 무성묘의 강태공과 관왕묘의 관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별도의 무성왕묘가 없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조선시대 국가 제사를 보면 상대적으로 전쟁이나 군대에 관한 의식이 미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문묘와 대비되는 무묘를 건립하지 않은 것은 공자의 학문을 무학(武學)의 상대 개념인 문학(文學)이 아니라 모든 학문의 중심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국 초부터 문묘의 권위가 이렇게 높았던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문묘 오른편에 태청관(太淸觀)이라는 도관(道觀)이 있었고, 태청관 남쪽에 강무당(講武堂)이 있어서 문묘는 그들의 위세에 위축되어 있었다. 개국 초기인 1400년(정종 2) 9월 강무당에서 지낼 둑제(纛祭)를 위해 무공(武工)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잠자리를 청하였다가 허락하지 않자 성균관 생원을 구타할 정도로 문묘의 권위는 미약하였다.

그러나 1407년(태종 7)에 한양의 문묘가 중건되고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감에 따라 문묘는 중사(中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사와 구분되는 독자적 권위를 획득해 나간다. 이런 가운데 문묘와 대비되는 무성왕을 모시자는 논의가 간간이 제기되었다. 태종은 문과 무 어느 한 쪽에 치우치거나 폐지할 수 없는데 무성왕에게 제사 지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대신에게 물으며 무묘에 관심을 보였다.210)『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7월 임오. 그리고 세종대 박아생은 무묘도(武廟圖)를 바치며 훈련관 북쪽에 무묘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211)『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3월 신사. 그러나 대신들은 대부분 문묘를 세워 공자를 제사하는 것은 오로지 문학(文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으로 수많은 제왕의 스승이었기 때문인데, 무묘를 세운다면 공자의 학문을 문학에만 한정하는 것이 되므로 문과 무를 하나로 보는 본의에 어긋나게 된다며 반대하였다.

세조대에 양성지(梁誠之)는 무묘의 건립을 좀 더 적극적으로 주창하였 다. 그는 당나라 때 강태공을 높여 무성왕을 삼고 사당을 건립하여 역대 훌륭한 장군 64명을 배향한 고사를 인용하면서 우리나라 전례(典禮)에 빠진 무성묘를 세워 김유신, 을지문덕, 유금필, 강감찬, 양규,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지,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하경복, 최윤덕 등의 명장들을 배향할 것을 건의하였다.212)『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정유. 세조는 이러한 양성지의 건의를 받아들였지만 무묘의 건립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성종은 즉위한 후 세조의 뜻이라며 이 문제를 성사시키고자 하였다. 성종은 무성묘의 제도를 중국 사신에게도 물어볼 정도로 열성을 가졌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당시 대신들은 무성왕 강태공의 학문은 권모술수(權謀術數)에서 나온 것으로 공자와 비견할 수 없고, 중국에서도 현재 그에 대한 사당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213)『성종실록』 권5, 성종 1년 5월 임진. 결국 조선 전기에 무성왕 사당의 건립은 간간이 제기되었지만 그때마다 문신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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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행렬도의 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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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조선시대 전쟁과 군대에 관한 제사는 오직 둑제뿐이었다. 둑(纛)이란 장대에 모우(旄牛)의 꼬리털을 붙여 마치 치우(蚩尤)의 머리 형상처럼 만든 깃발을 가리킨다. 이 깃발을 특정한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가 출정 때에 제사를 지내고 앞세우고 나아갔다. 고려시대에는 이 둑기(纛旗)를 태청관에 보관하고 제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도교적인 성격이 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14)『고려사』 권77, 지(志)31, 백관(百官)2, 태청관(太淸觀).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3년(태조 2)에 홍색과 흑색의 둑기가 만들어지자 둑신(纛神)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다. 둑기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청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둑제를 거행하였다. 한양 서부 적선방(현재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던 의흥삼군부는 정도전이 주장하여 지은 곳으로 군을 통솔하는 지휘소였다. 의정부의 청사와 같은 규모로 세워졌지만 정도전 사후 폐지되고, 예조가 이 청사를 사용하였다. 이때 둑기를 보관하던 둑소는 이곳에 그대로 있게 된다.

이후 무예를 중시했던 사람들은 무묘의 건립과 함께 예조에 있는 이 둑소를 한양 남부에 있는 훈련관으로 옮겨 줄 것을 소원하였다. 세종 때 박아생은 무묘를 훈련관 북쪽에 세우고, 둑소도 이곳으로 옮겨 무신들이 제향에 참예할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하였다.215)『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3월 신사. 문종 때 풍수학(風水學) 문맹검(文孟儉)이 둑소가 예조 담 밖에 있어 인가와 매우 가까워 공경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옮길 것을 청원하였다.216)『문종실록』 권12, 문종 2년 3월 병신. 그리고 세조 때 양성지 역시 훈련원으로 둑소를 옮기고 무묘를 건립할 것을 청원하였다.217)『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정유. 예종 때 신숙주가 다시 둑소를 훈련원에 옮길 것을 건의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218)『예종실록』 권6, 예종 1년 7월 임진. 그러나 이것은 실행되지 않았으며, 단지 성종 때에 주위에 보기 좋은 나무를 심어 일반인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임시적인 조치를 취하였을 뿐이다.219)『성종실록』 권251, 성종 22년 3월 병신.

이렇게 무성묘의 건립과 마찬가지로 둑소의 이건(移建)은 무를 중시하였던 사람들의 바람이었지만 끝내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둑제는 무신들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제장(祭場)이자 의례였다. 둑제는 봄 경칩일과 가을 상강일에 지내는데, 문신을 중시하였던 일반적인 국가 제사와 달리 문신을 배제하고 무신이 갑주를 입고 제향을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둑제는 군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권위, 그리고 그들만의 단합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제향이었다. 이러한 측면은 문묘 석전제와 대비될 만큼 융성했던 음복례에서도 나타났다. 조선 전기 문묘의 석전제와 둑소의 둑제는 제사가 끝난 후 문무백관들이 술을 마시며 크게 한바탕 노는 날이었다. 석전제를 마친 후에는 명륜당에 문무 대소 관원들이 모여 음복례를 거 행하며 풍성한 음식을 먹고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반면 둑제 때에는 훈련원에서 음복례를 행하였는데 관에서는 악기와 영기를 제공해 주며 성대히 놀았다.220)심수경(沈守慶), 『견한잡록(見閑雜錄)』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대동야승(大東野乘)』 Ⅲ, 1971, 564쪽. 그러나 이러한 행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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