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4. 전쟁 경험의 재해석과 상징화
  • 전장 혹은 전승 기념물과 반성의 시선
심경호

산문 가운데 여행록에는 과거의 전쟁을 회상하는 부분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고려 말에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금강산 유람기인 「동유기(東遊記)」에는 대몽고 전쟁의 상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331)이곡, 『가정집(稼亭集)』, 「동유기」. 이곡은 1349년 8월 14일, 당시의 서울인 개성을 출발하여,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13일 동안 금강산의 여러 사찰과 명승을 유람하였고, 이어 관동 지방을 구경한 다음 개성으로 돌아갔다. 인용한 글은 8월 26일 기록이다.

8월 26일 철령관(鐵嶺關)을 넘어서 복령현에서 묵었다. 철령관은 우리나라 동쪽의 요새로 단 한 명의 군사만으로도 만 명의 군사를 막아낼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철령관의 동쪽에 있는 강릉 등을 관동이라고 부른다. 1290년에 원나라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킨, 원나라 세조의 막내 동생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哈丹) 등이 중국에서 전쟁에 패하여 우리나라로 몰려 들어와 개원 등의 여러 군에서 관동으로 쳐들어오니, 우리나라는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철령관을 지키게 했다. 적은 등주(登州) 서쪽의 여러 주에서 노략질하며 등주에 이르자, 마을 사람을 시켜 정탐하도록 했다. 그런데 나유는 정탐꾼을 보고 적이 온 줄 알고 철령관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이에 적들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밟듯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흉흉했다.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산성으로 들어가거나 섬으로 피난 가기도 했다. 다행히 원나라 군사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야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철령관의 험준함을 보건대, 이곳은 참으로 한 사람만으로도 능히 천만인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나유는 실로 소심한 사람이다.

이렇게 우리의 국토는 곳곳에 전쟁의 상흔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각 지역의 역사는 전쟁과 관계된 사례가 많아 전장(戰場)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전쟁에서 승리한 곳에는 기념비를 세우곤 하였다. 특정한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회상하면서 지식인들은 전쟁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반추하였다.

조선 후기에 안산에 거주하던 이복휴(李福休)는 『해동악부』 257편의 연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림탄(加林歎)」은 백제 동성왕이 유락(遊樂)에 빠져 내란을 초래한 사실을 다루었다.332)심경호, 『한시 기행』, 이가서, 2005, 480∼482쪽.

백제 동성왕이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오락에 빠져 절도가 없었다. 가림성(加林城)을 쌓고는 백가(苩加)에게 지키게 하였는데, 백가가 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강제로 부임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웅천(熊川)에서 수렵을 하다가 큰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 묵었다. 백가는 사람을 시켜 자살(刺殺)케 하였다. 아들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자 백가는 가림성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친정(親征)하여 우두성(牛頭城)에 이르자 백가가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그를 베어 백강(白江)에 시신을 던졌다.

임류각 세우니 / 臨流閣

인민들은 눈썹 찡기고 / 蹙民眉

가림에 성 세우매 / 加林城

인민들 머리를 아파하였네 / 疾民首

성은 우람하고 / 城登登

누각은 아스라하다만 / 閣高高

평소 군왕은 화류(花柳)만 쫓을 뿐이었네 / 鎭日君王但花柳

장군더러 가라 말아라 / 莫勸將軍去

장군 한번 가선 주린 매처럼 날았네 / 將軍一去飢鷹飛

웅천의 사냥 불은 비취 이불에 비췄으니 / 熊川獵火拂翠被

한수(漢水)에 묶어둔 배 어느 때나 돌아가랴 / 膠舟漢水何年歸

건계(乾谿)에 초 영왕(楚靈王) 피가 튀니 누굴 한하랴 / 乾谿飛血恨在誰

흰머리 반신(叛臣)은 스스로 죄를 알리라 / 白頭叛臣罪自知

의기(義旗)가 우두성에 펄렁였나니 / 燁燁義旗牛頭城

선왕의 혼백이 응당 자식을 불렀으리라 / 先王有魂應招兒

“얘야 나가 싸워 군대를 돌이키지 마라 / 兒兮出戰不返兵

적의 머리 베는 것이 명주실 베듯 하라”고 / 劒斫賊頭如斫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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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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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휴는 이 시편에 주석을 달아, 동성왕의 시해가 초나라 영왕의 건계지변(乾谿之變)과 다름이 없다고 하여 동성왕을 비판하였다. 또 이 시의 뒤에 논평을 붙여 무령왕이 의분을 떨친 것은 오자서(伍子胥)나 조무(趙武)의 일과 같다고 하였다.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에게 아버지가 살해되자, 오나라 군사를 이끌고 가서 평왕의 시체를 파내어 채찍으로 300대를 때려 분을 풀었다. 그리고 조무는 도안가(屠岸賈)에게 아버지가 살해되자, 그 일족을 멸망시켜 한을 씻었다. 그리고 만약 『춘추(春秋)』에 기록한다면 제 양공(齊襄公)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쟁의 사실을 반추한 끝에 역사를 재해석하는 데로 나아간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한시는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세에 대한 저항 의 식을 담는 일이 많아졌다.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소재로 한 영사시(詠史詩)들처럼 치욕적인 과거를 돌이켜 보며 분개한 작품도 많이 나왔지만, 저항 운동에 뛰어든 의사(義士)들의 영웅적 행위를 칭송하는 것도 많았다. 후자의 예로, 함경도에서 정문부(鄭文孚)와 이붕수(李鵬壽)가 거병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반란자 국경인(鞠景仁)을 처형한 사적을 노래한 홍양호의 「임명대첩가(臨溟大捷歌)」가 있다.333)홍양호, 『이계집(耳溪集)』 권5, 「삭방풍요(朔方風謠)」. 최장대의 「임명전승비(臨溟戰勝碑)」나 『창렬지(彰烈誌)』가 전하는 등 정문부의 사적은 지속적으로 칭송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민중적인 구비 전승의 세계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홍양호는 그 시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평어를 붙여, 함경도에서 반적(叛賊)을 토벌한 것이 곧 강토의 경계를 확고하게 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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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 탁본
백두산정계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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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와 윤관의 강토 개척은 / 昔日金尹拓疆土

나라에 위엄 있고 군대가 강해서였지만 / 國威兵力是憑倚

공은 나라가 위급할 때에 빈주먹을 휘둘러 / 公遭板蕩奮空拳

미친 물결 버티고 선 지주산(砥柱山) 같았지 / 屹若狂瀾障一砥

그렇지 않았다면 / 不然不惟

두만강 안쪽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 豆江以內非吾有

중국에 땅을 거듭 잠식당하였으리 / 蠶食上國從此始.

조선 후기에는 서북 국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병자호란 뒤 청나라는 그 지역에 흘러 들어온 호인들을 소환하고 조선인의 만주 유입을 봉쇄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서북 국경의 방어를 위해 만족스러운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이때 남구만(南九萬)은 함경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설치하자는 서북 방어론을 내어 놓았고,334)남구만, 『약천집(藥泉集)』 권4, 「진북변삼사잉진지도소(陳北邊三事仍進地圖疏)」. 서북 지역에 대한 관심 을 「함흥십경도기(咸興十景圖記)」와 「북관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에서 나타내었다. 하지만 1712년(숙종 38) 5월에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져 두만강 북쪽 700리(혹은 1000여 리)를 청나라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자 이익(李瀷)·신경준(申景濬)·홍양호(洪良浩)·정약용(丁若鏞) 등은 실지 회복을 주장하였다. 홍양호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서북면 개척에 공이 있던 윤관(尹瓘)의 일을 회상하였고, 다음의 「시중대(侍中臺)」335)홍양호, 『이계집』 권5, 「시중대(侍中臺)」. 시에서도 강토 수복의 뜻을 토로하였다.

어찌하여 여러 번 전쟁으로 경략한 땅을 / 奈何百戰經略地

중간에 버리길 헌신짝처럼 하였던가 / 中間棄擲如弊屨

신무(神武)하신 우리 성조(聖祖) 아니었더라면 / 微我聖祖神且武

어떻게 강토를 수복할 수 있었으랴 / 安能收復故疆理

아아, 권귀(權貴)들 먼 계책 없어서 / 嗟哉肉食無遠謀

접때 경계 정하길 아이 장난하듯 했네 / 向來定界兒戲耳

선춘령 아래를 되는대로 가리켰으니 / 先春嶺下漫指點

옛 빗돌 묻힌 곳이 어디란 말인가 / 古碑埋沒何處是.

이 시에서 홍양호는 태조 이성계가 이지란(李之蘭)의 공으로 백두산(白頭山)에서 훈춘강(訓春江)까지 천여 리를 조선 영토로 편입시켰던 일과 고려 때 윤관이 서북면을 정벌하고 선춘령에 정계비를 세웠던 일을 환기시켰다. 조국 강토를 확정하였던 서북면 정벌의 역사적 사실을 새삼 중시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역사적 경험의 의미를 규정하고 대다수의 체험자들이 그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기념 행위로 기념물을 건립하게 된다. 기념물을 통해서 과거의 사건이나 그에 부수되는 의미 체계를 집합적인 해석으로 결정화하는 것이다. 근대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는, 특히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념물을 매우 중요하게 활용하였다. 기념물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과거사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현재 속에 재현해 주고 지배층이나 지식인의 해석 체계를 민중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기억 속에 접목시켜 준다. 전근대시기에도 그러한 기능을 담당한 기념물이 역시 존재하였다. 기념비와 사당의 위패가 그것이다. 승전 기념비는 국가를 위한 전쟁이 소중하다는 관념을 갖게 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국가 자체를 신성한 것,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하게 만든다. 이때 기념비에는 비문(碑文)이 새겨지고, 사당의 위패 봉안에는 고유문(告由文)이나 제문(祭文)이 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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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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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4월에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뒤, 정주 현감 이신경(李身敬)은 막하의 조수삼을 시켜 「정원의 난리 후에 대소 민인들을 효유하는 글(定原亂後喩大小民人)」을 짓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13년 정월 14일에 왕사(王事)로 죽은 이들을 제사지내도록 하라는 왕명이 내리자, 이신경은 19일에 조수삼을 시켜 「제전망제장졸문(祭戰亡諸將卒文)」과 「제란사제인문(祭亂死諸人文)」을 짓게 하였다. 관군의 전몰 군사를 제사 지냄으로써 홍경래 난을 진압한 의미를 조정의 이념에 맞추어 선포하고 그 이념을 공유하도록 한 것이다. 다시 1814년 9월에는 관찰사가 문사를 뽑아 정주성 전몰 장졸을 위한 기적비문(紀績碑文)을 짓게 하였다. 기념비를 집합적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이용한 한 예다.

기념비는 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축소시키고 대외적인 저항과 승리의 역사를 부각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기념비의 건립은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지식인 및 지배층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게 된다. 전근대시기에도 기념비는 집단의 가치와 정체성을 제창하기 위해 자주 건립되었다. 한문 문체의 비문은 특히 그러한 목표를 위해 가장 널리 활용되었다.

전쟁은 경험자 자신이 속해 있는 세대의 공통 경험으로서 반추된다. 전쟁은 무의미한 파괴로서 경험되고, 전후 사회의 모순과 비극은 고통을 가져온다. 나아가 전쟁은 여러 세대에 걸쳐 추체험되면서 상징화된다.

전근대시기의 문자 활동은 그러한 속성의 전쟁에 대해 독전과 선전, 기록 및 발견, 재해석과 상징화의 양태로 간여하였다. 독전과 선전은 적개심의 표출, 민족 의식 혹은 계층 의식의 고양을 목표로 하였다. 기록은 객관적 기록을 통하여 고발을 행하였다. 재해석과 상징화는 전쟁이 지닌 공통의 의미를 추출하고 공유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민족 영웅의 이상이나 충 군애국(忠君愛國)의 상징물들이 고정되었다. 『해동명장전』은 그 대표적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란 곧 폭력이며 죽음이었다. 따라서 일상의 인간에게 전쟁은 애써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의 권태감은 인간을 중독시키는 알코올이나 티푸스 같은 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전근대시기의 문학 작품들은 전쟁이 곧 죽음을 의미하며 무가치하다는 것을 소리 높여 말하지 못하였다. 몇몇 시와 소설이 전쟁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데 성공하였을 따름이다. 고전 문학에서는 전쟁이 지닌 권태감에 대한 반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전근대시기에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학들은 휴머니티나 유머를 드러내지 못하였다. 문학은 도덕과 미학의 일치를 통해 사회에서 탈락된 자를 숭고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휴머니티가 담긴 유머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근대시기에 전쟁에 관계하고 전쟁을 다룬 기록물과 문학 작품들은 휴머니티를 전면에 내세운 경우가 많지 않았다. 전쟁으로 잃어버린 고향, 잃어버린 관계, 신뢰할 수 없는 땅을 인간과 인간이 신뢰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터전으로 바꾸는 데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다만 우리나라 전근대시기의 문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화하고 영웅주의 사관을 형성함으로써, 전쟁의 위협에 늘 직면하였던 우리 민족에게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 주고 광범한 결속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점에서 그 가치는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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