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3. 전몰처와 여제
  • 군인의 죽음과 국가의 대응
  • 조선 전기 군인의 죽음
이욱

조선시대 국가는 백성의 삶과 죽음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 기구였다. 국가 입장에서 개인의 죽음은 부역과 과세의 대상이 소멸하는 것이므로 사망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자 하였다. 수량적인 정보 외에 국가는 개개인의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과 영혼을 위한 의식에도 간여하였다. 국가는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한 상장례(喪葬禮)를 보급하고 가묘(家廟)의 건립을 권장하여 이전에 무당과 승려가 주도했던 죽음에 관한 의례를 유교적인 양식으로 바꾸었다. 더 나아가 국가는 한 개인의 죽음을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해주는 권력 집단이었다. 종묘 정전의 불천위(不遷位)와 공신당(功臣堂), 역대 시조묘(始祖廟), 문묘 종사(文廟從祀)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 확산되는 서원(書院) 및 사우(祠宇)에 대한 사액(賜額)과 사제(賜祭), 충신, 열녀, 효자에 대한 정려(旌閭)와 포상 등은 한 개인의 죽음을 국가가 개 입하여 공적인 죽음으로 인정하고 변화시키는 의례적 행위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면이 있지만, 고려시대 국가의 사전 체제(祀典體制)가 산천 및 성황신에 대한 봉호나 봉작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조선시대의 것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제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시대는 신보다 인간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백성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이렇게 모범적인 죽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공을 남겨 후대에 모범이 되는 의로운 죽음뿐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인한 억울한 죽음에도 조의를 표하였는데 이 경우 ‘구휼(救恤)’이란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사망자에 대한 구휼의 대표적인 예로 군인의 죽음에 대한 국가 정책을 들 수 있다. 군역은 해당인에게 육체적인 수고로움을 주고 그 가족들에게는 노동력의 손실을 초래하는 이중적인 노역이었다. 거기에다 군역에 나간 사람은 전쟁에 공을 세우고 죽은 경우도 있지만 적에게 피살되거나 진중에서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뜻하지 않은 죽음에 대해서 국가는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구휼 정책을 펼쳤다. 첫째는 죽은 자의 가족에게 베푸는 경제적 혜택이다. 둘째는 죽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며, 셋째는 죽은 영혼을 위해 조문이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들은 조선 전기에 이미 법률화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편찬된 『경제육전(經濟六典)』에는 “선군(船軍)으로 병고가 있는 자도 국왕에게 올려서 그의 가족을 구휼한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선군은 수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물일의 어려움 때문인지 이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은 일찍부터 보이는데, 이 조항은 점차 대상 범위가 넓어지고 구제의 방식도 구체적으로 명문화되었다. 1420년(세종 2) 11월에 이 조항에 의거하여 익사한 수군의 가족에게 쌀과 콩 네 섬을 지급하고 3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였다. 그리고 1425년(세종 6) 12월에는 좀 더 세분화하여 ‘육지와 해상으로 방어하러 나갔다 병을 얻어 사망한자(水陸赴防因病身死者)’, ‘공무로 배를 타고 가다 익사한 자(公行船溺死者)’, ‘육지와 해상의 전쟁에 서 사망한 자(水陸戰亡者)’에 대한 면세 규정을 각각 ‘복호(復戶) 1년’, ‘복호 3년’, ‘복호 5년’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1440년(세종 22) 6월에는 북쪽 변방 지역에서 척후 활동을 하다 피살되거나 사로잡힌 자에 대해서도 전쟁터에서 죽은 군사의 예에 따라 쌀과 콩 각각 세 섬을 주고, 5년 한도 내에서 복호하도록 하였다. 또한 포로가 되어 돌아올 가망이 없는 자에게는 공무로 인하여 익사한 선군의 예에 따라 쌀과 콩 각각 두 섬을 주고 3년 동안 복호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공무를 시행한 것은 아니지만 적과 인접한 지역에서 농사일하거나 집에 있는 중 피살된 자도 1년에 한하여 복호하고 쌀과 콩을 한 섬씩 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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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적과 대치한 변방의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구휼 정책은 1443년(세종 25) 8월에 ‘공무(公務)’ 일반으로 확대되어, 공무로 인해 죽은 사람 역시 수군의 예에 따라 쌀과 콩을 두 섬씩 주고 3년 동안 복호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규정들은 『경국대전』에 이르러 병전(兵典) 복호조(復戶條)에 “공무로 인하여 사망한 자는 3년에 한하여 복호한다. 전사자는 5년에 한하여 복호한다.”로 규정되었다.

한편,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공무를 수행하다 사고로 죽었을 경우 시신을 가족에게 온전히 보내주는 것도 국가의 주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당시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는 먼 길만큼이나 사고도 많았으며 중간에 병자나 사망자가 생겼을 때에 이를 처리하기 어려워 방치하는 경우가 잦았다. 1425년(세종 7) 4월에 만든 다음과 같은 절목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252)『세종실록』 권28, 세종 7년 4월 갑인.

1. 구호하고 치료하여도 즉시 차도가 없으면 신실한 자를 가려 환자를 맡겨서 서서히 데리고 따라오게 할 것이며, 그 오고 가는 중간에 죽은 자는 종사관(從事官)을 시켜 참인가 아닌가를 잘 살펴서 튼튼히 매장하고 푯말을 세울 것.

1. 얼음이 얼어서 매장할 수 없거든 군인을 뽑아 시체를 그의 본집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요동으로 나아가는 길에 죽은 사람은 시체를 단단히 싸고 묶어서 높은 나무에 매달았다가, 회정해 돌아오는 길에 가져오게 할 것.

1. 종사관이 만약 친히 살피지 아니하고 명맥이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 자를 죽었다고 하여, 혹 매장하든지 혹 싸서 묶었든지 하였다가 뒤에 사실이 드러나면 법률에 의하여 논죄할 것.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 병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전체 일정 때문에 버려두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엄중히 문책하고, 시신을 임시로 매장하고 돌아올 때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조선 초기 북방의 국경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때에도 사망 군인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1438년(세종 21) 2월에는 국경에서 전사하거나 병사한 자가 있으면 시신을 찾아서 메고 돌아오게 하고, 만일 시체를 보고도 버렸다거나 시체를 찾아보지도 아니하고 돌아온 자는 같은 대(隊)의 소패(小牌)·패두(牌頭)로부터 주장(主將)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에서는 전쟁이나 공무로 사망한 자의 시신을 최대한 수습하여 가족에게 보내주는 것을 주요한 의무로 간주하였다.

마지막으로 죽은 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거행하는 제사를 살펴보자. 조선 초기부터 국가에서는 종실과 2품 이상의 대신이 죽으면 제문과 찬품(饌品)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지만 3품 이하의 경우엔 부의(賻儀)만 내려주고 조휼(弔恤)하지 않았다.253)『세종실록』 권23, 세종 6년 3월 무인. 그런데 1432년(세종 14) 6월에 이르러 3품 이하의 군관과 군민이 공무로 인하여 죽으면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254)『세종실록』 권56, 세종 14년 6월 갑오. 아울러 동년 9월에는 4품 이하의 관리를 치제하는 제문을 만들도록 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진실로 몸을 맡겨 절개를 나타내야 하며, 임금이 아랫사람을 친애하는 데는 마땅히 정의(情誼)를 표현하여 공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니, 죽고 삶으로써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신민은 국사에 종사하기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힘쓰며 국사를 견고히 할 것을 걱정하고 한가할 겨를이 없으며, 혹은 전진(戰陣)에 앞장서고, 혹은 행역(行役)에 바쁘게 힘써야 한다. 그런데 일체 공사(公事)로 죽게 된 사람에게 조휼하는 도리가 미진한 점이 있으므로, 내가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선왕의 제도에는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근로(勤勞)하면 제사 지냈으니, 진실로 성대한 은전(恩典)이었다. 지금부터는 공사로 인하여 변고를 만나 죽은 사람에게는, 3품 이상의 관원에게 특별히 치전(致奠)을 행한 것을 제외하고 4품 이하의 관원으로부터 군인·백성에 이르기까지도 소재관으로 하여금 즉시 부의를 후하게 하고, 치제하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 내가 측연(惻然)히 여기는 뜻에 맞게 할 것이다. 삼가 맑은 술과 많은 제수(祭需)를 갖추어 제사의 의식을 행하게 하니, 혼령이 어둡지 않거든 임금의 마음을 알고 이를 흠향할 것이다.255)『세종실록』 권57, 세종 14년 9월 경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몸을 맡겨 절개를 나타내고 임금은 아랫사람에 대해 정의를 표현하고 공을 기록해야 하였다. 그리고 고대 선왕의 제도에 목숨을 바쳐 나랏일에 힘쓴 자들을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주는 훌륭한 전례가 있음을 들어 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 여기서 개인의 죽음을 공적인 죽음으로 전환시키는 국가의 포상 기능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지위의 고하나 공로의 다소를 구분하지 않고 그 대상 범위를 공무로 확대하였기에 불의로 닥친 죽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 드러내도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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