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3. 화폐와 경제 생활
  • 화폐 경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폐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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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통용책을 추진한 사상은 부국이민론(富國利民論)내지 안민부국론(安民富國論)이었다면, 그것에 제동을 걸 뿐만 아니라 폐전론을 낳은 사상은 안민론(安民論)이었다. 조선이 통치 이념으로 삼은 유교의 기본 정책 이념은 공자부터 ‘수기이안인(修己而安人)’을 중시한 데에서 드러나듯이 안민론이었다. 경제 정책으로 본다면, 안민론은 민생 안정책이고, 서민 보호를 중심 과제로 삼는 것이었다. 유가라면 누구나 안민론을 기본 정책 이념으로 삼지만, 이익 추구를 용인하고 활용하자는 적극적인 경제 관념을 가진 인물은 그에 머물지 않고 부국이민 내지 안민부국의 방도를 추구하였다. 유교 이념이 철저하고 시장이 덜 발달한 조선에서는 유교 도덕주의, 결국 안민론의 힘이 강하고, 안민지상주의자들이 득세하였다. 대체로 도덕주의자들은 안민지상주의의 입장을, 도덕주의와 공리주의의 조화를 추구하는 인물은 부국이민론을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전근대의 위정자들은 화폐가 중국 고대 성인이 제작하여 선진 중국의 문물로 존속해 왔기 때문에 부국이민을 도모할 잠재성을 가진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화·동전의 통용책을 추진해 보니, 인민들이 그것을 기피하고 불신하여 물가 등귀로 민생 안정을 손상하였다. 1002년 시중 한언공이 상소를 올려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려면 옛 제도를 항구적으로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추포의 사용을 금지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하시니 이것은 나라에 이익을 주지 못하고 한갓 백성들의 원망만 불러일으킬 따름입니다.”라고 금속 화폐 통용책을 비판하였다. 이 비판이 그 중단을 낳은 중요한 계기였다. 성종대에 강화된 유교 이념이 화폐 통용책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지폐·동전의 통용책을 포기한 기본 이유는 강제 통용책에 따른 형벌 남용과 물가 등귀로 인해 민생 안정이 손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효종 때에는 안민부국론자인 김육 등이 동전 통용책을 적극 주장하였고, 안민론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산림 세력이 그것을 견제하고 반대하였다.

동전이 보급되면 이익 추구 관념의 성장, 빈부 격차의 확대, 고리대(高利貸)의 활성화, 뇌물과 도적의 성행 등의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안민지상주의자들의 반격은 폐전론까지 낳았다. 그런데 폐전이 안민을 더욱 해칠 수 있다는 것이 자각되면서 폐전론은 사라졌다.

1678년(숙종 4) 이래의 동전 유통은 성공을 거두고 화폐 경제는 활기차게 성장하였다. 그 결과 시장과 경제가 성장한 반면에 빈익빈 부익부의 촉진, 배금 사상의 성장에 따른 순박한 농촌 풍습의 변화, 고리대의 성행, 탐관오리와 도적의 횡행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러한 부작용에 대한 위정자와 지식인의 우려는 커져 1684년경부터 조정에서도 활발히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685년 남구만(南九萬)은 “대개 동전이 통용한 이래부터 백가지 폐단이 모두 일어나 각지에 도적이 발호하며 관청에서도 뇌물이 행하여지며, 이익의 구멍이 다양하여 인심이 더욱 간교해지니, 논자들이 모두 동전 통용의 허물이라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94) 『비변사등록』 49책, 숙종 21년 11월 21일. 1698년에 군신 간 대화는 동전 무용론(無用論)으로 기울어졌다.

1698년부터는 폐전론도 활발히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뿐만 아니라 재야에서도 폐전론이 나왔다. 실학자 이익(李瀷)은 동전 통용이 사치와 탐욕을 조장하여 농업에 해롭고 도적을 발호시켜 백성을 곤궁하게 만들었다며 폐전을 주장하였다.95)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4, 만물문(萬物門), 전초회자(錢劓會子). 폐전론에 대해 농민의 곤궁과 도적의 성행은 흉년 때문이지 동전 유통 때문은 아니라는 호조의 반론 등이 있었으나, 동전 통용론자들은 점점 열세에 몰리고 소극적 방어에 급급하였다. 화폐 경제의 성 장으로 인한 농촌 고리대의 성행은 폐전론의 중요한 논거를 제공하였다.

대저 동전이라는 물건은 추워도 입을 수 없고…… 유통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곤궁한 봄에 빈민에게 이자를 놓아 추수에 이르러 동전으로 계산하여 배나 되게 징수하는데, 가치로 계산하면 3∼4배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져서 빈민이 보전하지 못하니 불쌍하다 하겠습니다.96) 『승정원일기』 숙종 38년 1월 3일.

원래 농촌에는 봄에 쌀을 2말 빌려 준다면 가을에 3말을 받는 5할의 이자율인 장리(長利)가 성행하였다. 쌀 대신 돈 1냥을 봄에 빌려 주고 가을에 1냥 5전을 받는다고 하자. 곡식이 귀한 봄에는 1냥이 쌀 2말, 추수곡이 방출되는 가을에는 1냥이 5말에 해당된다고 하면, 쌀로 환산하여 3∼4배를 받는 셈이다. 동전에 의한 고리대는 이자율을 높여 빈부 격차를 조장하고 하층 농민의 몰락을 초래한다고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고려시대, 아마도 그 이전부터 중국처럼 금속 화폐가 통용되기를 갈망하고 조선시대에 그 통용책이 수없이 좌절을 겪은 후에 1678년부터 겨우 성과를 거두어 17세기 말에 동전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동전 통용책이 성공한 지 20년 정도 만에, 그것도 전국적으로 비로소 보급되는 시점에 동전 무용론과 폐전론이 대두하여 정책 논의를 주도한 것은 흥미롭고도 놀라운 일이다. 돈이 널리 보급된 이래 배금주의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화폐 물신성(物神性)이라 부르고 그의 자본주의 분석 체계에 포함하였다. 그래도 그 문제점보다 이점이 훨씬 크다고 보는 것은 거의 모든 사회의 통념이었는데, 그렇지 않게 생각하여 화폐 폐지론이 여론의 대세로 대두하여 그것이 정책으로 추진된 나라는 조선과 사회주의국 소련을 제외하고는 달리 잘 발견되지 않는다. 유교 이념이 철저하고 시장이 덜 발달한 조선에서는 유교 도덕주 의, 결국 안민론의 힘이 강하고, 안민지상주의자들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폐전론의 성행은 전황에도 불구하고 주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전황이 심해질수록 주전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폐전론과 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폐전론은 오랫동안 주전론을 눌러 전황을 한층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전황이 심화됨에 따라 소수의 부유한 상인이 희소해진 동전을 집중하여 여전히 고리대 활동을 수행한 반면에 일반 농민과 영세한 상인은 거래 수단인 동전을 구하지 못하여 곤경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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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폐전론자로 동전의 폐지를 의도하여, 1727년에는 조세 납부 등 공적 용도에 전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조치를 취하였으나, 공·사경제 간 물화의 유통이 막혀 곧 철회하고 말았다. 동전을 대신할 더 나은 대안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1731년에 심한 흉년을 만나 재원 확보가 필요해지자, 동전을 주조하여 가치를 낮추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97) 원유한, 「영조의 주전 통용 금지 시도」, 『사학회지(史學會誌)』 12, 1969. 1660년대까지는 국가가 금속 화폐를 통용하려는 노력이 실패하였지만 영조대에는 국가가 금속 화폐의 통용을 중단하려는 시도가 좌절될 정도로, 시장의 성장은 이미 거역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형원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면서 화폐로서 기능하는 추포의 유통을 국가가 금지해도 멈출 수 없는데, 만약 동전이 한번 통용되면 금지하고자 해도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는데,98) 유형원, 『반계수록』 권8, 전제후록고설 하 전화. 그의 예견대로 한번 익숙해진 동전의 사용 습관을 시장이 성장한 가운데 변경할 수는 없었다. 이후 폐전론은 다시 대두하지 않았다.

실학자 중에도 폐전론을 주장하거나 동전 통용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폐전론이 위세를 떨치던 시대에 활동한 이익은 화폐 유통의 부작용을 우려하고 폐전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화폐가 거래 수단으로 유용함을 인정하면서도 조선은 면적이 협소한 반면 수운(水運)의 편의가 커서 동전의 필요가 적다고 보았다. 게다가 “동전은 추워도 옷으로 입지 못하고 배고파도 먹지 못하여 농사에 해가 되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세 금납화의 금지, 통용에 불편한 대전(大錢)의 사용을 통해 동전을 점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99) 이익, 『곽우록(藿憂錄)』, 전론(錢論). 여러 형태의 화폐 중 동전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한 정약용도 화폐의 부작용을 우려하였다. 그는 동전이 옷감·곡물 등 천한 것과 금·은 등 귀한 것을 절충하여 가장 원활히 유통할 수 있는 화폐로 보았으나, 동전의 보급이 다음과 같은 폐단을 낳는다고 지적하였다.

상품의 운송은 더욱 편리해졌으나 거짓과 허위가 더해졌다. 교역은 더욱 번성해지나 사치를 위한 지출이 늘어났다. 상업의 이익은 있다마는 민생은 날로 초췌해지고 있다. 이처럼 화폐 유통의 이해(利害)는 교차하여 나타난다. ……

동전을 유통한 지 이미 140여 년이 지났다. …… 수천 년간 막혀 왔던 풍속이 이제 활연하게 소통되고 마땅히 민생(民生)이 부유해지고 국용(國用)이 넉넉해져야 한다. 그런데 공사(公私)의 비축이 모두 고갈되고 남북의 재화가 통하지 않으며, 조그만 일로 다투어 민속이 날로 경박해지고, 뇌물이 공연하게 행하여지나 부정부패를 징계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진실로 그 까닭을 찾으면, 그 허물은 동전에 있다.100) 정약용,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 상(上), 시문집(詩文集)·문(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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