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5장 대한민국의 화폐
  • 1. 광복과 우리 돈
  • 조선은행권의 제조와 변모
배영목

조선은행이 1911년부터 조선은행권 발행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 은행권은 일본 내각 인쇄국이 제조하였다. 조선 총독부 인쇄국도 조선은행권을 일시 제조한 적이 있고, 50전권, 20전권, 10전권 등의 소액 지폐도 제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전쟁 상황 악화로 1945년부터 화폐 제조를 조선 서적 주식회사가 담당하였다. 조선은행은 비상시에 대비해 100원권 21억 원, 1,000원권 70억 원 등 당시로서 엄청난 금액의 은행권 제조를 이 회사에 맡겼다. 이때의 은행권은 오프셋 방식으로 인쇄되었고 용지도 지폐용이 아닌 모조지였기 때문에 위조의 위험성도 높았다.159) 한국은행, 『한국의 화폐』, 1994, pp.107∼108.

광복 직후에도 조선은행의 일본인 직원이 미군정이 화폐 발행권을 접수할 때까지 화폐의 제조와 발행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이 조선 서적 회사가 사용하였던 100원 원판을 일본인이 경영하던 근택(近澤) 인쇄소에 8 월 하순부터 9월 초까지 조선은행권 100원권을 인쇄하도록 맡겼다. 이 은행권은 도면 1에서 본 조선은행권과 같은 것으로 일련번호가 없었다. 그런데 근택 인쇄소 평판 과장으로 있던 김창선(金昌善)이 100원권 아연판을 절취 보관하고 있었다. 이 판이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산당으로 넘어갔고, 공산당원은 이 판을 이용하여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약 1200만 원의 위조 지폐를 제조하여 그들의 활동비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정판사(精版社) 위폐(僞幣) 사건이다.160) 한국은행, 앞의 책,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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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신10원권(앞면)
조선은행권 신10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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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신10원권(뒷면)
조선은행권 신10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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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이를 계기로 공산당의 활동을 불법화하였고 조선은행이 은행권 제조 업무를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다. 사실 광복 이후 이 위조화뿐만 아니라 100원권 위조화 30여 종이 시중에 범람하여 민간이 고액권 수령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은행조차 고액권인 100원권의 예금을 거부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161) 한국은행, 앞의 책, p.116.

광복 후 새로 제조된 조선은행권의 지질이 나빠지기는 하였지만 조선은행이 은행권에 있는 일본을 상징하는 도안을 줄이고 위조도 방지하기 위해 도안을 부분적으로 바꾼 조선은행권을 1946년 7월부터 제조하여 사용하였다. 인쇄는 오프셋 인쇄에서 활판 인쇄로 변경하고 일본 정부 휘장인 오동꽃을 무궁화로 바꾸고 일본은행권 태환 규정을 삭제하고 제조처도 조선 서적 인쇄 주식회사로 변경하였고 뒷면에도 일본 국화인 벚꽃을 무궁화로 바꾸었다. 오동꽃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은행권의 화폐 주권을 보여 주는 상징인 무궁화로 바뀌었지만, 조선은행권 속의 장수 노인만은 자신들이 숭상하는 인물이 정파마다 다른 정치적 혼란 속에 장수하고 있었다.

조선은행권이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행권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1949년 9월부터 발행된 신10원권부터이다. 이 은행권의 앞면에는 우리나라 국권을 상징하는 무궁화 문양은 물론이고 독립문이 등장하였다. 다만 뒷면에는 이전과 같이 조선은행 전경이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도안은 10원권뿐 아니라 5원권, 50십전, 10전, 5전 등의 소액권에도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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