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2. 근대적 화폐 제도 도입과 백동화 남발
  • 일본 화폐의 환류와 한국 정부의 백동화 남발
도면회

조선의 화폐 제도가 일본 화폐 제도에 종속됨에 따라, 일본 자본주의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가 일본의 금본위제 이행으로 인한 일본 은화의 대량 유출 사태였다. 일본은 1897년 10월 1일부터 은본위 화폐 제도를 금본위로 바꾸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 내에서 ‘본위화’처럼 유통하고 있던 일본 은화는 모두 금화와 교환하기 위해 일본으로 환류하게 될 형편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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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찍힌 1엔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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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새로 발행될 일본의 본위화는 최소액이 5엔의 금화였기 때문에 한국 주재 일본 상인들은 이것이 한국 내에서 원활하게 유통하지 않으리라고 우려하였다. 즉, 한국의 경제 상태에 비하여 너무 고액권이라는 점, 한국인은 눈에 익은 화폐만 신용한다는 점, 한국 금값이 비교적 저렴하기 때문에 금화가 평가 절하될 것이라는 점 등을 내세워 일본 금화가 한국 내에서 유통할 전망이 거의 없다고 예상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그 해결책으로 한국 내에서만 각인(刻印)을 찍은 1엔 은화를 유통시키기로 하고 한국에 지점을 둔 일본 제일은행을 통해 일본 대장성(大藏省)의 승인을 받았다. 제일은행은 이어 한국의 총세무사 겸 탁지부 재정 고문이었던 브라운(J. M. Brown)과 교섭, 각인 찍힌 원은을 해관세로 수납한다는 계약을 성립시켰다. 제일은행은 10∼11월에 걸쳐 일본에서 33만 엔의 각인 찍힌 은화를 수송해 와서 각인 찍히지 않은 은화와 교환해 주었다.115) 도면회, 앞의 글, 1989, pp.398∼399.

이로써 한국 내 무역 거래는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은값이 금값에 비해 계속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는 각인 은화 1매가 1원으로 유통되더라도 금본위제 국가인 일본과의 무역 거래에서는 1엔 이하로 평가 절하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의 대일 무역은 항상 수입 초과 상태였기 때문에 금화에 대한 각인 은화의 시세는 그보다 더 하락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 상인은 일본에서 수입한 상품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은화를 지불해야 하며, 이는 한국의 화폐 자산이 더욱 빠른 속도로 일본에 흡수당하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브라운 대신 탁지부 재정 고문으로 고빙된 러시아 인 알렉시에프(K. Alexieff)의 영향하에 1898년 2월 22일자로 각인 은화 통용 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은 일본과 영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5개월 만인 7월 11일에 해제되었으나 효과는 심대 하였다. 일본의 화폐 교환 만기일이 7월 31일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1898년 한 해 동안 은화는 100만 엔 이상, 지폐도 85만 엔 정도 유출됨으로써 한국 내 일본 화폐 유통량은 전체적으로 200만 엔 정도 격감하였다.116) 도면회, 위의 글, pp.400∼401.

한국 내에서 본위화 또는 고액권 화폐 역할을 하던 일본 화폐의 대량 유출은 무역·상업 거래를 마비시킬 수 있었다. 한국 정부도 각인 은화 통용 금지령을 해제한 후 1898년 7월 27일 은본위제를 지속하면 손해만 있고 이득은 없다는 취지하에 금본위제를 실시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금본위제를 실시하려면 금화를 주조하기 위하여 수백만 원 가치의 금지금(金地金)을 미리 확보하고 중앙은행을 설립할 만한 재정이 필요하였다. 한국 정부 재정은 1898년부터 만성적인 적자 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정부 재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1898년 후반부터 일본·프랑스·미국·러시아·벨기에 등 가능한 한 모든 방면으로 외국 차관을 도입하여 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차관 교섭은 1903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프랑스의 동맹, 영국·일본의 동맹 등 한국을 둘러싼 세력 각축, 그리고 이에 연결된 정부 대신들의 이해관계 대립과 맞물림으로써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정부는 차관 교섭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금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금본위제를 실시하겠다고 칙령을 반포한 직후인 1898년 8월 고종은 전환국을 한성에 가까운 용산 부근에 신축하게 하여 1900년 7월 말경 준공하였다. 같은 해 8월 말 인천 전환국 기계를 해체하여 이송하고 9월 초순에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으나 1901년 3월 용산 전환국에 화재가 발생하여 공장이 거의 다 타 버렸다. 다만, 기계에는 큰 타격이 없어 5월 30일 복구를 거의 완료하여 금화·은화를 주조하고 지폐를 발행할 준비도 갖추었다.117) 이석륜, 앞의 책, pp.352∼357.

전환국의 이전과 더불어 전환국의 관제상 지위는 잦은 변동을 겪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탁지부 산하 부서로만 규정되었던 전환국은 1900년 1월 17일 탁지부 산하 1등국으로 승격하였고, 7월 18일에는 황제 직속의 독립 관아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1901년 2월 12일 「금본위 화폐 조례」가 반포되면서 같은 달 16일 탁지부 소속 관아로 격하되었다가 1902년 2월 22일 다시 독립 관아로 승격하는 등의 변화를 보였다. 이처럼 전환국의 지위가 변동을 겪었지만, 화폐 주조 실권은 1898년 이래 고종의 측근 인물 이용익이 지속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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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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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은 함경북도 명천의 무인 가문 출신으로 임오군란을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받은 이래 광산 경영으로 황실 재정의 충실화에 혁혁한 공로를 세워 고종이 가장 신뢰하는 대신으로 부상하였다. 그는 1897년 이래 전국의 광산을 총괄하는 직위는 물론, 철도국 감독(1898), 내장원 경(1900), 탁지부 협판(1900), 지계아문 부총재(1901), 탁지부 대신 서리(1901), 서북철도국 총재(1902), 중앙은행 총재(1902), 탁지부 대신(1903), 군부 대신(1904) 등 정부 내의 요직을 맡아 정치·경제상의 실권까지 장악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정치·경제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비중이 큰 인물로 등장하였다. 전환국과 관련해서도 그는 1897년 11월 전환국장에 임명된 이래 면관과 재임명 등의 부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04년 전환국이 혁파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화폐 주조 업무를 관장하였다.118) 도면회, 앞의 글, 1989, pp.403∼404.

용산으로 전환국을 옮긴 후 한국 정부는 1901년 2월 12일 금본위 「화폐 조례」를 공포하였다. 이 조례는 세계적인 조류에 따라 금본위 제도를 채택하여 순금 2푼(0.75g)짜리 화폐를 1원(圜, ‘둥글 환’이 아니라 ‘둥글 원’이라 읽음)으로 정하여 본위 화폐로 삼고 은화 및 백동화 적동화는 모두 보조 화폐로 유통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화폐 계산법도 1냥=10전=100푼에서 1원=100전으로 바꾸었다.

이 조례는 일본 금본위 화폐 제도와 러시아 화폐 제도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금 화폐로 20엔·10엔·5엔, 은 화폐로 50전·10전, 백동 화폐로 5전, 청동 화폐로 1전 5리가 제정되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화폐 종류 역시 일본과 매우 유사하게 규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조례에 의해 1901년부터 시험 주조된 반원 은화, 5전 백동화, 1전 적동화에는 그전까지 각인되던 용(龍) 문양이 없어지고 러시아 화폐와 같이 독수리(鷲) 문양이 들어가게 되었다.119) 이석륜, 앞의 책, pp.326∼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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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전 백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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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전 백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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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 적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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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원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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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원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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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 정부는 재정이 궁핍하여 금화는 전혀 주조하지 않았으며 소액이나마 새로 주조한 화폐들도 더 이상 발행하지 않았으므로 금본위 화폐 조례는 공표만 되었을 뿐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한국 정부는 표 ‘전환국의 화폐 주조고’에서 볼 수 있듯이 1898년부터 예산상 주조액을 훨씬 상회하는 거액의 백동화를 주조 발행하였다. 2전 5푼 백동화 1매를 주조하면 1전 8푼∼2전의 주조 이익(법정 가치에서 지금 가치와 공임을 공제한 액수)을 얻을 수 있었으니, 백동화는 가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전환국은 1900년 1월부터 황실 경비를 조달하는 자금원으로 변질되어 매년 200만 원 이상의 백동화를 주조하였다. 1902년에는 매일 1만 3,000원씩 모두 280만 원을 주조하였는데 그중 150만 원은 황실용으로 따로 떼어 별도 금고에 보관하였을 뿐 아니라 전환국에서 궁내부로 납부한 백동화 어음도 무려 40만 원 어치를 초과할 정도였다. 즉, 백동화 주조 이익의 반 이 상이 황실로 들어갔다.

<표> 전환국의 화폐 주조고
단위 : 천 원
화폐
연도
5냥 은화 반원 은화 1냥 은화 2전5푼백동화 5전
백동화
5푼
적동화
1전
적동화
1푼
황동화
총 계 예산상주조액
1892 20   70 52   92   1 235  
1893                    
1894           36     36  
1895       161   176   4 341  
1896       35   284     319 1,282
1897       17   28     45 250
1898     36 349   248     633 250
1899     63 1,282   34     1,379 550
1900       2,030         2,030 650
1901   210   2,874         3,084 350
1902   706   2,886 87   15   3,694 350
1903       3,610 34   58   3,702 350
1904       3,448 5   10   3,463  
소계 20 915 169 16,744 126 903  83 5 18,961  
✽도면회, 「갑오개혁 이후 화폐 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한국사론』 21, 1989, 402쪽.

게다가 황제 및 측근 인물들은 내외국인에게서 상납금 또는 뇌물을 받고 특주(特鑄, 개인이 화폐를 주조하고 그 일부를 상납하는 행태)와 묵주(默鑄, 특정인에게 화폐 주조를 묵인해 주는 행태) 등의 명목으로 백동화 주조를 공공연히 허용하였다. 이에 더하여 1900년 말부터는 내외국인에 의한 백동화 사주(私鑄, 비밀리에 화폐를 주조하는 행태) 또는 밀수입이 극도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문에 사주 죄인 체포 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게재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었다. 정부 대신들 중 화폐 주조 기계를 1대 또는 2∼3대 설치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으 며, 프랑스 천주교당이나 청나라 공사관에 화폐 주조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일본인 거류지에서도 사주가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백동화 사주 기계 및 백동 지금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고 있었으며 백동화 밀수입도 대부분 일본인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엄청난 양의 백동화를 밀수입하여 수출품 대금으로 지급하기도 하고 경부선·경의선 철도 공사의 인부 임금으로 지불함으로써 폭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통감부에 의해 「화폐 정리 사업」이 시작되기 직전인 1905년 6월 말에는 백동화 유통량이 무려 2,300만 원에 달하였다.120) 원유한, 「전환국고」, 『역사학보』 37, 1968, pp.82∼84.

이처럼 남발된 백동화가 곧바로 법정 가치 이하로 폭락하면서 물가 폭등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일본 은화 및 지폐 유출로 유통 화폐량이 절대 부족했던 데다가 정부의 백동화 유통 강행 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어, 1899년 중반에는 인천항 무역 거래가 백동화로도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충청도에서도 백동화가 유통되기 시작했으며, 궁내부가 개성 인삼을 매점하면서 20여 만 원의 백동화가 황해도 및 평안도 진남포에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였다. 수출 무역 활성화와 엽전의 국외 수출, 백동화 남발로 백동화 시세가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1899년 하반기부터는 엽전 500냥(100원)을 백동화로 바꾸려면 백동화 500냥에 6냥의 웃돈을 더 주어야 하게 되었다. 이를 ‘엽백가계(葉白加計, 엽전과 백동화 사이의 가계)’라고 하는데 아직 백동화가 통용되지 않는 지역의 상인과 백동화 통용 지역 상인 사이의 거래에서는 엽백가계가 성립할 수밖에 없었다. 1901년 이후 군산항과 같이 엽전과 백동화가 동시에 유통하는 지역에서는 엽백가계를 셈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되었다.

한국 정부가 백동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 각종 지출 항목을 백동화로 바꾸고 지방관들에게 백동화로 조세금을 징수하라는 훈령을 여러 차례 내린 결과 백동화 통용 지역은 1901년 말 경기·충청·황해도 전 지역과 평안·강원도의 일부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백동화 유통 지역이 확대되는 속도보다 백동화 시세가 하락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도표 ‘1898∼1905년 사이 부산·한성의 엽전·백동화 시세’에서 보듯이 백동화 시세는 1898년 상반기까지 20할(백동화 10냥=일본 화폐 2엔)의 법정 가치를 유지하다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02년 초 10할(백동화 10냥=일본 화폐 1엔)대까지 폭락하였다. 이와 동시에 엽전 시세도 1899년 상반기까지는 백동화와 비슷한 추세로 하락하지만 그 이후에는 평균 15할(엽전 10냥=일본 화폐 1엔 50전) 이상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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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05년 사이 부산·한성의 엽전·백동화 시세
1898∼1905년 사이 부산·한성의 엽전·백동화 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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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백동화 가치 폭락의 원인이 정부가 본위화를 주조하지 않고 백동화만 남발하면서 특주·묵주 등으로 백동화 사주를 조장한 데 있다는 점은 도외시한 채, 오로지 백동화 사주와 밀수입을 막는 데만 치중하였다. 한국 정부는 각국 공사관에 “한국인으로서 확실한 증빙서를 지니지 않은 자에게는 동지금(銅地金)을 팔지 말라고 귀국 상민에게 명해 달라.”고 협 조 요청을 하였지만 각국 공사관으로부터 냉소적인 회답만 받았다. 1902년 3월에는 정부 회의에서 법부와 경무청으로 하여금 백동화 사주와 관련된 모든 행위를 엄단할 것, 사주에 필요한 기계와 동지금 밀수입 방지, 조세금은 백동화로 징수하게 할 것, 본위화와 적동화를 주조할 것, 황제는 백동화 주조를 대량으로 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의 대책을 가결하였다.121) 도면회, 앞의 글, 1989, pp.419∼420.

그러나 각국 공사관의 냉소적 반응까지 받고 이와 같은 대책을 수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동화 남발은 중단되지 않았다. 조세금을 백동화로 징수하라는 훈령도 경상·전라·함경도 등에서는 준수되지 않았다. 단지 사주와 밀수입 단속만 이전보다 엄중해지고 백동화 유통 지역이 조금 더 확대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1902년 말까지도 경상·전라·함경도 및 강원도 동부와 평안도 북부에는 여전히 엽전만 유통하고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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