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2. 독전과 비판
  • 독전과 선전
  • 선전
심경호

전근대시기의 전쟁에서는 선전(宣戰)을 위하여 한문 산문의 다양한 문체뿐만 아니라 한시도 활용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지은 「수나라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에게 주는 시(與隋右翊衛大將軍于仲文)」는 좋은 예다.282)『동문선』 권19, 「여수우익위대장군우중문(與隋右翊衛大將軍于仲文)」. 이 시는 1478년(성종 9)에 서거정(徐居正)·양성지(梁誠之) 등이 왕명을 받아 『동문선』을 편찬할 때 아마도 중국 역사서인 『수서(隋書)』 「우중문전(于仲文傳)」에서 발췌하여 수록한 것 같다. 을지문덕은 612년(영양왕 23) 평양성 근처까지 쳐들어온 수나라 장군의 기를 꺾으려는 의도에서 이 시를 지었다.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 神策究天文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 妙算窮地理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 戰勝功旣高

만족함을 알아 그치기를 바라노라 / 知足願云止.

수나라는 북방의 돌궐을 분단하여 지배하에 둔 뒤 요동 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598년부터 614년 사이에 네 번이나 침략하였다. 612년에는 수 양제(煬帝) 자신이 2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우중문은 기병을 뽑아 압록강을 건너 번번이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이 시를 우중문에게 보냈다. 우중문은 답장을 보 내어 설득하였다고 하는데, 그 답장은 전하지 않는다. 을지문덕은 목책(木柵)을 태우고 기회를 보았다. 우중문과 함께 온 우문술(宇文述)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였는데, 우중문의 지시로 살수까지 들어 왔다. 612년 7월에 을지문덕이 이끈 고구려군은 수나라 30여만 대군을 청천강에서 궤멸시켰다. 그 뒤로도 수나라는 3차, 4차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내란과 농민 반란으로 수 왕조 자체가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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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1569∼1618)은 이 시가 과연 을지문덕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을지문덕 스스로 이 시를 짓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그의 기백을 잘 담아내었음에 틀림없다. 시의 마지막 구는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란 말에서 따온 것으로, 만일 만족함을 모르고 그칠 줄을 모른다면 이 전쟁에서 욕을 보고 위태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았다.

한편, 전쟁에서 선전의 도구로 가장 많이 활용된 것은 격문(檄文)이다. 『문심조룡(文心雕龍)』 「격이(檄移)」에 ‘격이란 교(皦)’라고 하였다. 목판에 써서 선포하므로 명백히 한다는 뜻의 교(皦)라고 풀이한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에는 제후가 주(周)나라 천자의 윤허 없이 군사를 내면서, 위신을 높이고 적을 성토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 뒤 격이의 문체는 선전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라고 불리는 1812년의 평안도 농민 봉기에서도 봉기군은 격문을 발하였다.283)심경호, 『한문 산문의 미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6, 411∼413쪽. 그때의 격문은 한글로 적은 것도 있었으나 현재는 한문으로 적은 것만 전한다. 내용은 점령 지역 안의 군수 등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사료(史料)에 따라 조금씩 글자가 다르다. 『홍경래동란기(洪景來動亂記)』에 실려 있는 격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곽산(郭山)의 진사 김창시(金昌始)가 지었다고도 전한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가 급히 격문을 발하니, 우리 관서(關西)의 부로(父老), 자제, 공사(公私)의 천민은 모두 이 격문을 들어라. 대개 관서는 성인 기자(箕子)가 다스리던 옛 구역이자, 단군이 거처하시던 옛 굴이 있는 곳이다. 의관(衣冠)의 문화가 널리 퍼져 있고 문물은 찬란히 빛난다. 임진년(1592)의 왜란에 이미 조선을 재조(再造)하는 공이 있었고, 또 정묘년(1627)의 후금(後金)의 변에는 양무공(襄武公) 정봉수(鄭鳳壽)와 같은 충의를 다할 수 있었다. 돈암(遯菴) 선우협(鮮于浹)의 학문과 월포(月浦) 홍경우(洪儆禹)의 재능도 또한 서토(西土)가 낳은 것이다. 그렇거늘 조정은 서토를 내버리기를 썩은 흙과 다름 없이 하였다. 심지어는 중앙 권력가의 노비까지도 서토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서토 사람이 어찌 억울하고 화가 나지 않겠는가.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지하고, 과거 시험 때에는 반드시 서토 사람의 문장을 사용한다. 400년 이래에 서인이 조정을 실망시킨 것이 무엇이 있는가. 현재 어린 왕이 재위하시어, 권간(權奸)은 나날이 횡포가 심하다. 김조순(金祖淳)이나 박종경(朴宗慶)의 무리가 국권을 몰래 농락하고 있다. 어진 하늘도 재앙을 내려서 겨울에 우레가 친다든지 땅이 흔들린다든지 하게 하며, 혜성이나 바람과 우박은 없는 해가 거의 없다. 이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나지 않는 흉년이 자주 일어나고 굶어죽은 자가 길에 널렸고 노약자는 구렁에 묻히고 생민이 다 없어지는 사태가 지금 당장이라도 있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천강 이북의 선천 검산 일월봉 기슭의 군왕포에 있는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부터 신령하였고, 다섯 살에는 신승(神僧)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장성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땅 여연(閭延)에 은거하여, 다섯 해 되어서 황명(皇明)의 옛 신하들과 남은 자손들을 통솔하여 철기 10만으로 마침내 동국을 맑힐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관서 땅은 풍패(豊沛)의 고향(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뜻)이어서 차마 짓밟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선 관서의 호걸들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구원케 하니, 기의군(起義軍)의 깃발이 가는 곳마다 소생하지 않는 곳이 없도다. 이 격문으로 우선 여러 고을과 군수에게 논하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크게 열고서 우리 군사를 맞이하라. 만일 완고하게 거부한다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짓밟아 버리겠으니, 모름지기 명령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격문을 안주의 병사·우후·목사, 숙천 부사, 순안 현령, 평양의 감사·중군·서윤, 강서 현령, 용강 현령, 삼화 부사, 함종 부사, 증산 현령, 영유 현령에게 내리노라.

이 격문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평안 도민의 울분을 토로하였고, 홍경래를 ‘세상을 구제할 성인’으로 부각시키는 한편, 농민군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명나라를 대대로 섬긴 신하의 후손’이라 일컬었다. 격문의 첫머리에서는 공노비와 사노비에게까지 참가를 호소하였다. 실제로 당시의 농민 봉기에는 농민들과 몰락 양반층, 심지어 역노 출신으로 향안(鄕案)에 들려 하였던 인물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민중 운동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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