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3. 전쟁의 기록과 소설적 변용
  • 사실의 보고
심경호

국문학에서 기록성(記錄性)은 시와 산문이 함께 떠맡았던 주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실기(實記)의 부류는 문학적인 비유나 수사를 사용하지 않고 견문이나 체험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곧, 실기는 전란의 체험자가 실제 경험을 술회하는 형식인데, 전란의 경과나 전란 뒤의 일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는 한편, 참고 자료를 모아 참상을 절실하게 보고하고 개탄하는 마음을 담아 낸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겪으 면서 만들어진 실기는 대부분 편년체(編年體)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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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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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기록한 실기로는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이노(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瑣尾錄)』, 유진(柳袗)의 『임진록(壬辰錄)』, 조정(趙靖)의 『임란일기(壬亂日記)』,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정암(李廷馣)의 『서정일록(西征日錄)』, 유정(惟政)의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291)『분충서난록』은 신유한(申維翰)이 유정의 원 기록과 유정의 행적을 적은 『지봉유설』, 『난중잡록』, 『오순지』 등을 참고하여 저술하였다.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 김용(金涌)의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김개(金沔)의 『송암실기(松菴實記)』 등이 있다. 한편, 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십사의사록(十四義士錄)』은 밀양 박씨 가문에서 『충의록(忠義錄)』과 『박씨충의록(朴氏忠義錄)』을 토대로 편집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경북 청도에서 창의한 박경신(朴慶新)의 부자, 형제, 조카 등 밀양 박씨 14명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박경인(朴慶因)의 『조전일기(助戰日記)』와 박경전(朴慶傳)의 『창의일기(倡義日記)』 등은 독립된 책으로 유포되지는 않았으나, 청도 지역의 의병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각 가문마다 이러한 실기류가 상당히 많이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에 관련한 실기류 가운데는 독립된 책으로 유포되지 않은 것도 많다. 곽재우(郭再祐)에게 군량미를 조달한 정희맹(丁希孟)의 「선양정임란일기(善養亭壬亂日記)」와 선산 부사를 지낸 정경달(丁景達)의 「반곡난중일기(盤谷亂中日記)」, 16세의 젊은이로서 일가족의 피난 사실을 적은 정영방(丁榮邦)의 「임진조변사적(壬辰遭變事蹟)」 등이 그러한 예다. 이 가운데 정희맹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들 경(鏡)과 건(鍵)을 근왕병(勤王兵)으로 보내고, 자신도 강항(姜沆) 등 50여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향을 지켰다. 또 곡창 지대인 영광에서 많은 군량미를 모아 광주의 고경명(高敬命)과 영남의 곽재우에게 조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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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
『쇄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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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 일본에 정착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는데, 우여곡절 끝에 귀환한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292)소재영, 「임란과 피로 일기」, 『임진왜란과 문학 의식』, 한국 연구원, 1980 ; 김태준, 「임진왜란과 국외 체험의 실기 문학」, 『임진왜란과 한국 문학』, 민음사, 1992 ; 이채연, 『임진왜란 포로 실기 문학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 이채연, 『임진왜란 포로 실기 연구』, 박이정, 1995 ; 이혜순, 「수은 강항의 시적 사유와 그 의미」, 『한국 한문학 연구』 27, 한국 한문학회, 2001.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 정희득(鄭希得)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정경득(鄭慶得)의 『만사록(萬死錄)』, 정호인(鄭好仁)의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가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간양록』은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러한 책들을 읽어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기본적인 시각을 형성하였다.

병자호란 뒤에도 많은 기록 문학이 나왔다. ‘병자록(丙子錄)’ 계열은 대표적인 예다. 곧,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 석지형(石之珩)의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남이웅(南以雄)의 『병자일기』 등이 있다.

전쟁은 인간적 가치를 말살하는 흉포성을 드러낸다. 조정의 『임란일기』와 이탁영의 『정만록』에도 그러한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가의 재물을 거두고는 곧 불을 지르며 사로잡은 여인은 뭇놈들이 윤간하는 꼴이 마치 개와 같다고 한다. 간음을 한 뒤에는 약탈한 물건을 나누어 주니 추잡한 계집들은 주는 물건에 눈이 어두워 짐짓 쫓아다니고 떨어져 나오려 하지 않는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의 변함이 이에 극도로 변하고 말았다. 한 나라의 간난(艱難)이 어떻게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느냐.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는다.293)조정, 『임란일기』, 1592년 5월 5일.

여자 하나를 잡으면 30∼40여 명이 서로 윤간하여 죽게 한다고 한다. 서책을 찢어서 더러운 것을 닦는다고 하며, 장독에다 방뇨하여 사람에게 먹도록 한다니 그 소행을 어찌 다 말로 하랴. 이런 욕을 보이는데도 천벌을 내리지 않는가. 몸이 늙었음을 원망하며 통곡할 뿐이다.294)이탁영, 『정만록』, 1592년 7월 7일.

전쟁의 상황은 기존의 가치를 전도시켜 버린다. 평소 전통 가치를 존중하던 사람도 지극히 비굴해지거나 상층의 인물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일도 많았다. 여성들 가운데는 정절을 버리고 왜군에게 매춘을 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일상의 삶을 파괴당하고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적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겪었다. 다음은 『월봉해상록』의 「해상일록」에 나오는 내용으로 왜적의 내침 사실이 전해진 1597년(정유) 8월 12일부터 칠산 앞바다에서 적선을 만나는 9월 27일까지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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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해상록』
『월봉해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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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왜적이 두 번째 내침한다는 소문을 듣고 호남의 인심이 흉흉하여,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두 가지 의논이 있었으나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나는 곧 어버이를 모시고 가속을 거느려 지고 메고 하여 길을 떠났다. 19일, 영광(靈光) 대안촌(大安村) 앞에 이르러 의논을 달리했다. 거룻배를 하나 구해 배에 올랐다. ······ 9월 15일, 온 식구가 구수포(九峀浦)에서 배에 올랐다. 16일, 뭍의 왜병이 우리를 보고 총을 쏘았지만 배가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때 척숙 정돈(鄭燉)과 족형 절, 그리고 심화백(沈和伯)과 권사위(權士偉)의 두 척숙과 오굉(吳宏) 어른이 우리 일가족과 함께 배에 올랐다. 17일, 새벽에 배를 띄웠다. 서쪽으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 임병도의 법포(法浦) 앞바다에서 배를 돌렸다. 18일, 재원도(載元島)에 옮겨 대었으나 풍랑이 막혀 머물고 배에 오르지 못하였다. 27일, 칠산(七山) 앞바다에 이르러 갑자기 적선을 만났다. 왜장의 이름은 삼소칠랑(森小七郞)이다.295)정희득, 『월봉해상록』, 「해상일록」.

강항은 왜적에게 납치되어 갈 때 조카가 죽임을 당하게 된 전말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중형의 아들 가련(可憐)은 나이가 여덟 살인데 주리고 목말라서 짠 소금물을 마시고 구토 설사하여 병이 나자 적이 물속에 던지니,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도록 끊어지지 아니하였다.296)강항, 『간양록』, 「섭란사적」, 정유년 9월 24일.

한편, 남이웅의 부인 남평 조씨(南平曺氏)는 병자호란 때 충청도 일대를 전전하는 4년 동안 실제 경험하고 보고들은 일을 『병자일기』로 적었다.297)박경신, 「병자일기 연구」, 『국어 국문학』 104, 국어 국문학회, 1990 ; 전형대·박경신, 『역주 병자일기』, 예전사, 1991. 1636년(병자) 12월부터 1640년(경진) 8월까지의 한글 기록으로, 당시 조씨는 예순을 넘긴 나이였다. 세 아들을 잃고 남편마저 청나라로 잡혀간 상황에서 더러는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가슴에 서린 한(恨)을 절절히 써 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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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간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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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강화도와 관련된 실기로는 남급(南礏)의 『강도록(江都錄)』, 나만갑의 『병자록』, 이형상(李衡祥)의 『강도지(江都志)』, 정양(鄭瀁)의 『강도피화기사(江都被禍記事)』 등이 있다. 나만갑의 『병자록』은 10여 종 이상의 이본이 전할 정도로 널리 읽 혔다. 이 밖에 별도로 유포되지 않고 문집 속에 들어 전하는 실기류로는 어한명(魚漢明)의 『강도일기(江都日記)』, 김창협(金昌協)의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윤선거(尹宣擧)의 『기강도사(記江都事)』, 조익(趙翼)의 『병정기사(丙丁記事)』 등이 있다.298)정환국, 「병자호란 시 강도(江都) 관련 실기류 및 몽유록 : 강도의 참화(慘禍)를 중심으로」, 『한국 한문학 연구』 23, 한국 한문학회, 1999, 107∼132쪽.

『강도록』은 도성에서 강도까지의 피난 과정, 강도의 함락과 참화, 책임자 및 관련자들의 실책과 망동 등을 서술하였다. 『강도피화기사』는 작자 자신과 가속(家屬), 그리고 강도의 백성이 겪은 병자호란의 참상을 기록하였다. 『강도지』는 강화도의 인문 지리에 관한 사항들을 정리한 책인데, 그 가운데 「병정록(丙丁錄)」은 병자호란 당시 강도의 상황을 기술하면서 다른 기록을 적절히 취합하고, 남한산성의 사정까지 함께 적어 두었다. 『강도일기』는 수운 판관(水運判官) 어한명이 봉림 대군(鳳林大君)을 도강시킨 일을 기록하였다. 『강도충렬록』은 병자호란 때 강도에서 순국한 인물들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강도록』과 『강도일기』 등은 빈궁(嬪宮), 봉림 대군, 인평 대군(麟坪大君), 원손(元孫, 소현세자의 아들)이 피난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적고,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부검찰사 이민구(李敏求),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들이 강도 수비와 빈궁 일행의 보호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들을 규탄하였다. 김경징은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도에 호종했던 영의정 김류(金瑬)의 아들인데, 통진(通津) 나루터에 도착해서는 가속들만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으므로 빈궁과 원손은 이틀 동안이나 통진 나루에서 추위에 떨어야 하였다. 『강도일기』의 기록은 이러하다.

나(어한명 자신)는 곧장 그 사람을 따라가 그(김경징)를 만나 보았는데, 한참을 이야기했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하늘을 쳐다보고 휘파람을 부는가 하면 부채를 들고서 흔들며 말하기를, “무엇을 어찌하겠소, 무엇을 어찌하겠소?”라고만 할 뿐이었다. 조금 후 덕포 첨사(德浦僉使) 조집이 배를 타고 오자 그는 기쁜 얼굴로, “이 사람이 타고 온 배는 필시 튼튼할 것이니, 우리 가속을 태워 건넬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김경징은 강도에 들어간 뒤에도 술로 흥청망청하였다. 게다가 강화 북단 연미정(燕尾亭)과 갑곶 주변에는 초병이 아예 없었다. 적이 도강할 무렵 대포를 쏘려 했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발사할 수도 없었고, 병기를 일일이 장부에 기록하고 내주느라 시간을 다 뺏기고 말았다. 예조 참판 여이징(呂爾徵)과 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성이 함락되자 옷을 고쳐 입고 적에 항복하였는가 하면, 전 영의정 윤방(尹昉)은 적이 강화를 요구하자 성문을 열어 주고 말았다. 『강도록』은 강도성이 함락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적이 성 밖에 이르러 속이며 하는 말이,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우호를 맺기 위함이다. 듣자 하니, 지금 정승께서 성 안에 있다 하는데, 나와서 우리말을 들어라.”고 하였다. 이에 윤방이 바로 나가 그들을 만났다. 적들은 “화약(和約)의 일을 성 안에 들어가 의논해야 하니, 속히 성문을 열고 우리 군대가 오른쪽에 위치하고 귀국 군대는 왼쪽에 위치하여 서로 상의하여 화약을 맺자.”고 하였다. 윤방은 하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맞아들여 약속한 대로 군대를 양쪽에 정렬시켰다. 얼마 후 빈궁과 두 대군을 윽박질러 오게 하였다. 급기야 적의 병사들은 멋대로 성 안을 노략질했다. 집채는 불타고 망루는 부서졌으며, 적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행궁은 화염에 휩싸였다. 유격병이 사방에서 노략질을 하니, 섬 전체가 어육(魚肉)이 되었다.

청나라 군대는 강도의 성 안으로 밀려들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살육을 모면한 사람들도 줄줄이 묶여 나갔으며, 머리를 나란히 한 해골이 산에 쌓였다. 앞에서 잡아당기고 뒤에서 몰아 마치 양 떼를 몰 듯이 하였다. 요행히 죽음을 면한 자들은 백에 한둘 뿐이었는데, 부모를 잃은 아이, 아내를 잃은 남편, 그 아픔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빈궁 일행은 이미 적의 포로가 되었고, 원손은 다시 주문도(注文島, 석모도 서쪽에 위치한 섬)로 피신해야 했으며, 무고한 백성은 해골이 되어 산야를 덮었다.

한편, 정양은 『강도피화기사』에서 강화 전역이 적에게 함락되어 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정양은 본시 통진에 거처하다가 적을 피해 강화로 들어갔으나, 작은 섬을 제외한 강화 전 지역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정양 일가는 다른 섬으로 피신하기 위해 한밤중 마니산 부근 해변으로 달려갔다. 해변은 이미 피난민들로 가득하였는데, 한겨울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배라고는 한 척밖에 없었다. 그 배마저 바닷물이 빠지자 갯벌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날이 밝아올 때 산으로 피신하려 하는데, 적의 기병이 날듯이 배를 향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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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북문
남한산성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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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과연 수십 기의 적이 배를 향해 날 듯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배에 가득 찼던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도망가는데,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생각이었으나 바다까지는 아직 100보 남짓이나 남았다. 적병은 이미 돌진해 들어와 날쌔게 약탈을 자행하였다. 어제 다리까지 빠졌던 갯벌이 지금은 추위로 얼어붙었으니, 마치 하늘도 적을 도와주는 격이었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제수와 아내는 달아나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목을 베어 자결을 시도했다. 그 흐르는 피가 목을 덮고 얼굴을 가려 마치 희생에 쓸 소를 잡는 곳 같았다. 나도 그 칼로 세 번이나 찔렀으나, 죽지 못했다. 적이 배에 올라와서는 내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다섯 발의 화살을 쏘아 해를 입혔다.

정양과 그 아내는 용케 죽음을 면하였지만, 많은 무고한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어느 궁녀가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산성일기(山城日記)』는 병자호란의 치욕과 남한산성에서의 항쟁 사실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였다. 도입부에서는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가 명나라로부터 용호 장군(龍虎將軍)이라는 이름을 받는 데서 시작하여 47년간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그 뒤로는 전쟁이 일어난 1636년 12월 12일부터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의(靑衣)를 입고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48일 동안의 일을 적었다. 종결부에서는 그 이후 3년간의 사실을 짧게 요약하였다. 1636년 12월 27일부터 28일까지의 기록에는 근왕(勤王)의 구원병이 오지 않아 김류가 패한 사실이 자세하게 나온다. 심기원(沈器遠)은 패하여 양근(楊根)으로 퇴각하였고,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는 근왕병을 이끌고 광주까지 왔으나 패하여 산성으로 오지 못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시대에 발생한 가장 혁명적인 민중 운동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도전은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관군에게 진압되었다. 이 홍경래의 난을 배경으로 하는 실기류로 『진중일기(陣中日記)』, 『가산순절록(嘉山殉節錄)』, 『서정일기(西征日記)』 등이 있다.299)홍경래의 난에 관한 사료로는 그 밖에 『순조신미별등록(純祖辛未別謄錄)』,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 『임신평란록(壬申平亂錄)』, 『신미기사전말(辛未記事顚末)』, 『공문등록(公文謄錄)』, 『일승(日乘)』, 『서적변출후조지일기(西賊變出後朝紙日記)』, 『신임기년제요(辛壬紀年提要)』,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 『정초집략(征剿輯略)』 등이 있다. 한편, 정만석(鄭晩錫)의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은 평안 감사였던 그가 작성한 『계첩기략(啓牒記略)』을 근거로 편집된 일차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보사(報辭·査報)와 죄인들의 초사(招辭), 문목(問目)과 이를 토대로 한 최종 판결인 정만석의 발사(跋辭)를 모은 것이다. 발사 뒤에는 죄인들의 공초에서 드러난 관련 인물들의 명단을 나열하여 적었다. 1861년(철종 12)에 간행된 것 으로 추정되는 한글 소설 『신미록(辛未錄)』(일명 『홍경래전』, 『홍경래실기』)은 그러한 실기류를 참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300)노성미, 『홍경래 전승의 양상과 변이 연구』, 경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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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영진도(巡撫營陣圖)
순무영진도(巡撫營陣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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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일기』는 1811년 12월 18일 홍경래가 평안도 가산(嘉山)·곽산(郭山)에서 군사를 일으킨 날부터 이듬해 6월 20일까지 농민군을 토벌하는 과정을 적은 관군 측 기록이다. 일기와 각종 장계(狀啓), 왕의 지령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평안도 지역 주민들이 겪었던 기근의 참상, 농민군의 주모자와 참가층, 관군과 의병의 진용, 의주성 공격의 전황 등을 자세히 적었다. 당시 의병으로 활약하였던 현인복(玄仁福)이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301)현인복의 후손인 현은우(玄殷愚)가 소장한 사본 2책을 등사한 것을 1964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서정일기(西征日記)』와 합편하여 『한국 사료 총서』 제15집으로 간행하고, 1986년 여강출판사에서 『한국 민중 운동사 자료집』 제2권으로 간행하였다.

『가산순절록』은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가산 군수 정시(鄭蓍)와 그 아버지 정로(鄭魯) 및 아우 정질 등 3부자의 충절 기록과 국가에서 포상한 사적 및 여러 사람의 애도문·만시 등을 모아 엮은 책이다.302)3권 3책. 1928년 정시의 현손 정두용(鄭斗容)과 삼종손 정오영(鄭五永) 등이 간행했다. 박의동(朴儀東)·김하용(金夏容)의 서문과 정두용과 정오영의 발문이 있다.

『서정일기』는 서정군(西征軍) 좌초관(左哨官) 방우정(方禹鼎)의 종군 일기로, 표지 서명은 ‘방휘재서정기(方暉齋西征記)’다. 홍경래의 가산 기병 보고가 서울에 이른 다음 날인 1811년 12월 22일부터 적기 시작하여 서정군이 정주성을 회복하고 이듬해 5월 초에 남대문으로 입성, 돈화문에 이르러 대신 이하 2품관 이상의 축하를 받고 귀가하는 데서 끝맺었다. 관군과 홍경래군의 동태를 적고, 순무사(巡撫使)의 장계와 청나라와 주고받은 공문서 등 그날그날의 사건을 직필로 기록하였으며, 부근 수령들과의 서간 내왕 등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이러한 관군 측의 실기류는 전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진압군으로 출병한 장수들의 공과에 대해 구체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홍경래의 거병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구한말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과 대결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은 강화 사기리에 거처하면서 두 차례의 양요를 직접 경험했을 뿐 아니라 병인양요 때 조부 이시원이 순국한 사실이 있었다. 이건창은 양요 때 순국하였거나 충절을 다한 인물들을 위하여 기록을 남겼다. 「공조판서양공묘지명(工曹判書梁公墓誌銘)」, 「진무중군어공애사(鎭撫中軍魚公哀辭)」 및 「애사후서(哀辭後書)」, 「이춘일전(李春日傳)」의 세 편이 그 예다.303)이희목, 「영재 산문에 나타난 ‘조선유인’의 정신 : 병인·신미양요 관련 산문을 중심으로」, 『한국 한문학 연구』 23, 한국 한문학회, 1999, 133∼150쪽 ; 심경호, 『강화학파 : 실심 실학의 계보』, 돌베개, 2006, 강화학 제6기 이건창 참조.

「공조판서양공묘지명」은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우부 천총 양헌수의 묘지명이다. 1866년 프랑스의 로즈(Roze, Pierre Gustave) 해군 제독은 제1차 조선 원정(9월 18일∼10월 1일)을 단행하여 군함 3척에 총병력 200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의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와 정찰하고 지도 3장을 만들었다. 이어 제2차 조선 원정(10월 11일∼11월 21일) 때는 군함 7척, 함대포 10문, 총병력 1,0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10월 14일에는 갑곶진에 상륙하고, 10월 16일에는 강화부를 무혈점령하였다. 강화 해협과 한강 수로의 입구를 프랑스군이 봉쇄하여 도성으로 들어오는 세미(稅米)와 생필품 수송이 중단되자, 조선 조정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였다. 대장은 이경하(李景夏), 중군은 이용희(李容熙)였고, 양헌수는 천총이었다. 양헌수는 11월 7일에 그믐밤을 틈타 500여 병력을 이끌고 강화 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에 진입하였다. 프랑스군은 다음 날 150여 명을 급파하였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고전하다가 3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갑곶진의 본대로 퇴각하였다.

이건창은 양헌수의 막부에서 종사한 일이 있어서 양헌수의 선전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양헌수는 통진에 진주한 중군에게 출전을 종용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사를 이끌고 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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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 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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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춘일전」은 강화읍 남성의 수문장으로 자원하였던 강화 사람 이춘일의 전기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에 상륙하고 관군은 달아난 뒤, 이춘일은 남성에서 술을 마시고는 홀로 적개심을 불태웠다. 적들이 그를 칼로 찌르자 술기운이 부글부글 뱃속으로부터 나왔으며, 죽을 때까지 적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진무중군어공애사」와 「애사후서」는 신미양요 때 광성진(廣城鎭) 전투에서 전사한 어재연(魚在淵)의 사실을 다루었다. 광성진에서 아군이 패하고 무사장(武士將) 유예준(劉禮俊) 등 10명이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돌아오자, 이건창은 어재연이 전사한 소식을 듣고 애사를 지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대신들의 추천으로 어재연은 진무 중군으로 광성진에 부임하였고, 부임한 지 9일 만에 미국 군사가 쳐들어왔다. 포탄이 사방에서 작렬하였지만 어재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경영병(京營兵)이 달아난 뒤 백병전을 벌이게 되자, 어재연은 천총 김현경(金鉉暻)과 함께 피거품을 물고 500여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은 동생 어재순(魚在淳)과 함께 전사하였다. 「애사후서」는 포탄이 쏟아지고 피가 뿜어 나오는 곳에서 어재연이 종일 격투하였던 모습을 장렬하게 그려보았다. 그가 죽고 조선군이 궤멸되었지만 미군은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하루저녁에 물러갔다. 이건창은 저들이 그의 의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논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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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의 미국 해병
신미양요 때의 미국 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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