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3. 화폐 정리 사업과 한국인 화폐 자산의 수탈
  • 백동화 정리와 화폐 금융 공황
도면회

백동화 남발과 그로 인한 폐해는 한국 민인들뿐만 아니라 일본 상인들로서도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였다. 1904년 8월 재정 고문으로 고빙된 메가타 다네타로는 한국 재정의 문제점을 화폐 제도의 문란, 왕실과 정부 재정의 혼동, 세출의 남발과 징세 기관의 문란 등 세 가지로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화폐 제도를 정리하고 중앙은행 제도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1904년 11월 28일 전환국을 폐쇄하고 12월 말 고종 황제의 재가를 받아 일본 제일은행을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합법화시키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 일본 제일은행은 1905년 1월 31일 한국 정부와 일련의 계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세입 세출 업무를 총괄하고 화폐 정리에 관한 모든 업무를 위임받았다. 이들 계약을 통해 한국 정부는 제일은행으로부터 300만 엔의 차관을 도입하여 다시 제일은행에 화폐 정리 자금으로 지급하였으며, 제일은행이 불법으로 발행하여 유통시키고 있던 제일은행권을 공사 거래에 무제한으로 통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일본 의 일개 사립 은행에 불과한 제일은행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지위를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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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이후 발행 제일은행권 1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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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이후 발행 제일은행권 1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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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한국 정부는 메가타의 지침에 따라 1월 18일 ‘화폐 정리 사업’을 위한 구체적 지침을 일련의 칙령들로 반포하였다. 요점은 한국 정부가 1901년에 제정 공포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한 금본위 화폐 조례를 1905년 6월 1일부터 실시할 것, 금본위 화폐 조례에 규정된 화폐와 품위·중량·형체가 동일한 화폐, 다시 말해서 일본 화폐를 지장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신구 화폐의 교환은 ‘구화폐 은본위 10냥(2元)=신화폐 금본위 1원(圜)’의 비율로 하되, 구백동화의 교환 및 환수는 7월 1일부터 시작하며 교환 기간 종료 후에는 통용을 금지하고 이후 6개월간 조세금 납부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제일은행은 이를 위해서 오사카에 있는 일본 조폐국에 향후 한국에 유통시킬 신화폐를 제조하는 업무를 맡겼다.129) 이석륜, 앞의 책, pp.372∼387.

한국 정부는 이러한 내용을 구체화하여 4월부터 6월 사이에 탁지부 고시 또는 훈령으로 각 지방에 전달하였다. 화폐 정리 방식은 두 가지였다. 구백동화 또는 엽전을 조세금으로 납부하는 환수 방식과 구화폐를 한성 및 지방에 설치된 교환소에서 7월 1일부터 2 대 1의 비율로 신화폐와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구백동화 및 엽전과 교환해 주는 신화폐는 일본은행권·제일은행권 및 새로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하는 신백동화(5전)·신은화(20전 및 50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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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조폐국 제조 주화-20전 은화
오사카 조폐국 제조 주화-20전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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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전 백동화
5전 백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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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화폐들 중 제일은행권은 앞서도 보았듯이 일본은행권과는 교환할 수 있어도 금화와는 직접 교환할 수 없는 불환 지폐였다. 제일은행은 표 ‘1905년 6월 말∼1909년 11월 말 사이 화폐 유통량 추이’에서 보듯이 화폐 정리 사업이 종료되는 1909년 11월까지 본위화인 금화는 한 푼도 발행하지 않았다. 제일은행권만 압도적인 분량으로 발행하고 소액 상거래를 위한 보조 화폐를 그에 걸맞은 비중으로 발행하였을 뿐이다. 이 점에서 제일은행권은 한국의 부를 “아무 쓸데없는 종잇장으로 수탈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표> 1905년 6월 말∼1909년 11월 말 사이 화폐 유통량 추이
단위 : 엔(圓)
화폐
연도
제일은행권 신보조화 구백동화 엽전 일본 화폐 합계
1905년 6월 6,068,832 0 11,500,000 6,500,000 1,300,000 25,368,832
1905년 말 8,125,267 367,680 6,530,000 6,393,000 1,300,000 22,715,947
1906년 말 8,245,377 2,137,543 5,000,000 5,823,000 1,300,000 22,505,920
1907년 말 11,807,174 4,100,175 3,285,000 4,704,000 959,000 24,855,349
1908년 말 9,648,764 3,214,525 1,800,000 4,406,000 537,400 19,606,689
1909년 11월 12,340,378 5,696,265 1,970,132 2,463,933 848,000 23,318,708
✽여기서 구백동화 유통량은 한국 화폐 단위로 2,300만 원(元)인 것을 당시 교환 비율대로 환산하면 1,150만 원( )이 되며, 일본 화폐 단위로도 1,150만 엔(圓)이 된다.
✽주식회사 제일은행, 『한국 화폐 정리 보고서』, 1909, 319∼322쪽.

이렇게 해서 6월 1일부터 금본위 화폐 조례가 실시되었다. 백동화는 정부에서 남발한 것과 특주·묵주·사주·밀수입에 의한 위조 백동화가 대량으로 유통하고 있었는데 탁지부는 앞의 훈령들을 발하면서도 위조 백동화의 교환에 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공표하지 않았다. 위조 백동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평안도 90∼95%, 충북·황해도 80∼90%, 충남 70∼80%, 경기도 40∼50%, 한성·인천 20∼30%였으니, 한국민은 거액의 위조화 교환 여부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민은 자신이 소지한 백동화가 반액으로 평가 절하됨은 물론 자칫하면 위조 백동화로 간주되어 교환이 불가능할지 몰라, 소유한 백동화로 토지·가옥 등 부동산이나 면포 등의 상품을 매입하거나 백동화를 중국인·일본인에게 판매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손해를 면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백동화 유통량은 더욱 늘어나고 시세가 더욱 하락하였으나 일본인·중국인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동화를 대량 매입하고 교환 방침이 공표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6월 24일자로 백동화 교환 방법이 고시되었다.130) 이석륜, 앞의 책, pp.390∼392. 7월 1일부터 백동화를 교환하는데 백동화 중 품위·중량·형체가 완전한 갑종(甲種)은 1매당 금본위 2전 5리로 교환해 주고, 이에 합당하지 않은 부정한 백동화 을종(乙種)은 1매당 1전의 비례로 매수하되, 형체나 품질이 조악하여 화폐로 인정하기 어려운 병종(丙種)은 교환·매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교환소는 백동화 유통 지역 중 한성·평양·인천·군산·진남포 등 다섯 군데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백동화는 한국 정부가 은본위 화폐인 5냥 은화의 보조화로서 2전 5푼의 법정 가치로 발행했던 것이므로, 금본위 화폐 조례를 실시하더라도 당초의 법정 가치대로 교환해 주어야 했다. 즉, 일본이 1897년 은본위에서 금본위로 화폐 제도를 개혁할 때 은화 1원=금화 1원의 비율로 화폐 교환을 실시한 것처럼, 한국 정부도 은본위 1원=금본위 1원(圜)으로 교환해 주는 것이 마땅하였다. 백동화의 경우 법정 가치 2전 5푼은 은본위 1원(엽전 단위로는 5냥=50전) 은화의 20분의 1에 해당하므로 금본위로 개혁할 때는 금본위 1원(신화폐 단위로는 100전)의 20분의 1인 신화폐 단위 5전으로 교환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타는 은의 국제 가격이 1897년 당시에 비하여 하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본위 2원=금본위 1원의 비율을 규정하였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는 일본의 은화는 실제로 대량 주조되고 본위화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금화와 1 대 1 비율로 교환해 주어도 무방하였지만, 한국은 은화를 거의 발행한 적이 없고 보조화인 백동화만 발행하여 유통계에서는 백동화에 포함된 금속의 실질 가치대로 평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본위화인 은화가 발행되지 않아 백동화와 엽전 등 보조화로 규정된 화폐가 본위화처럼 유통한 것이다. 이미 한국민들조차 일반 상거래에서 백동화와 엽전을 2 대 1의 비율로 교환하고 있는 상황에서 화폐 정리 사무를 주관하는 메가타로서는 백동화를 법정 가치대로 교환해 줄 경우 화폐 정리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오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갑종의 교환 가격은 앞서 도표 ‘1898∼1905년 사이 부산·한성의 엽전·백동화 시세’에서 보았듯이 1904∼1905년경 백동화 시세가 법정 가치의 반액인 은본위 1전 2푼 정도로 하락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당한 교환이라고 할 수 있다.131) 백동화 시세 10할은 백동화가 2전 5푼이 아니라 1전 2∼3푼으로 유통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같은 시세로 유통하던 을종 백동화나 병종 백동화를 소지한 한국민들은 화폐 정리 과정에서 화폐 재산이 반 이하로 평가받거나 아예 교환을 할 수 없게 되어 심각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국인은 화폐 정리 사업 개시 이전에 백동화를 동산·부동산 구입에 투자하거나 일본인·중국인에게 헐값에 방매하여 백동화 교환을 청구하는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화폐 정리 사업을 담당한 주무 부서인 탁지부 대신 민영기에 의하면 전체 교환액의 60%는 일본인, 30%는 중국인이었으므로 한국인이 교환을 요구한 것은 겨우 10%에 불과하였다.

신화폐와의 교환을 위하여 시중에 유통하던 백동화가 대부분 제일은행 창구로 들어갔기 때문에, 한국 상인은 자신이 발행했던 어음의 만기가 돌아오거나 신용 거래한 상품의 대금을 지불해야 할 기일이 오더라도 이를 결제할 현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현금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와 가옥을 처분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파산한 상인이 한성에서만도 수십 명에 달하였다. 1905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파산한 한 성 대상인들의 부채액을 업종별로만 보더라도 포목상 7명 82만 원(元), 지상(紙商) 4명 34만 원, 미곡상 3명 6만 원, 비단 상인 2명 20만 원, 신발 상인 2명 10만 원, 객주업자 2명 40만 원, 서적 및 사금상 2명 17만 원, 담뱃대 상인 1명 8만 원, 도합 217만 원에 달하는데 이는 화폐 정리 이전 백동화 유통량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 밖에 중소 상인들로 상품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야반도주하거나 파산한 자가 한성 내에서만 수백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132) 김재순, 「로일전쟁 직후 일본의 화폐금융정책과 조선 상인층의 대응」, 『한국사연구』 69, 1990, pp.154∼155.

이러한 금융 공황은 메가타가 주도한 조세금 징수 제도 개혁에 의하여 더욱 폭발적으로 밀어닥쳤다. 그 이전까지 조세금은 지방관이나 관찰사가 징수하여 중앙에 상납해 왔고 이들 대부분은 외획·세납차인 제도를 이용하여 조세금을 상업 자본으로 전용해 왔었다. 메가타는 제일은행이 한국 정부의 세입 세출 사무를 맡게 한 후 1905년 7월 1일부터 외획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조세금은 제일은행의 각 지점 및 출장소 11개 소(한성·인천·부산·군산·목포·평양·대구·진남포·원산·성진·개성)에 납입하게 함으로써 지방관이나 상인이 조세금을 상업 자본으로 사용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끊어버렸다.133) 김재순, 위의 글, pp.137∼138. 조세금을 상업 자본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 중개 상인들은 지방에서 미곡 등 곡물 매입을 할 수 없게 되고 농민들은 수확물을 팔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다시 농민들의 현금 수입을 감소시켜 면포 등 상품 판매를 부진하게 만들고 수입 상인 역시 도산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만들어 내었다.

전통적으로 한성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종로 상인들은 1905년 7월 19일 경성 상업 회의소를 결성하고 화폐 금융 공황으로 인한 상업 침체와 상인 파산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정부에 대해 상인 구제 자금으로 300만 원(圜)을 무이자·무담보로 대출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철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메가타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고종은 300만 원 대신 자기 명의로 된 미쓰이 물산 회사 수표와 제일은 행 수표 합계 30만 엔과 백동화 10만 원(元)을 대출해 주도록 지시하였다. 메가타는 자기 동의 없는 대출은 재정 고문으로 고빙할 때의 계약 조건에 위배된다고 강력히 항의하고 미쓰이 물산과 제일은행에 현금 지불을 못 하게 하였다.

종로 상인에게는 메가타가 원수와 같았다. 이들은 철시 투쟁을 계속하면서 메가타 해임 운동에 들어갔다. 일본인들도 메가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메가타는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을 공황 수습 자금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가타는 내탕금 30만 엔 중 15만 엔은 한성 공동 창고 회사를 설립하여 상품을 담보로 대출하게 하고 15만 엔은 자금 사정이 급한 한국인에게 대출해 주도록 하였다.

수백만 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하는 상인들에게 이 정도의 자금 대출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파산자 수는 점차 늘어났다. 경성 상업 회의소는 11월 7일자로 다시 한국 정부에 「한국 폐제 개혁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여 화폐 정리 사업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개선 방법을 제안하였다. 11월 13일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의 청원서를 일본 내각 총리 가쓰라 타로(桂太郞)에게 제출하였다.

한국 상인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도달하자 메가타는 일본 정부에 요청하여 150만 엔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그는 앞서 한성에 설립했던 것과 같이 각 지방에 공동 창고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 상인들이 상품 등을 담보로 제일은행권과 신화폐를 융자받을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각 지방에 어음조합을 만들고 이에 가입한 조합원은 신화폐를 바탕으로 한 어음을 발행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1906년 3월 이후에는 전국 각도에 농공은행을 설치하고 이를 보완하는 기구로 1907년 지방 금융 조합을 설립하여 화폐 정리 업무도 담당하게 하였다. 이와 아울러 황실의 사금고 역할을 해왔으나 공황으로 폐점한 대한천일은행에 자금을 대부하여 회생시키는가 하면 1903년 이래 제일은행 한국 지점에 종속되어 있던 한성은행에도 자금을 보조해 줌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제일은행을 정점으로 한 식민지적 금융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처럼 화폐 정리 사업은 식민지적 금융 체제를 수립하는 한편 한국인 상층 자본가를 일본에 종속적인 위치로 편입시켰다. 한성 공동 창고 회사 설립 과정에는 조진태, 조병택, 배동혁, 백완혁 등 종로의 유력한 상인들이 출자하였고, 한성 어음 조합에도 자금력이 든든한 한국 상인 40여 명이 조합원으로 출자하였다. 1906년 한성 농공은행 창립 시에는 이준상, 박의병, 홍충현, 고순재, 조진태, 조경준, 김두명 등 다수가 참여하였으며 지방의 금융 기관 설립에도 역시 그 지방의 유력 상인들이 동참하였다. 이들은 모두 제일은행에 예속적인 지위를 갖고 제일은행권과 신화폐 등을 널리 유통시키면서 화폐 정리 업무를 진척시켰다.134) 오두환, 앞의 글, pp.245∼25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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