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2. 대보단과 전쟁의 기억
  • 전쟁의 기념
  • 제향일의 시간성
이욱

대보단은 단의 형식이지만 실제 제향 때에는 단에 장막으로 집을 만들었다. 제단에 장전(帳殿)을 세우고 그 안에 황장방(黃帳房)을 만들었다. 황장방이란 황색 지붕에 앞면만 열려 있고 삼면에 장막이 드리워진 방 모양의 휘장을 말한다. 이 방 안에 신연(神榻)을 놓고 그 위에 신좌(神座)를 얹어둔다. 이 신좌의 가운데에 지방을 붙여두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므로 단의 형식이지만 실제 제향에서는 임시 건물이 만들어져 사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제사 당일에 집사자들이 제사 준비를 마치고 문무백관과 종실들이 제자리를 찾아 정렬하면 국왕이 들어와 제자리에 선다. 대보단은 다른 제향과 달라 삼헌(三獻) 모두를 국왕이 몸소 올렸다. 그만큼 국왕의 제사에 대한 독점권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보단의 제향 행사는 언제 거행되었을까? 신종 황제를 모신 단이므로 그의 기일(忌日)에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묘의 사시제(四時祭)와 같이 사계절 첫 달에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보단 제향은 사시제도 아니고 기일도 아닌 매년 3월에 지냈다. 왜 3월에 지내는 것일까? 『황단의(皇壇儀)』에는 이 달이 명나라가 패망한 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35)『황단의(皇壇儀)』 奎14308, 시일(時日), “三月上旬卜日 皇朝淪亡在於三月故用是月.” 『황단의』는 대보단에 관한 의절을 정리한 책으로 1747년(영조 23)에 영조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즉, 1644년(인조 22) 3월 19일 북경의 자금성이 청에게 함락된 날을 기억하여 이 달에 신종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대보단 제향일은 애초 2월로 정해졌다가 정월로, 다시 정월에서 3월로 변경 되었으며, 이 사이에 4월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각각의 달이 가진 의미와 3월로 정해진 대보단 제향의 의미를 살펴보자.

예조 판서 민진후가 처음으로 건의했던 2월설은 천자가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는 달에 맞춘 것이다. 순수는 천자가 수도를 벗어나 지방으로 순시하는 정치 의식이다. 『상서(尙書)』 「순전(舜典)」에 따르면 순(舜)임금이 2월에 동쪽으로 순수하는데 태산(泰山)에 이르러 번시(燔柴)로 하늘에 제사하고 산천에 망제(望祭)를 지내고 동방의 제후와 신하들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남쪽으로, 8월에는 서쪽으로, 11월에는 북쪽으로 순수하였다.236)『상서(尙書)』 「순전(舜典)」. 민진후는 이러한 예식에 근거하여 조선이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므로 천자가 동쪽에 순수하는 2월에 신종을 제사 지내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대보단 공역을 담당하였던 김진규가 주장한 정월설은 천자의 행보와 관계없이 천자에게 지내는 제사의 존귀함에 의미를 둔 것이다. 정월이 일 년 중 가장 앞선 달이며, 국가의 대사(大祀)들이 모두 정월에 있는데 2월에 대보단 제사를 지내면 중사(中祀)와 같이 격이 낮아진다는 주장이었다.237)『대보단사연설』, 갑신년(1704) 10월 14일. 이것은 대보단의 존귀함을 일 년이 시작하는 첫 달로 표상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월설은 이 달이 아직 날씨가 추워 국왕이 친행하기 어렵고, 정월에 하례(賀禮)를 받는 의식과 겹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민진후가 다시 3월설을 제시하였다.

생각건대 이 단을 세우는 것은 대명(大明)이 패망한 해의 회갑(回甲)을 맞이하여 성상께서 감모의 정성을 담아내는 것에서 비롯하였습니다. 비록 매년 이번 해와 같이 도성이 함락한 날에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지만 만약 삼월 상순(上旬)에 택일하여 제사를 지낸다면 명분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238)『대보단사연설』, 갑신년(1704) 11월 21일.

민진후는 설단(設壇)의 계기를 상기시키면서 명나라가 패망한 달인 3 월에 제향을 거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앞의 주장에서 보는 것 같이 3월은 신종 황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서 신종 황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한 것이 4월설이었다. 이는 이유(李濡)가 제기한 설로 임진왜란 때 명군이 도와주어 한양을 회복한 달이 1593년(선조 26) 4월이므로 이 달에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다. 그는 이 달의 한양 수복이 3월의 명나라 패망보다 신종과 훨씬 밀접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239)『대보단사연설』, 갑신년(1704)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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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에 따른 2월설, 1년 중 첫 달인 정월설, 명의 패망일에 맞춘 3월설, 임진왜란 때 한양 수복에 맞춘 4월설을 좀 더 단순화시켜 분류하면 자연적 순환에 기초한 1월·2월설과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3월·4월설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을 이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시향(時享)은 시절의 기운(時氣)을 중시하는 반면 기제(忌祭)는 인정(人情)을 중시합니다. 정월과 2월은 시기(時氣)로 말한 것이고 3월과 4월은 인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240)『대보단사연설』, 갑신년(1704) 12월 21일.

고대 유교 경전이나 후대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나오는 조상 제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시제(四時祭)였다. 이는 사계절이 변할 때 조상을 생각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241)『예기』 「왕제(王制)」에 나오는 사시제의 명칭은 “약(礿, 봄), 체(禘, 여름) 상(嘗, 가을), 증(烝, 겨울)”이고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는 “ 사(祠), 약(禴), 상(嘗), 증(蒸)”이다. 『주례』를 기준으로 할 때, 봄에 지내는 사는 만물이 생겨나는 시절을 맞이하여 부모를 생각하며 지내는 제사다. 여름 제사인 약(禴)은 약(礿)과 동의어로서 ‘삶다(汋)’는 의미를 지닌다. 보리가 비로소 익어 삶아 신께 바치는 제사다. 가을 제사인 상(嘗)은 가을 곡식이 하나가 아니지만 먼저 기장을 올리어 맛보게 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명칭이다. 증(蒸)이란 많다는 뜻으로 제수가 풍성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시제는 시대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더라도 자연의 운행이라는 기본적인 흐름을 매개로 하였다는 데에서 동일하다. 이 사시제에는 자연의 시간적 순환이 중요할 뿐 제사 대상의 개인적 시간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있다. 반면 기제(忌祭)는 제사 대상의 사망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계절의 변화와 전혀 무관하다. 계절의 순환이라는 주기적이고 보편적인 시간 흐름과 달리 일회적으로 발생하는 ‘한 개인의 죽음’이란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므로, 죽은 자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개별화된 시간이다. 이여는 이러 한 사시제와 기제를 ‘시기(時氣)’와 ‘인정(人情)’으로 구별하였다. 시기란 보편적인 자연의 기운을 따른 것이며, 인정은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된 개별적 사건을 쫓은 것이다. 물론 3월이나 4월은 이유가 언급한 것처럼 기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편적 계절의 변화에서 벗어나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기념이라는 측면에서 기일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이여의 이러한 구분을 가지고 당시 국가 제향을 보면 대보단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는 ‘시기’, 즉 계절적 순환에 맞추어 거행되었다. 이들의 날짜 구성을 보면, 국가 제향일은 무상일(無常日)이든 유상일(有常日)이든 봄과 가을, 또는 이십사절기, 명절 등의 시간 마디에 따라 제향일이 정해졌다.242)『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제사의 날은 ‘유상일자(有常日者)’와 ‘무상일자(無常日者)’로 구분된다. 유상일자란 날짜가 고정되어 있어 택일의 절차가 생략되는 것을 가리킨다. 중춘(仲春)·중추(仲秋)의 상술일(上戌日)에 지내는 사직제, 중춘(仲春)·중추(仲秋)의 상정일(上丁日)에 지내는 문묘 석전제, 정조·한식·단오·추석·동지·납일과 같은 명절날의 속제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무상일자는 춘추(春秋) 맹월(孟月) 상순(上旬)에 지내는 영녕전(永寧殿), 춘추(春秋) 중월(仲月)의 풍운뢰우제(風雲雷祭), 악해독제(岳海瀆祭), 역대시조제(歷代始祖祭) 등과 같이 특정 달을 정하였을 뿐 구체적인 날짜를 확정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문묘 석전243)성균관 문묘 석전은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의 달 상정일(上丁日)에 제사를 지낸다. 『예기』 「월령」에 따르면 이 날에 악정(樂正)에게 명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춤을 익히게 하고 선사(先師)에게 석채(釋菜)의 예를 행하도록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정현(鄭玄)은 주에서 이러한 의식을 봄이 되어 양기가 비로소 움직여 만물이 지면에서 나오는 것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나 선농제(先農祭), 선잠제(先蠶祭), 역대 시조(歷代始祖) 등과 같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제향마저도 그들과 무관한 날에 제사를 지냈다는 점이다. 생일이나 기일 그리고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농경을 기본으로 한 순환의 시간에 맞추어 지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종묘에서 사시제를 가장 중요한 대제(大祭)로 간주하고 선왕의 기제사를 속례(俗禮)로 간주하여 각각의 능(陵)에서 지내게 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국가 제향은 인물이나 사건의 역사성을 약화시키고 자연의 보편적인 시간, 또는 농경 세기의 순환적 시간으로 전환시킨 데에 특색이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둔다면 3월로 결정된 대보단의 제향이 지닌 독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대보단은 자연의 보편적 시간 스케줄에 맞추지 않고 명나라가 패망한 달에 맞춤으로써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의례화(儀禮化)하고 있다. 여기서 의례화란 특정 대상을 성스러운 범주로 구별시켜 주의를 환기시키는 전략을 의미한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성례화(聖禮化)되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성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과 구별되어 성스러운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보단의 제향을 통해 봄의 마지막 달이 아니라 명나라가 패망한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 는 달로서의 3월이 새롭게 제향의 시간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것은 명나라가 패망한 사건이 의례의 구조에 들어오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년 단위로 반복되는 제향의 구조에 따라 그 역사적 사건은 주기적으로 기억되고 재생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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