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4. 전쟁 경험의 재해석과 상징화
  • 민족 공동 전쟁 체험 의식의 형성
심경호

전쟁은 후대의 인물들에 의하여 공동의 경험으로 추체험되면서 민족주의적 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병자호란의 종결과 관련하여 척화(斥和)와 주화(主和)의 정책 대립이 있었지만, 그 두 계보를 잇는 지식인들은 어느 경우나 모두 절의를 가장 보편적인 이념으로 인정하였다. 특히,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전근대시기의 민족주의로서 널리 공유되면서 절의론은 더욱 이념적 성격을 굳혀 갔다.

조선과 청나라의 긴장 관계를 경험한 지식인들은 조선의 자존 의식을 고취하려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이를테면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 「조전횡문(弔田橫文)」319)정두경, 『동명집(東溟集)』, 「조전횡문(弔田橫文)」. 시에서 전국시대에 전횡(田橫)과 그 무리 500명이 자결을 택한 것을 찬양하면서 병자호란 때 항복에 급급했던 위정자들과 대비하여 후자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실질 능력이 없으면서 외적과의 대결을 호언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기에, 송시열(宋時烈)의 존화(尊華) 의식과 북벌론(北伐論)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은 병자호란 뒤 비판적·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진 공통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두경은 선천·곽산·정주 3군의 병사가 후금과 맞서 싸웠던 평안북도의 능한산성(凌漢山城)에 갔을 때 다음 시를 지었다.320)정두경, 『동명집』, 「등릉한음주(登凌漢飮酒)」 3수 가운데 제2수. 「능한산성에 올라 술을 마시며(登凌漢飮酒)」 3수 가운데 제2수다.

산세는 우뚝하고 지세는 외로운 곳 / 山勢崚嶒地勢孤

시야가 드넓은 중원을 내리깔아 보네 / 眼前空濶九州無

누대는 동해에 임해서 해오름이 보이고 / 樓看赤日東臨海

성은 청천에 닿아 북녘 오랑캐를 막는다 / 城到靑天北備胡

사또가 대장을 겸하였으니 축하할 일 / 共賀使君兼大將

일개 병졸로 천 명 막을 일조차 없도다 / 何勞一卒敵千夫

억센 고래 사라져 바다가 평안하니 / 鯨鯢寂寞風濤穩

주작문(남문) 열어둔 채 모두 술에 취했군 / 朱雀門開醉酒徒.

정두경은 능한산성의 지형을 묘사하고 누대나 성의 높이를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적개심을 떨쳤다. 산성에 올라 중국의 전 국토가 없는 듯 내리깔아 본다고 한 표현은 기개가 늠름하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성기가(成己歌)」에서,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왕검성을 근거로 마지막까지 대항하다가 매국노의 손에 죽은 성기를 애도하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악부체를 본떠서 다섯 편을 짓는다(觀東史有感效樂府體五章)」라는 제목의 5수 가운데 한 수다.321)안정복, 『순암집(順菴集)』 권1, 「관동사유감효악부체오장(觀東史有感效樂府體五章)」, 「성기가(成己歌)」.

한나라 황제가 함부로 멀리 침략하려 들어 / 漢皇黷武思遠略

우리나라 하늘에 살기가 까맣게 뻗쳤다 / 箕東殺氣彌天黑

누선장군 양복은 돛 걸고 요수를 내려오고 / 樓船卦帆下遼海

좌장군 순체는 갈석 땅부터 말을 달려 / 左將躍馬由碣石

고을마다 찢기고 왕도도 기울건만 / 諸縣幅裂王都傾

분분하게 나라를 팔자는 역적들뿐이었네 / 但見紛紛賣國賊

나라의 안위가 대신에게 달리자 / 安危却有大臣在

피눈물 쏟으며 외로운 성 지켰나니 / 沫血飮泣守孤城

외로운 성의 형세 머리칼에 매달린 듯 위급할 때 / 孤城勢急危如髮

한번 죽기를 터럭보다 가벼이 여겼다 / 到此一死鴻毛輕

패수는 넘실넘실 흐르고 / 浿水流洋洋

왕검성 아스라이 높아라 / 王儉高嶔嶔

성기의 큰 이름이 이제도 남았거늘 / 成己大名留至今

반란했다 죽였다 기록함은 무슨 의리냐 / 書反書誅是何義

역사가가 붓 잡아 기록법을 그르쳤군 / 史臣秉筆迷書法.

한나라 무제는 흉노가 고조선과 연합하는 것을 막으려고 사신 섭하를 고조선에 보냈다. 당시 고조선은 이른바 위만 조선 시기였다. 섭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다가 고조선 장수를 살해하고 도망하여 그 공으로 요동군동부도위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고조선은 섭하를 살해하여 보복하였다. 그러자 기원전 109년 가을에 한나라는 육로와 해로로 고조선을 공격하여 왔다. 고조선이 왕검성에서 농성하자, 한나라는 고조선 지배층을 매수하여 분열시키는 계략을 썼다. 그 결과인지 왕검성 안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조선상 역계경은 화해를 주장하다가 우거왕(右渠王)이 받아들이지 않자, 무리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震國)으로 내려갔다. 조선상 노인, 니계상 삼, 장군 왕협 등은 항복을 모의하였다. 니계상 삼은 사람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러자 성기는 사람들을 모아 끝까지 저항하였다. 하지만 왕자 장과 노인의 아들 최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성기를 살해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108년 여름에 왕검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 초의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중국 문헌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성기의 항거를 반란이라고 기록하였다. 또 왕자 장과 노인의 아들 최가 성기를 살해한 일을 역적을 죽였다고 하여 주(誅)라고 기록하였다. ‘주’란 반란자나 죄인을 죽인다는 뜻이다. 안정복은 그러한 역사 기술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하였다. 우리 역사는 우리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은 「충현사에 배알하고(謁忠賢祠)」322)서유본, 『좌소산인집(左蘇山人集)』(오사카 부립 도서관(大阪府立圖書館) 소장 필사본), 「알충현사(謁忠賢祠)」. 에서 민족 영웅들의 위업을 회상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의식을 드러내었다. 충현사는 1658년(효종 9)에 시흥현 장안동(지금의 광명시 소하동)에 강감찬(姜邯贊)·서견(徐甄)·이원익(李元翼)을 모시는 서원으로 건립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賜額)이 내린 곳이다.

금양은 이름난 옛 고을 / 衿陽古名邑

산악이 정영(精英)을 내었네 / 山嶽毓精英

지난날 고려 중엽에 / 往在麗中葉

어진 이가 우뚝 태어나 / 名賢此挺生

태사(太師)는 존양(尊攘) 의리 잡아서 / 太師秉尊攘

쏟아지는 강하(江河)를 막았나니 / 隻手障河傾

미친 칼은 북새에 걷히고 / 狂鋒斂北塞

요기(妖氣)는 동해에 오지 못해 / 昏祲豁東溟

백성들 그 혜택 입어 / 于今民受賜

문물이 법식대로 빛났네 / 文物煥章程

아아, 서 장령(서견)은 / 亦粵徐掌憲

의리 지켜 한양에 조회하지 않았으니 / 義不朝周京

천년토록 관악산은 / 千秋冠岳岑

수양산 같이 우뚝하여라 / 高與首陽幷

완평군(이원익)은 / 完平鬱匡時

선조(宣祖) 위해 내달려 성명을 보익하니 / 馳驅翊聖明

계책으로 조정 정략 넓히고 / 運籌恢廟略

군사 다스려 변경에 씩씩했으며 / 詰戎壯邊聲

중흥 대업을 거듭 도와서 / 再贊中興業

나라 안이 길이 평안하였다 / 寰區永輯寧

높은 공은 사서에 빛나고 / 嵬勳耀竹帛

맑은 이름은 해와 별처럼 밝아라 / 淸名皎日星

시대가 달라도 지취가 동조(同調)하고 / 異代可同調

길은 달라도 충정은 한결같네 / 殊途一忠貞

소요하신 사실은 아무 개울에 전하고 / 釣遊記某水

수양하신 곳은 북쪽 선영 가까이 / 托體隣北塋

공렬이 길이 보답받아 / 勞烈報永世

예에 맞는 제전(祭典)을 거행하매 / 祀典揭禮經

세 현인 나란히 흠향하여 / 三賢倂醊享

경내는 엄숙하고 청결하도다 / 廟貌肅且淸

강당에는 현송(絃誦)하는 학도들 나열하고 / 講堂羅絃歌

부엌323)‘泡(포)’는 ‘庖’의 통가(通假)이다.에는 제기(祭器)들 늘어서 있구나 / 泡序列豆鉶

나는 와서 영정을 바라보며 / 我來瞻遺躅

옷매무새 고치고 문간에서 절하고는 / 肅容奉戶扃

문지방 언저리서 예를 갖추니 / 周旋簾戺間

살아 있는 분을 대하는 듯해라 / 髣髴覿公靈

구천(九泉)서 다시 일어나 / 九原如可作

나라의 근본을 맡아 주셨으면 / 邦國賴幹楨

천년 뒤 지금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르며 / 俛仰千載下

탄식하며 깊은 생각 잠기노라 / 感歎有餘情.

서유본은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친 사적, 서견이 고려 유민으로 남은 사실, 이원익이 선조 때 왜적 격퇴에 공을 세우고 인조의 조정에 협찬한 사실이 시대는 달라도 지취는 동조라고 하였다. 현인들의 출현을 바라는 구세적 열정과 함께, 금천(시흥)의 정영을 예찬하는 지방주의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강감찬의 행적을 존양이라 한 것은 반드시 중화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청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조선 문인에게 존양은 배청자주(排淸自主)의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다.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충현사에 제사를 내린 것도 조선 조정의 자주관을 공표한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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