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1장 우리 옷의 기본형과 시대별 변천
  • 3. 고려시대의 남녀 옷차림
  • [남성의 평상복]
  • 남성의 평상복
김문자

남성의 평상복은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머리에는 조건(검은 두건)을 쓰고 바지, 저고리, 포를 착장(着裝)한 것으로 보인다. 쓰개는 주로 검은 두건을 썼으며, 몽고 복식 영향기에는 남자 평상복을 입을 때에도 몽고식의 편평한 두건(平頂巾)이나 주발 모양의 발립도 착용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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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초상
이제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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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 초상
이조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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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에는 포(袍), 답호(搭胡), 저고리류, 바지 등이 있다.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초상화를 보면 홍색포를 입고 있으며, 깃 가운데 줄이 있는 긴 깃으로 여밈을 깊게 하고 있다. 양옆이 무릎 높이 아래로 트여 있고, 그 사이로 청색의 속옷이 보이며, 가는 홍색띠를 매고 있다. 또한, 이조년의 아들 이포(李褒)의 초상화에도 암녹색의 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포의 구성은 이조년의 것과 같지만 각대를 하고 있고 속옷이 홍색이며 옆트임이 많이 트여 있고 뒤에 늘어지는 것이 더 붙어 있는 점이 다르다.

유물로는 14세기에 만든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金銅毘盧遮那佛) 복장 복식(腹藏服飾)9)해인사는 1997년 3월 불상을 개금(改金)하는 과정에서 의복 11점과 지공 스님(指空, 1300∼1363)이 원경(覺慶) 스님에게 계(戒)를 주면서 내린 문수최상승계법(文殊最上乘戒法)이란 계첩(戒牒)을 발견하였다(『조선일보』 1997년 3월 6일자 46면).이 있는데,10)이 의복들은 요선 철릭의 발원문에 기록된 송부개와 답호의 주인인 이승밀의 인적 사항으로 미루어 135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된다. 요선 철릭(腰線帖裏)은 분홍빛의 고운 세모시로 만들었으며, 일반 철릭과 달리 허리 부위에 주름선이 둘러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치맛주름은 맞주름이며 깃은 이중 깃이고 깊게 겹치는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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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 묘 벽화 인물도-여자상
박익 묘 벽화 인물도-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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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 묘 벽화 인물도-남자상
박익 묘 벽화 인물도-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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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의 묘에 그려진 벽화 인물도에는 깃의 형태가 아주 다른 양식의 포가 나타난다. 위가 편편한 발립을 착용하고 있는 남자상은 오른쪽 여밈을 하고 있으며, 종아리 아래 길이의 둥근 깃에 옆이 트인 포를 착용하고 있는데 옆선에 적색으로 표시된 것은 안감의 색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발에는 화(靴)를 착용하고 있다.11)고부자, 「밀양 박익묘 벽화 복식 연구」, 『밀양 고법리 벽화묘』, 동아대학교 출판부, 2002,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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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선 철릭
요선 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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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호(搭胡)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입던 반비(半臂)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고려 후기에 와서 명칭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답호라는 명칭은 1346년(충목왕 2)에 쓰인 『노걸대(老乞大)』에서 당시 중국인들이 대탑호(大搭胡)와 탑호를 입었다는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후 1352년(공민왕 1) 전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박통사(朴通事)』에서는 탑호(搭護)와 탑홀(搭忽)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를 언해한 16세기 자료에서는 ‘더그레’라고 하였다.12)서정원, 「노걸대 간본들을 통해 본 14∼18세기의 복식 관련 용어 비교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37쪽.

해인사 비로자나불 복장에서 나온 답호는 소색 마포로 만든 이중 깃이며 동정을 댄 자국은 없다. 양옆에 무 를 달아서 옆주름 처리하였고 작은 힘바대를 대어 주름 머리를 몸판에 고정하였으며 위에서부터 약 7㎝ 정도만 감쳐 두고 그 아래는 트임을 주었다.13)권영숙·이주영·장현주,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 복장 복식과 고려 후기 의복의 특성」,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 복장 유물의 연구』, 성보 문화재 연구원, 1997, 129∼141쪽. 문수사 금동여래불상의 복장14)1973년 12월 충남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에서는 고려시대 유물 630점이 발견되었다. 그 중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의상 한 점에 적힌 발원문(發願文)의 연대가 1346년(충목왕 2)으로 되어 있어 고려 말엽의 것으로 생각된다.에서 나온 답호는 소색 고운 모시로 반소매의 옆이 터진 포의 형태이다. 깃은 이중 깃으로 옆 터진 양쪽에 이중 주름을 잡았다.15)유송옥, 「출토 복식 남복(男服)」, 『한국의 복식』, 문화재 관리국, 1982, 255∼256쪽.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시대 남자의 포는 삼국시대부터 입던 긴 저고리형의 곧게 여미는 포와 요선 철릭, 둥근 깃 포, 답호가 공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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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호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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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장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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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반적인 포보다는 길이가 짧은 저고리류가 비로자나불 복장품에서 발견되었다. 먼저 장수의(長袖衣)라고 명명된 것은 길이가 84㎝이고 28㎝의 옆트임이 있으며, 소매통이 좁고 손등을 덮을 정도의 길이이다. 깃은 네모형인데 겉옷 안에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길이가 66㎝의 모시적삼은 네모 깃형의 깃과 섶이 좌우 대칭형이다. 옆선은 일직선으로 내려오고 옆트임이 있다. 소매는 지금의 저고리에 비해 소매통이 넓은 편이다.16)권영숙·이주영·장현주, 앞의 책, 132∼133쪽.

바지는 현재의 남자 바지와 별 차이가 없는데, 군병(軍兵)의 바지는 특별히 밑에 당을 대고 있어 기마(騎馬) 등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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