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4장 일제 강점기의 화폐
  • 3. 주화와 예금 통화
  • 주화, 일본 화폐가 점령하다
정병욱

별도의 은행권이 통용된 지폐와 달리 주화(경화)는 일본 화폐와 통일되었다. 우선 ‘화폐 정리 사업’으로 인해 구화(은화, 백동화, 동화)는 환수되어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엽전의 일부만 준보조화로서 소액 거래에 이용되었다. 1911년 ‘화폐 정리 사업’이 종료된 시점의 주화 유통고는 신화, 보조화(일본 화폐), 엽전, 구화순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화폐 조례」에 의한 신화도 일본 화폐에 통일한다는 방침을 취해 점차 보조화를 늘려 가는 가운데, 1918년 4월 일본의 「화폐법」을 조선에 실행하였다(칙령 제60호). 이제 주화는 일본과 동일한 법률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구화는 1920년 12월 말까지만 통용을 인정하였고 이후 5년간의 교환 기한을 두어 전액 수거하였다. 엽전만은 기존대로 통용을 인정하였다. 결국 1925년경에는 보조화와 엽전만 통용되었고, 1930년대 들어서면 엽전도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퇴장하거나 지역 내 소거래에서 일부 사용되었다.

이로써 식민지 조선에서 주화는 대부분 일본 조폐국(造幣局)에서 주조된 보조화가 유통되었고, 지폐는 내각 인쇄국에서 제조되었다. 이전 어느 시대보다 한국인은 화폐를 많이 사용했지만 제조 기술은 모두 일본과 일본인에게 축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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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화 10전(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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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화 10전(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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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련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90전 전후였던 일제 강점기에 서민에게 가까운 화폐는 지폐보다는 주화였다. 구경도 못해 본 지폐와 달리 “손에 한줌 쥐고 만지면 바그락바그락 하는” 50전짜리 은전, “한 푼 던지면 눈깔사탕 두 개 주는” 엽전 같은 표현은 그 친숙함을 말해 준다. 모던 보이나 모던 걸에게 1원은 “애인과 봄날 하루 즐기기는 정말 한심”한 돈이지만, 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복녀 같은 빈민이 받은 하루 품삯은 그 3분의 1도 안 되는 32전이었다. 1920년대 말 잡지에는 20전 피서법, 10전 피서법이 궁리되곤 했는데, 20전 피서법으로는 가족과 함께 수박 먹기(수박 한 덩이 깎아서 15전, 얼음 2전, 설탕 3전), 10전 피서법으로는 서늘한 사진과 기사를 모아놓은 잡지 『어린이』 보기가 소개되었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일용잡화를 중심으로 ‘10전 균일점’이 유행하였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최남의 동아 백화점이나 박흥식의 화신 백화점에서 한 동안 ‘10전 판매’를 하여 서민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싼 상품을 공급할 공장이 식민지 조선에는 없어 일본처럼 상설화되기는 어려웠다.148) 「萬人必讀의 經濟常識 第4課!! 돈, 돈, 돈 이야기」, 『別乾坤』 42, 1931년 7월 ; 「모뽀모걸의 新春行樂 經濟學」, 『별건곤』 51, 1932년 5월 ; 「단돈 二十錢 避暑秘法」, 『별건곤』 15, 1928년 8월 ; 「십전 피서법」, 『별건곤』 22, 1929년 8월 ; 「十錢 均一店의 有利와 經營, 小賣商人의 活路는 여기에」, 『三千里』 6-8, 1934년 8월 ; 「十錢 均一店(텐센 스토아)은 朝鮮서 成功할 것이냐」, 『삼천리』 7-6, 1935년 7월.

<표> 일제 강점기 주화(硬貨) 유통고
단위 : 천 원
연도 말 금화 보조화 구한국 화폐
신화 구화 엽전
1911 6 3,202 4,947 495 1,573
1920 - 6,529 1,904 477 117
1925 - 9,317 - - 104
1930 - 8,114 - - 16
1945 - 33,495 - - -
✽조선은행 조사부, 『조선 경제 연보』 1948년판, Ⅲ-66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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