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5장 대한민국의 화폐
  • 2. 세 차례의 화폐 개혁
  • 전란 수습과 화폐 개혁
배영목

1953년에 접어들어 휴전 협상 진행으로 전쟁이 소강 상태를 보이고 그에 따라 전시 경제는 재건 사업으로 평시 경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전쟁 과정에서 전비 조달을 위한 통화 남발과 생산 시설 파괴에 따른 생산위축 등으로 인플레이션이 여전하였다. 전쟁 전에 발행된 은행권은 560억 원이었지만 1952년 연말에는 1조 144억 원에 이르러 2년 반 동안 18배 정도 증가하였고, 물가 지수는 1950년 6월을 100으로 볼 때 1086(1950년 6월 100)로 전쟁 전에 비해 11배 정도 상승하였다.

정부는 1953년 2월 대통령 긴급 명령 제13호로 「제2차 긴급 통화 및 금융 조치」를 실시하였다. 긴급 통화 조치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53년 2월 17일부터 구원화(舊圓貨) 표시 한국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하고 대신 에 새로 발행한 환화(圜貨) 표시 한국은행권을 법화로 통용하되 교환 비율은 100원=1환으로 화폐 단위를 변경하는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즉 명목 절하를 실시하였다.168) 한국은행은 디노미네이션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실시되고 있다고 하였다. 첫째, 장기간 경제 성장과 물가 상승으로 늘어난 화폐 금액을 줄여서 계산·지급·회계상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둘째, 과거 달러와 프랑의 비율 조정에서 보듯이, 자국의 통화 자리수를 줄여 통화 가치를 높임으로써 자국 통화의 대외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셋째, 브라질,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에서와 같이 화폐 가치의 급격한 하락에 대응하여 명목 절하를 크게 하면 기대 인플레이션을 수습할 수 있다(www.bok.co.kr). 광복 후 화폐 단위가 처음으로 변경되면서 동시에 절하되었던 것이다. 둘째, 2월 17일부터 2월 25일까지 9일 동안 구은행권, 어음, 수표 등 원화로 지급 지시가 있는 것은 모두 금융 기관에 예입하고 금융 기관에 대한 일체의 금전 채권 채무를 신고하도록 하였다. 셋째, 금융 기관의 예금 등 원화 금전 채무의 지급은 2월 25일까지 금지하고 금융 기관에 예입한 자연인에 대해서는 2월 25일까지 생활비로 1인당 500환을 한도로 하여 새 은행권이 지급되었다.169) 한국은행, 앞의 책, 2000, pp.390∼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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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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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폐 개혁에서 과잉 구매력을 흡수하기 위해 예금의 일부를 동결하는 금융 조치도 병행하였다. 긴급 통화 조치에 따라 예입된 구권 예금은 3만 원 이상, 저축성 예금을 제외한 기존 예금은 10만 원 이상의 금액에 대해 20∼100% 금액별 체증률을 곱한 만큼의 금액은 특별 정기 예금, 특별 국채 예금으로 전환하였다. 이 예금에 대한 만기 전 인출이나 담보 제공이 금지되고, 체납 세금, 연체 대출금이 있으면 이를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예금으 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로 금융 경색이 초래되자 금융 통화 위원회는 1953년 3월 동결 예금 범위에서 대출을 허용하고 한국은행이 이 금융 기관에 최고 100%까지 대출하게 함으로써 금융 조치는 두 달 후 사실상 철회되었다.170) 한국은행, 『우리나라의 통화 정책』, 2002, p.391.

정부는 제1차 통화 교환 때와는 달리 화폐 단위를 100분의 1로 절하하고 과잉 구매력 흡수, 체납 국세 징수, 연체 대출금 회수 등을 위해 통화 교환을 제한함으로써 통화량 수축을 통한 인플레이션 수습을 도모하였다. 통화 교환은 97.4%에 이르렀지만 자금 동결은 25%에 불과하였다. 이로 인한 통화 팽창의 억제는 일시적이었다. 결국 이 화폐 개혁에서 통화 남발과 인플레이션 누적에 따라 화폐 금액의 증가에 따른 회계 비용을 낮추는 것에서는 성공하였지만 과잉 구매력 흡수를 통해 물가 상승 기대를 낮추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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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긴급 통화 조치 당시의 은행원
제2차 긴급 통화 조치 당시의 은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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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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