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1장 비금속 상품 화폐 시대의 돈
  • 1. 다양한 돈들의 부침
  • 고대의 금속 화폐
이헌창

기원전 24세기 메소포타미아에서 귀금속, 특히 은이 화폐로서 기능하였음은 밝혀져 있다. 기원전 700년경에 그리스 국가들이 고액 주화를 발행하였고, 400년경에는 소액 주화도 발행되었다. 이후 화폐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제도적으로 정비되면서 확산되고, 기원전 250년경에는 금·은·동의 주화가 지중해는 물론 근동과 인도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인도 대륙도 그리스 등 서방 화폐 제도의 영향을 폭넓게 받았으나, 중국은 독자적인 화폐 발전의 길을 걸었다. 한반도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금속 화폐를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고 중국 화폐를 수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의 화폐 제도를 도입하여 주화를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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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 고대 화폐-명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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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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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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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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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의 법률인 범금(犯禁) 8조 중에는 도둑질한 자는 물건 주인의 노예가 되어야 하며, 속죄하려면 금속 화폐 50만 개, 곧 500관(貫)을 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위만 조선의 유적지에서 명도전(明刀錢), 포전(布錢), 반량전(半兩錢), 일화전(一化錢), 명화전(明化錢)이 발굴되었다.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는 고구려 초에 이르기까지 일부 토착민 사이에서 전국 시대와 진·한대의 중국 화폐가 유통되었다.2) 김창석, 「삼국과 통일신라의 현물 화폐유통과 재정」, 『역사와 현실』 42, 2001, p.5. 이 지역과 북중국의 교역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원격지 교역의 활성화가 금속 화폐 의 통용을 낳은 중요한 힘이었던 것이다. 명도전이 단지나 나무 상자에 담겨 구덩이에 묻힌 채 발굴된 것을 보면,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당시 교역권을 장악하고 잉여를 집중한 지배층을 중심으로 금속 화폐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돈 500관을 배상할 만한 재력을 가진 자는 지배층에 한정되었을 터이고, 일반인은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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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이쇠
덩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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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주변 소국(小國)과 한(漢)나라의 직접 교역을 차단하려다 한나라의 공격을 받고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그 후 토착 집단은 한사군(漢四郡)과 조공(朝貢)·책봉(冊封)이라는 관계 아래 공무역을 수행하였고, 또한 국경의 호시(互市)에서나 중국 상인을 통하여 물자를 교역하였다. 이러한 교역을 통하여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는 기원전부터 한나라 화폐가 유통되었다. 한나라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등이 해안 지방에 출토되고 있는데, 서·남해안의 소국들이 해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 지방을 제외하고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중국 화폐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철기 문명이 성립한 이래 철이 유력한 교역품이자 화폐로 기능하였다. 2세기 이후 변한·진한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철은 판상철부(板狀鐵斧)나 덩이쇠(鐵鋌)의 형태로 산지와 그 주변에서 유통될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와 한나라 군현에도 공급되었다. 경상도 지방에서 생산된 철은 김해에 모여서 국내 각지는 물론 일본으로도 활발히 배급되었다. 철은 활발한 교역을 배경으로 화폐로 기능하였다. 『후한서(後漢書)』의 진한조(辰韓條)에는 “제반 무역은 모두 철로써 화폐(貨)를 삼는다.”고 하였고, 『위서(魏書)』의 동이전 (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는 “나라에 철이 산출되어 한(韓)·예(濊)·왜(倭) 모두 그것을 취하며, 무릇 매매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돈(錢)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두 군(郡)에 공급한다.”고 하였다. 대량 생산과 활발한 대외 교역을 토대로 철이 외부 교역뿐만 아니라 내부 교역에서도 화폐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철은 주화가 아니라 칭량(稱量) 화폐였다. 덩이쇠는 크기와 중량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가졌고, 5세기가 되면 더욱 규격화되고 소형·경량화되면서 화폐로 더욱 편리하게 활용될 수 있었다. 3∼5세기 경상도 지방의 중심적인 화폐는 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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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출토 오수전
무령왕릉 출토 오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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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화폐의 이러한 활발한 사용 관습은 삼국시대에 이어지지 못하였다. 685년 건립된 사찰의 승려 선율(善律)이 보시 받은 돈(錢)으로 『육백반야경』을 간행하려 했던 사례가 있고, 고려 태조가 만든 삼사(三司)가 전곡(錢穀)의 출납을 맡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3)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 『고려사』 권76, 백관지(百官志). 삼국·통일 신라 시대에도 금속 화폐가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 등 중국 화폐가 유입된 사실이 기록이나 출토물에서 드러난다. 523년 사망한 백제 무령왕은 지신에게 왕릉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자신의 능에다 한나라의 오수전을 묻어두었고, 향가에 의하면 월명사(月明師)는 죽은 누이를 위해 제사 지낼 때 지전(紙錢)을 사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화폐를 종교적 의례용으로도 활용하였던 것이다. 신라에서는 금과 은을 소재로 한 두 종류의 무문전(無文錢)이 있었다는 『해동역사(海東繹史)』 전화조(錢貨條)를 논거로 하여 금·은 화폐가 주조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 책의 논거가 확실하지 못하다. 그래도 해로 무역이 활발한 통일 신라 시대에는 국제 화폐인 금·은이 국내 화폐로도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은정(銀鋌)이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금속 화폐가 전혀 유통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변한·진한에서의 철처럼 화폐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왜 금속 화폐의 유통이 위축되었을까?

첫째, 제철 기술의 보급과 더불어 대외 교역의 결제물로서 위상이 하락된 철은 화폐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둘째, 고대에는 일반적으로 외부 교역이 금속 화폐의 유통을 낳은 주된 힘이었는데, 외부 교역의 위축이 주요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김해를 포함한 경남 일대의 개방적 외부 교역 체계가 신라의 진출로 5세기 초에 와해되었던 데에서 드러나듯이, 삼국의 주변 소국 흡수는 지배 집단 간 외부 교역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까지 대외 교역의 주도층은 수장(首長)과 호민층(豪民層)이었는데, 삼국은 집권 체제의 정비를 위해 이들의 독자적인 무역을 금지하고 국가 차원에서 무역을 관리하였다면 무역의 다원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무역은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선물 교환의 형식을 취하는 일이 많았다. 물론 삼국은 상호 간의 대립과 경쟁의 필요성 때문에 중국·일본과 빈번하게 교류하였으나, 무역을 활발하게 수행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외부 교역은 고조선과 삼한에서 금속 화폐의 유통을 낳은 중요한 계기였으나, 외부 교역의 위축 내지 성격 변화는 금속 화폐의 유통을 위축시켰던 것이다. 셋째, 비금속 상품 화폐가 성장하여 내부 교역을 충족하였으므로, 금속 화폐가 활동할 여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한반도는 문명의 발달 수준에 비해 금속 화폐의 보급이 늦었다. 동아시아 해역이 지중해 세계보다 금속 화폐의 확산이 늦었는데, 지중해 세계의 외부 교역 내지 국제 무역이 동아시아 해역보다 개방적·다원적이어서 더욱 활성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도 금속 화폐의 확산이 늦었는데, 외부 교역의 위축이 기본 원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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