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1장 우리 옷의 기본형과 시대별 변천
  • 4. 조선시대 남녀 평상복의 변천
  • 남자 평상복
  • 다양한 형태의 포
김문자

포(袍)에는 답호, 액주름포, 철릭, 직령, 도포, 심의, 소창의, 대창의, 학창의, 중치막, 주의 등이 있다.

답호(搭胡)는 소매가 없는 남자 의복이다. 답호는 조선 초기부터 반비(半臂), 전복(戰服)과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답호는 왕과 귀족 계층에서 즐겨 입었으나 중기 이후 일반 선비들에게까지 확대되었고, 말기에는 조신(朝臣)들이 두루마기(周衣) 위에 입어 예복으로 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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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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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주름포
액주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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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호는 조선시대 포 가운데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이는데, 전기에는 반소매에 양옆의 무가 넓고 트였으며 직령이다. 중기를 거치면서 소매가 없어지다가, 후기에는 깃과 소매가 없어져서 모양이 변하고 이를 ‘전복’이라고 하였다. 검푸른 초록, 다갈색 등이 보이지만 초록색이 많다.27)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 『명선(名選)』 중(中), 2005, 85쪽.

액주름포(腋注音袍)는 양쪽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곧은 깃의 직령교임식 포를 말한다. 액(腋, 겨드랑이)과 주름(注音, 주름의 한자 차자 표기)을 합한 말로, 양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옷 이라는 뜻이다. 형태로 볼 때 액주름포는 길과 섶이 의와 상으로 분리되지 않고 옆에 달린 무만 따로 주름잡아 겨드랑이 밑에서 연결하였다.

소매 형태나 트임의 유무와 길이, 고름의 색상과 크기도 다채롭게 나타난다. 솜을 두거나 누비로 구성한 사례가 많으나 계절에 따라 홑, 겹, 솜, 누비의 구성 방법을 달리하여 착용했던 평상복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매 길이와 총 길이가 다른 포에 비해 짧고 형태와 구성이 일정하지 않으며 다양한 양식으로 나타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방한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내부에 입었던 옷으로 여겨진다. 액주름포는 모든 계층에서 입었던 옷이지만 조선 초·중기의 유물에서 나타는 데 반해 임진왜란 이후의 출토 복식 중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릭(帖裏)은 문헌에서 ‘첩리(帖裏), 천익(天益), 첩리(貼裡), 천익(天翼)’ 등으로 나타난다. 한글로는 ‘철릭, 털릭, 쳠니, 쳔닉’ 등으로 표기하는데 허리에 주름을 잡아 상의하상식(上衣下裳式)으로 연결한 직령교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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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릭
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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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릭은 다른 유물에 비해 특히 조선 전기의 것이 많이 출토된다. 기본형에는 변함이 없으나 시대에 따라 상하의 길이나 깃, 소매, 옷고름, 주름 등이 변한다. 소매는 통으로 된 것과 한쪽 또는 양쪽 소매에 단추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도록 된 것도 있다. 전기에는 의(衣)와 상(裳)이 1 대 1 비율이지만 후기에는 1 대 3 비율로 의가 짧아지고 상이 길어진다. 깃은 이중 깃에서 일반 둥근 깃으로, 소매는 착수에서 광수(廣袖, 통이 넓은 소매)로, 고름은 두 개의 짧고 좁은 것에서 한 개의 길고 넓은 것으로 바뀌며, 주름 나비도 잔주름에서 넓게 변한다.28)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 편, 앞의 책, 85쪽.

철릭에는 주로 넓게 짠 끈인 광다회(廣多繪)를 두르는데 계급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품계가 높을수록 홍색(紅色)을 사용하고 낮은 직급에서는 청색(靑色)을 사용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직령(直領)은 깃이 곧은 옷을 말한다. ‘직령포(直領袍)’, ‘직령의(直領衣)’라고도 하며, 단령의 받침옷을 겸하기도 한다. 많은 계층에서 입었으나 후에 하급 관리의 제복이나 악공(樂工)의 상복으로 이용되었다. 형태는 깃의 모양을 제외하고는 단령과 같다. 초기에는 좁은 소매에 네모 깃이고 좁은 사각형의 무가 달려 있다. 중기에는 넓은 소매에 칼깃이며 넓은 무는 위쪽을 뾰족하게 접어서 뒤로 젖혀 입었다. 후기에는 소매가 도포와 같이 두리 소매가 되었으며 깃 궁둥이가 완만하고 무는 완전히 뒤로 젖혀 길에 무의 위쪽을 실로 동여서 고정시켰다.29)김영숙 편, 『한국 복식 문화 사전』, 미술 문화, 1998,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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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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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기록 중 도포(道袍)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김세렴(金世澈, 1593∼1646)이 쓴 「증예조판서곽월신도비명병서(贈禮曺判書郭越神道碑銘幷序)」에 ‘着道袍’라는 구절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1564년(명종 22)에 이미 도포를 착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 말에 쓰인 『학봉집』을 통해서도 당시 평상복으로 도포가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석명(李碩明, 1513∼1583) 묘의 검푸른 색(鴉靑色) 명주 겹도포가 가장 오래된 도포로 보고되어 있다.30)이순원 외, 『이석명 묘 출토 복식 조사 보고서』,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0, 33∼37쪽.

17세기에는 도포의 착용이 전 시대보다 더 보편화되었다. 도포를 도복(道服)이라고도 하는데 종교적인 데 근원을 두고 있다. 길복(吉服)으로는 청색을 입고 평상시에는 백색을 입었다. 서민층에서는 입지 못하였으나 후에 하층민까지 도포를 입고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규제가 잘 지켜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884년(고종 21) 갑신 의제 개혁(甲申衣制改革) 때 다른 소매 넓은 옷과 함께 폐지되었지만, 지금도 제사 지낼 때 제복으로 입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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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대왕 도포
영조 대왕 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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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의 형태는 곧은 깃에 무를 달았으나, 소매가 넓고 뒷길은 허리부터 아래까지 뒤 중심을 트고 그 위에 뒷자락31)도포의 뒷자락을 많은 논문과 저서에서 전삼(展衫)이라고 하였지만 『화영편』에서는 ‘수거(垂裾)’, 『오주연문장전산고』와 『남당초고』에서는 ‘수폭(垂幅)’, 『태학지』에서는 ‘후수(後垂)’, 『규합총서』에서는 ‘뒷자락’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렇듯 지금까지 전삼으로 불러 왔던 것을 각종 문헌에서 ‘수거, 수폭, 후수, 뒷자락’ 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뒷자락’으로 표기한다.을 한 겹 더 달아 말을 탈 때나 앉을 때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허리에는 가늘게 짠 끈인 세조대(細絛帶)를 띠었는데 당상관은 적색·자색, 당하관은 청색 또는 녹색, 서민은 흑색, 상제(喪制)는 백색을 띠었다. 홑도포가 일반적이나 겹도포도 흔하게 사용되었다.

1979년 파계사(把溪寺)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에 금칠을 새로 하다가 도포를 발견하였다.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글에 의하면, 1740년(영조 16) 대법당을 수리하고 영조가 탱화 1,000불을 희사하면서 왕실을 위하여 기도하는 도량으로 삼고 왕의 도포를 내렸다고 한다. 이 도포는 넓은 두리 소매에 네모나게 각진 당코깃이다. 당시 남자 옷에는 사용되지 않는 당코깃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한 궁중 양식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32)이은주, 「장기 정씨(1565∼1614) 묘의 출토 복식과 기타 유물」, 『포항 내단리 장기 정씨 묘 출토 복식 조사 보고서』, 안동대학교 박물관, 2000, 58∼61쪽. 해인사 소장 광해군의 ‘직령’이라고 명명된 포에 대해 ‘중치막’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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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
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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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深衣)는 의와 상이 연결되어 있는 상하연속의(上下連續衣)이다. 홑겹으로 된 포로서 흰색이며 깃 모양은 네모난 것, 둥근 것, 맞여민 것 등이 있다. 소매는 둥글고 깃, 소맷부리, 옷단 가장자리에 검은 선이 둘러져 있다. 심의 각 부분에는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의와 상을 따로 마름질하는 것은 각각 하늘(乾)과 땅(坤)을 상징하고, 상을 열두 폭으로 마름질한 것은 일 년 사계절 열두 달을 상징한 것이며, 선을 두른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뜻하는 것이다.33)이강칠 외, 앞의 책, 600쪽.

심의는 중국에서 시원이 가장 오래된 고유의 복식으로 주(周)나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심의는 고대 중국에서 천자나 제후에게는 평복이었으나 사대부에게는 조복·제복 다음 가는 상복이었고 서인에게는 길복(吉服)이었다. 유교 중심이었던 조선 왕조에 있어 사대부의 연거복으로 유학자들의 숭상이 대단하였으며, 이러한 심의제도는 유학에서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소창의는 깃이 직령이며 무 없이 옆이 트여 있어 세 폭으로 갈라져 있고 착수(窄袖)이다. 신분이 낮은 계층이 주로 착용하였으며, 사대부들은 다른 포를 입을 때 받침옷으로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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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창의
소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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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규수(朴珪壽)가 1841년(헌종 7)에 완성한 복제사(服制史) 연구서인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에도 부인들의 평상복으로 유(襦)를 제안하였는데 “그 제도가 지금 남자의 장유와 같지만 아주 짧고 또 지금 풍속의 부인들 당의와 비슷하지만 조금 넓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동자(童子)의 상복(常服)으로 ‘장유(長襦)’를 쓰기도 한다면서 제시한 도상이 곧 소창의이다. 문헌에 제시된 설명과 도상을 통해 적어도 18∼19세기에는 소창의 형태의 옷을 장유라고 하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34)이은주, 앞의 글, 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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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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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장유와 소창의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소창의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계속 편복포의 표의로 착용되던 저 고리(襦)에서 길이가 길어진 긴 저고리(長襦)가 소창의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창의는 소매가 넓고 옆에 무가 있으며 뒤가 트인 포이다. 앞에서 보면 도포와 같아 도포 대용으로 착용하기도 하였으며 세조대를 맨다.

학창의는 대창의에 검은 천으로 가장자리에 선을 두른 것으로 심의와 같았으나 제도에 차이가 있었다. 세조대나 광대(廣帶)로 묶어 여몄으며 흔히 복건을 쓰기도 하였으나 정자관, 동파관 등도 착용하였다.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 하여 사대부의 연거복으로 쓰였고, 덕망 높은 도사나 학자가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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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치막
중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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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치막의 ‘중치막’이라는 용어는 1550년 사대부의 일기와 1590년대『쇄미록(瑣尾錄)』에서 ‘中赤莫(중치막)’으로 확인된다. 1580년대 순천 김씨 묘 언간에서 중치막의 언문 표기인 ‘듕치막’이 확인되기도 한다. 깃은 직령이며 무가 없고 양 겨드랑이 밑으로 트여 있으며 세 자락으로 되어 있는 옷으로 광수이다. 세조대를 맨다. 사대부가에서는 관복을 입을 때 안에 받쳐 입었고, 일반인들은 외출복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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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기
두루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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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周衣)는 소매가 좁고 옆에 트임 없이 두루 막힌 옷으로, 우리말로는 두루마기라고 한다. 터진 곳 없이 골고루 막혔다는 뜻에서 나온 듯하다. 1830년(순조 30)에는 ‘광수주의(廣袖周衣)’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두루마기의 소매를 넓혀서 만들어 외출복으로 착용한 것이다. 조선 말기 의복의 간소화에 따라 도포, 직령, 창의 등의 소매 넓은 것을 없앴는데, 소창의에 무를 달고 양쪽 겨드랑이 밑 터진 곳을 막으면 주 의가 된다. 문무백관들은 보통 예복으로, 선비나 사인(士人)들은 사복(私服)으로 착용하면서 일반인들에까지 널리 확대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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