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1. 은화 유통과 금속 화폐 시대의 개막
이헌창

은화는 고려시대에 200여 년간 사용되다가 은의 부족으로 고려 말에는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은화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명나라에 해마다 은을 공물로 납부하는 일로 어려움을 겪던 1408년에 은화 사용은 금지되었다. 그래도 은화가 돈이라는 관념은 존속하여, 한글의 창제 후에 만들어진 『석보상절(釋譜詳節)』에는 “오백 은(銀)도나로 다섯 줄깃 연화(蓮花)를 사아”라는 번역도 있다. 1578년(선조 11) 은으로 매매된 고양(高陽) 전답의 문서가 있는데,50) 서울대도서관, 『고문서집진(古文書集眞)』, 1972, p.146. 1540년대부터 일본 은이 활발히 유입됨에 따라, 은화의 사용 습관이 소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조선 전기에 은화의 사용을 보여 주는 기록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 은화가 국제 무역을 위한 기본 결제 수단인 국제 화폐로는 기능하였으나, 국내 교역에서는 기본적으로 화폐로 기능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에서의 은화 유통은 금속 화폐 시대로 전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임진왜란에 이르러 중국에서 은을 우리나라에 내려 주고 군대의 식량과 포상도 모두 은으로 지급하니, 이로 인하여 은화가 크게 유행하여…… 시정에서 매매하는 무리가 다른 재물은 저축하지 않고 오직 은으로 재물의 가치를 정하였다.”고 한다.51) 신흠(申欽), 『상촌고(象村稿)』 권53, 「산중독언(山中獨言)」. 1594년(선조 27) 호조의 제안으로 벌금 과 일부 공과금을 은으로 납부할 수 있게 하면서 은화의 유통은 촉진되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한 후에는 중국의 비단과 명주실의 중계 무역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다량의 은이 유입되었다. 그 대부분은 중국 비단 등의 결제물로 다시 유출되었지만, 상당 부분은 조선에 남아서 화폐로 기능하였다. 은화는 서울과 중국 무역로를 중심으로 유통되었고, 주로 왕실, 관청, 권세가, 상인, 역관(譯官)이 가치의 측정·저장 수단이자 거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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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노 전 명문(朴昌老前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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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의 유통량이 증가하고 유통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추포는 17세기 중엽부터 화폐로서의 한계가 현저히 드러나고 기능이 약화되었다. 1650년경에 추포의 품질이 더욱 열악해짐에 따라 가치가 폭락하여 시장 거래에 제약을 가하기도 하였다.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되기 직전에는 “추포의 유통이 두절되어 공사(公私)로 사용하는 온갖 재화의 매매가 오로지 은화에 의존하여, 이를테면 연료, 채소와 같은 미물까지도 반드시 은화가 있은 연후에 교역이 가능하였다.” 한다.52)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34책, 숙종 4년 윤3월 24일. 1650∼1670년대에는 추포의 유통이 위축되는 반면 은화가 화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며 통용 범위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상평통보의 주조가 개시될 무렵에 추포는 화폐로서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17세기 후반에 비금속 화폐 시대로부터 금속 화폐 시대로 전환하였다고 하겠다. 1651년 추포의 통용이 금지되었을 때, 김육은 쌀 3,000석으로 값을 후하게 치러주더라도 서울의 추포 총량에 해당하는 5만여 필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전국의 추포량을 서울의 3배로 잡는다면, 구매력은 쌀 만 석에 불과할 정도로 양이 적었다. 17세기 말까지는 은화 총액이 동전 총액보다 많았고 은화에 대한 신인도가 동전보다 높았 다. 은화는 17세기 후반에 서울 등 상업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중심적인 화폐로 기능하였으나, 일반 농촌에서는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은은 주로 일본에서, 부차적으로 국내 광산에서 공급되었다. 원래 은의 함유 비율이 80%인 8성은(成銀)이 통용되었는데, 일본에서의 은화 사정 악화에 따른 화폐 개주(改鑄)로 인하여 1698년부터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양국간 결제 수단을 6성은으로 변경하기를 요청하여 조선 정부는 허락하였다. 중국 무역에서는 10성천은(成天銀)을 사용하였으므로, 6성은을 받아 천은으로 제련하여 중국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707년에는 다시 일본이 요구하여 6성은인 원자구은(元字舊銀)에서 7성은인 보자신은(寶字新銀)으로 결제 수단이 바뀌었다. 6성원은은 1716년경에 이미 통용되지 않고 있었지만, 10성천은과 7성정은(丁銀)은 영조대에도 국내에서 화폐로 기능하고 있었다. 일본으로부터의 정은 수입량은 1680∼1690년대에는 7.5톤을 상회하였다가, 18세기 초에 급감하여 1710∼1720년대에는 3∼4톤 내외에 머물렀는데, 1730년대부터 격감하고 1752∼1753년부터 두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3) 田代和生, 『近代日朝通交貿易史の展開』, 創文社, 1981, p.328. 일본에서 유입된 은은 사신 행차 경비와 수입 결제물로서 중국으로 대량 유출되었다. 일본에서 유입된 7성정은을 공사(公私) 모두가 사용하였다.54)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 4, 금은동연조(金銀銅鉛條). 은의 함량이나 품질에 따라 은화 간에도 교환 가치가 달랐다. 1740년대에 정은을 사행팔포(使行八包)로 정한 천은으로 교환하는 데에 20%의 프리미엄을 주어야 했다.

18세기에 일본 은의 유입이 격감하다가 두절함에 따라 은 재고량은 감소하는 추세였다. 그것은 화폐로서 은의 기능을 약화시켰음이 분명하다. 1732년(영조 8) 호조 판서의 보고에 의하면, 호조가 비축한 은은 종전에 30∼40만 냥을 내려가지 않았는데 10년 전에 15만 냥으로 하락하고 당시에는 3만 냥에 불과하였다. 서울의 어용 상점인 시전(市廛)에게 물건값을 모두 은으로 지급해야 하지만, 은이 부족하여 동전으로 대신 지급하였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1723∼1724년에 13만여 냥이던 호조의 비축은은 1729년에는 6만 8천여 냥으로 감소하였다. 1742년에 평양 감영의 비축은은 30만 냥, 전국적으로는 100만 냥에 불과하고 그 가운데 6성은이 많은데, 1년간 북경으로 은 37∼38만 냥이 유출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은의 유입이 격감하고 두절되었지만, 1782년 7월 서울을 제외한 전국의 관청이 비축한 은은 44만여 냥이며, 1782년 말 서울의 여러 관청이 비축한 은은 43만여 냥이었다. 1776년 이래 서울의 주요 관청들의 은 재고량 추이를 보면, 1780년대까지 감소하는 추세다가 179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는 40만 냥 내외에서 정체하였고, 1830년대에 격감하여 1837년 이래에는 20만 냥 전후에 머물렀다.

토지 등의 매매 문서를 통하여 화폐의 세계에서 은화의 지위를 추적할 수 있다.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 중추원(中樞院)에서 편찬한 『조선전제고(朝鮮田制考)』에 수록된 문기를 보면, 서울 남부 훈도방(薰陶坊) 수표교(水標橋) 아래의 공터는 1602·1604년에 목면으로 거래되다가 1624·1642·1685·1725년에는 은화로 거래되었으며, 동대문 밖 채소밭은 1673년부터 1714년까지 은화로 거래되다가 1731년에 동전으로 거래되었으며, 중부 전의감동계(典醫監洞契)의 기와집 22칸과 공터 51칸은 1755·1777년에는 은화로, 1784·1785·1786·1787년에는 동전으로, 1801·1803년에는 은화로, 1820년 이래에는 모두 동전으로 거래되었다.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400여 건의 공물 문서(貢物文書)를 보면, 공물 납부권은 은으로 거래되는 것이 특징적이며 19세기에는 동전으로 지급되기도 하지만 은화로 매매하는 관행도 지속되었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전답 문기(田畓文記)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은화로 거래한 문서가 1660∼1670년대에 많이 보이지만 18세기로 접어들면 잘 보이지 않았다.55) 周藤吉之, 「朝鮮後期の田畓文記に關する硏究」, 『淸代東アジア史硏究』, 日本學術振興會, 1972. 1621∼1893년간 각 지역의 노비 문서 154건을 다룬 연구에 의하면, 은화로 매매된 것은 1671년의 문기 1건이었다.56) 정석종, 「조선 후기 노비매매문기 분석」,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4. 이수건이 편찬한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慶北地方古文書集成)』에 수록된 수많은 문기 중에 1692년과 1693년에 월성군 강동면에 소재한 전답의 문기 2건, 그리고 1687년 월성군 강동면의 노비 문서 1건과 1689년 예천군 용문면의 노비 문서 1건만이 은화로 표시되었다.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에서 편한 고문서 집성 자료에 의하면, 구례 문화유씨가(文化柳氏家)의 방대한 토지 문기 중에 은화 거래는 발견되지 않으며, 해남윤씨가(海南尹氏家)의 고문서에는 1637년 노비를 은으로 거래한 문기와 1697년 토지를 은화로 거래한 문기가 각각 1건 나와 있다.

은화의 유통은 상업의 활성화를 반영하였다. 서울처럼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에서, 또한 공물 납부권 매매와 같이 고액 상거래에서는 은화가 일찍부터, 그리고 오랫동안 쓰였다. 반면에 농촌 지역에서는 은이 짧은 기간 동안에 노비와 토지의 거래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농촌에서도 상업이 활발한 지역일수록 은화가 더욱 이른 시기부터 유통하였지만, 일반 농촌에서는 은화가 거의 사용되지 못하였다. 토지보다 노비의 거래에 은화가 일찍 사용되었다. 요컨대 은화의 통용은 화폐 경제의 일정한 성숙을 의미하였고, 그 기반 위에서 동전이 원활히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은화 유통은 17세기 후반에 가장 활발하였고, 18세기에 점차 위축되다가 마침내 두절되었다. 여기에는 두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동전이 널리 보급되면서 은화를 압도해 갔다. 둘째, 일본 은 유입의 위축으로 재고량이 감소하였다. 은화가 국내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후에도 중국 무역의 중심적 결제 수단으로 기능하였으므로, 정부는 은의 비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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