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4. 고액권
  • 당백전 주조와 중국 동전의 수입
이헌창

18세기 초부터 고액전 발행 논의가 활발하였지만, 고액권은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비로소 발행되었다. 1866년 10월 우의정 김병학(金炳學)은 경복궁 재건 등으로 야기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당백전의 주조를 건의하여 왕의 재가를 얻었다.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세도 정치 아래 약화된 왕권을 정비하는 상징적 사업으로 경복궁의 재건 사업을 벌였고,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군사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군비 증강에 힘썼다. 이들 사업은 대규모 재원 조달을 요구하며 그 비상 대책으로 실질 가치가 기존의 일문전 동전의 5∼6배에 불과하나 액면 가치만 100배의 고액권인 당백전을 주조, 유통시키는 파격적 조처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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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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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위정자들은 당백전이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리라는 우려를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병학은 당백전 주조를 일시적 방편으로 삼자고 하였다. 당백전에 대한 민간의 신뢰를 우려하는 견해도 있었고, 당오전이나 당십전을 먼저 통용하여 성공한 다음에 더욱 고액권을 통용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그런데 고관들이 제동을 걸지 못해 당백전은 신속히 주조되어 1867년 1월부터 유통되었다. 당백전은 1867년 6월까지 주조되었는데, 정부 주조량은 1,600만 냥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주도 성행하였으므로, 당백전의 발행액은 당시 현존하는 일문전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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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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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인플레이션이 격화되어 물가는 5∼6배나 등귀하였고, 당백전이 일문전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그레샴의 법칙이 나타났다. 화폐량의 과도한 증가가 물가의 폭등 등 심각한 폐단을 초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68년 2월부터 흥선 대원군이 개입하여 당백전 유통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나,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868년 10월에 당백전의 통용은 중단되었다.

당백전의 통용이 실패로 귀결되자, 정부는 재원 확보를 위한 다른 방안으로 중국 동전(淸錢)을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동전의 명목 가치는 일문전이나 소재 가치는 상평통보의 절반에 불과하여, 중국에서 구입해 오면 3분의 1의 이익이 발생하였다. 중국 동전은 1867년에 이미 사용되었고 1868년에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이처럼 소재 가치와 명목 가치의 괴리가 심한 중국 동전의 대량 유입도 인플레이션을 야기하였다. 흥선 대원군이 실각한 직후인 1874년 1월부터 중국 동전이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거래를 위축시킨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고종은 곧바로 중국 동전의 통용을 중단하는 분부를 내렸다. 대신들이 재정 형편을 걱정하였지만, 고종은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중단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성급 한 결정이 초래한 문제점은 곧 드러났다. 지방 관리들이 상평통보로 세금을 거두어 중앙 정부에 중국 동전을 납부하여 차액을 거두었던 결과, 중앙의 창고에는 중국 동전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중국 동전의 통용이 금지되는 시점에 중앙 관청에 있는 중국 동전은 300만 냥 이상이었다. 그 후 정부는 중국 동전의 유통 금지로 야기된, 거의 바닥이 난 재정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2년이 걸렸다. 이 금지는 조선 왕조사상 가장 잘못된 조치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102) James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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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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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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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과 중국 동전의 유통이 지방에 미친 영향을 경북 예천군 박씨가의 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867년 7월 14일 당백전 60만 냥이 영남에 배당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10월부터 당백전으로 물가가 폭등한 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868년 3월에는 당백전 사용을 강행하는 흥선 대원군의 분부, 4월에는 그 칙교(勅敎), 5·6월에는 지방관의 당백전 사용 독려, 11월에는 당백전 사용 중지에 따른 물가 안정이 기록되었다. 1874년 1월에는 중국 동전(胡錢)이 폐지되어 물가가 전반적으로 하락하였으나, 예전으로 되돌아가기 어렵다는 기록도 있다.

18세기와 19세기 전반기에는 물가가 안정적이었으나, 19세기 후반기에는 빠르게 올랐다. 18세기 중엽부터 완만한 상승 추세를 보이던 쌀값은 1856년경을 기점으로 80년 동안 연평균 3% 이상의 상승 추세로 바뀌었다. 재화의 가격은 대체로 18세기와 19세기 전반에는 안정적이다가 19세기 후반에 빠르게 상승하였는데, 쌀값이 다른 재화 가격의 상승을 선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03) 박기주, 「재화 가격의 추이, 1701∼1909」,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서울대출판부, 2004 ; 이영훈·박이택, 「총촌 미곡시장과 전국적 시장 통합 : 1713∼1937」, 같은 책. 은화로 측량한 동전의 가치도 1850년대부터 빠르게 하락하였다. 19세기에는 토지의 생산성이나 인구가 정체하거나 하락하였고 이것이 19세기 후반 물가 등귀를 낳은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실물 요인 못지않게 화폐적 요인도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당백전과 중국 동전의 사용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19세기 후반 물가 등귀의 서막을 열었으며, 사용이 중단되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야기된 인플레이션 심리가 다른 실물적·화폐적 요인과 결합하여 물가의 장기적인 상승에 일정한 작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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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전
중국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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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당백전 주조의 동기는 압도적으로 주전 이익의 흡수였다. 그전에 주전 이익의 고려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지배적 동기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거래 편의의 도모와 경제 안정이 주요한 동기였다. 다만 흉년 때 빈민 구제를 위한 재원을 조달할 목적으로 동전을 발행하는 정도의 일은 있었다. 당백전 이전에 소재 가치와 명목 가치가 크게 괴리된 유일한 화폐는 조선 초의 저화였는데, 그것도 주전 이익의 확보가 주된 동기가 아니고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통제력을 증가하려는 이권재상론에 주로 의거하였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소액권 동전을 선호하고 고액권을 주조하지 않은 것은 서민 경제 생활의 안정을 중시하고 인플레이션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외국에서는 궁궐 건설 등과 같은 큰 일을 위한 재원 조달을 목적으로 돈을 발행하는 일이 흔하였지만, 고려·조선시대에는 당백전 발행 때에 처음 그러한 일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주전 이익을 주된 동기로 하여 당백전을 주조한 일은 경제생활 안정을 기본으로 삼는 왕도적 안민책이라는 조선의 원래 경제 정책이념과는 크게 달랐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는 대내적으로 왕권 강화책을, 대외적으로 군비 강화책을 추진하여 정책 이념이 부국강병책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부국강병책을 위한 수입 증대라는 목표가 부상하는 가운데 주전 이익의 확보가 화폐 공급의 주된 동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에 반해 고종은 전통적인 왕도적 안민책에 입각한 화폐 정책으로 전환하려고 의도하여 중국 동전의 통용을 별 고민 없이 중단하였다. 강화도 조약(1876)으로 인한 개항 이후에도 당오전 등 주전 이익을 우선하는 화폐 공급책이 추진되었는데, 이것은 1880년경부터 부국강병책이 정책 이념으로 정립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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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전
당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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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전
당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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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이익을 목표로 소재 가치와 명목 가치가 크게 괴리된 당백전과 중국 동전을 통용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것은 모두 문호 개방 직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후의 역사에 아픈 주름살을 남겼다. 첫째, 재정난이 심화되었다. 곧 이루어진 문호 개방 이후 재정난은 근대화 정책의 수행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하였다. 둘째, 고액전 통용을 비롯한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은 이후 정부의 화폐 정책의 추진에 장애로 작용하였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소재 가치가 그렇게 크게 괴리되지 않는 고액전을 주조하여 통용하는 데에 성과를 거두었더라면, 개항 이후 근대적 화폐 제도의 도입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의 화폐 사상은 명목주의인가, 아니면 금속주의인가? 그 원류는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명목주의였다. 유가는 주화나 지폐는 사용 가치가 없지만 화폐가 되면 유용한 물건과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도입되기 전에 한국인은 아담 스미스처럼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의 괴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명목 가치가 소재 가치와 크게 괴리되면, 물가가 등귀하고 그것은 민생의 안정을 해쳤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화폐 발행에 따른 물가의 등귀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기 때문에, 물가 등귀를 막기 위해 명목 가치를 소재 가치에 상응하게 하는 금속주의가 현실적으로 무시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백전이 발행되기 이전에 조선 정부는 소재 가치가 명목 가치와 크게 괴리되지 않은 동전을 발행하였고, 그것이 물가 안정에 기여하였다. 안민론에 충실한 조선시대에는 서민 경제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에 통화 정책의 초점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고액권의 발행을 꺼린 이유도 물가 등귀, 소액권의 구축 등으로 안민론에 저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당백전이 발행되었던가? 근대적 경제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돈이 원래 사용 가치가 없다는 관념은 불식되지 않았고, 화폐 수량설과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화폐적 요인에 의한 인플레이션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 말까지도 명목주의와 금속주의가 섞여 있으면서 서로 충돌하였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당백전과 중국 동전의 통용책을 단기간 강제하는 데에 그친 것은 안민론의 강한 힘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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