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6장 북한의 화폐
  • 2. 북한 화폐의 변천
  • 1959년 화폐 교환
이영훈

1959년 화폐 교환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데 대하여」라는 내각 결정 11호에 의거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에 걸쳐 실시하였다. 화폐 교환은 교환 한도를 두지 않고 구화폐 북조선중앙은행권 100원에 대하여 신화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중앙은행권 1원의 비율로 교환되었다. 새롭게 발행된 신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시의 은행권 50전, 1원, 5 원, 10원, 50원, 100원의 6종과 소액 주화 1전, 5전, 10전의 3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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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앞면)
1959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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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뒷면)
1959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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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화폐 교환은 생산 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되고 자립적 민족 경제 토대가 튼튼히 마련되어 화폐의 안정성이 강화된 조건에서 우리나라에 수립된 자립적 화폐 제도를 공고히 하며 유통과 계산의 편의를 더 잘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214) 리원경, 앞의 글, p.192.

북한의 1959년은 1958년 농업과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었으며 전후 복구가 마무리되고 북한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시현(示現)하던 해였다. 바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특히, 이러한 분위기는 ‘천리마 운동(1956.12)’과 강선 제강소에서 일어난 ‘천리마 작업반 운동(1959.3)’ 등 집단적 사회주의 노력 경쟁 운동이 전개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이 시기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30%를 웃돌았으며, ‘머지않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표명되기도 하였다.215) 발전량, 석탄, 철광석 등을 비교하면서 “우리나라 북반부는 사회주의공업-농업국으로서 확고한 토대를 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부 중요한 공업 제품의 인구 1인당 생산에서 일본을 이미 거의 따라 잡았거나 혹은 앞서고 있습니다.” 김창만 동지(함경남도 당 단체 대표)의 토론, 국토통일원, 1988, p.183. 그로 인해 공업 생산물 원가가 매년 10% 정도 하락하였으며 물가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일곱 차례나 하락하여 북한 화폐의 구매력은 크게 높아졌다.

그에 따라 높아지는 화폐의 구매력 증가에 맞게 가격 기준을 변동시킴으로써 화폐 액면을 합리적으로 개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기에는 고성장 추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와 함께 경제적 성과를 화폐 교환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판단된다.216) “새 화폐의 발행은 미제 강점하의 남조선에서 인풀레가 격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진행된 것인 만큼 전체 조선 인민 앞에 사회주의적 화폐 제도의 우월성과 자본주의 화폐 제도의 취약성을 뚜렷이 밝혀 놓았다. 그러므로 신구 화폐 교환은 남반부 인민들에게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동경심을 더욱 두텁게 하고 조국 통일을 위한 그들의 투쟁을 힘 있게 고무하는 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놀 수 있었다.” 리원경, 앞의 글, p.206. 100 대 1의 화폐 교환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고액권 100원을 유지한 것은 고도 성장에 대한 낙관과 그에 따른 고액권 수요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1959년 화폐 개혁의 동기는 1947년의 그것과 대비된다. 1947년 화폐 개혁이 과거 일제 및 소군정하의 화폐 제도의 부작용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화폐 제도의 확립을 지향하였다면, 1959년의 화폐 교환은 새로운 경제 환경 변화에 맞게 가격 기준을 바꿈으로써 북한 화폐의 대내외적 위신을 높이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59년 화폐 교환은 1947년의 화폐 개혁과 달리 가격 기준 변동을 주내용으로 할 뿐 주민들의 소득 분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무차별·무제한 교환 방식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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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화폐 교환 은행권 50원권의 추수하는 여인
1959년 화폐 교환 은행권 50원권의 추수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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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행된 화폐에는 당시 사회주의 건설의 열기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1956년 12월에 시작된 천리마 운동은 이후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천리마 시대의 전형적인 인간상은 공산주의라는 ‘미래의 낙원’을 위해 ‘오늘의 땀’을 흘리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시인 오영재는 「조국이 사랑하는 처녀」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217) 윤재근·박상천, 『북한의 현대문학』 2, 고려원, p.281.

아름답다, 조국이 사랑하는 처녀는 아름다워라

네가 손으로 하던 일들이

모두 기계로 대신하게 될 때

더 좋은 해들이 너를 맞아주고

너를 안고 조국이 달려가는 미래의 락원에서

너는 더 행복한 화원을 가꾸게 될 것이다

그때면 그 꽃을 너에 비기며

사람들은 더 아름다운 노래를 너에게 불러줄 것이다.

당시 새롭게 발행된 화폐에는 과일 따는 여인(10원)과 추수하는 여인(50원)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환하게 웃는 표정은 여느 때 북한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보다 밝고 건강미가 넘친다. 이들의 표정은 1947년도 발행된 화폐에 등장하는 노동자와 농부의 엄숙하고 경직된 표정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1958년 농업 및 상공업에서의 사회주의적 개조로 적대적 갈등이 사라졌기 때문에, 공산주의적 인간의 전형은 적대적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되고 ‘서로 사랑하는 고상한 공산주의적 풍모’를 가진 인간형으로 그려야 한다는 문예 사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218) 노귀남, 「문학 속에 나타난 북한의 경제관」, 『북한의 경제』, 한울, 2005, p.255.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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