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4장 일제 강점기의 화폐
  • 3. 주화와 예금 통화
  • 예금 통화의 등장
정병욱

금융 기관이 늘어남에 따라 상인이나 사업가는 자신의 예금을 현금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예금 통화의 대표적인 예가 수표이다. 은행에 당좌 예금 계좌를 개설하고 은행을 지불인으로 한 수표를 발행하여 현금 대신 거래자에게 건네면, 거래자는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거나 또 다른 자에게 지불할 수 있었다. 은행이 달라도 현금은 지불되었고, 은행끼리는 어음 교환소를 통해 정산하였다. 은행과 당좌 대월 계약을 맺으면 일정한 한도 내에서 당좌 예금액을 초과하는 수표를 발행할 수도 있었다. 수표 제도는 1899년에 제정된 일본 상법 제4편에 의거하여 식민지 조선에서도 시행되었는데, 국제 교역이 늘어나자 제도 통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30년대 초 몇 차례 국제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기존 법령을 보완한 「수표(小切手)법」이 1933년 공포되었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를 「조선 민사령」에 명시하여 1934년 1월부터 실시하였다.149) 「手形竝小切手法規の改正に就て」, 『朝鮮』 226, 193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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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는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 많은 금액을 손쉽게 거래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상인이나 사업가 사이에서 널리 쓰였다. 어음 교환소의 교환 수표액은 1910년 1413만 원에서 1935년 9억 2406만 원으로 약 65배 증가하였고, 당시 예금 통화로 간주되던 은행의 당좌 예금고는 같은 기간 729만 원에서 6102만 원으로 약 8배 증가하였다. 반면에 같은 기간 통화(현금) 유통고는 2990만 원에서 1억 2696원으로 4배 증가하였다. 당좌 예금/현금 비율이 0.2에서 0.5로 증가하여 예금 통화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 자산가들도 일본인만큼은 아니지만 예금 통화 이용이 늘었다. 1912∼1917년간 경기도 내 은행의 당좌 예금 추이를 보면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절대액이 3∼4배 적지 만 그사이 2배 정도 증가하였다. 채만식이 1937∼1938년에 쓴 『탁류』에는 수표 사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사업가들 사이에 예금 통화 이용이 빈번했음을 말해 준다. 군산의 한 은행 당좌계에 근무하는 소설 주인공은 고리대금업자, 농업 회사, 도매 상인의 수표를 위조하여 무려 3,300원을 그들의 계좌에서 빼내어 ‘미두(米豆)’ 투기에 사용하였다. 예금액이 많고 은행과 거래가 빈번한 예금주의 경우 위조 수표 몇 장이 은행에 제시되어도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150) 朝鮮總督府 財務局, 『朝鮮金融事項參考書』 1939년판 ; 朝鮮總督府 京畿道, 『朝鮮總督府京畿道統計年報』 해당연도판 ; 蔡萬植, 『濁流』 상, 삼중당, 1976, pp.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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