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1. 언제부터 옷감을 짰을까
조효숙

최근 우리나라의 영토였던 고조선 북쪽 지역에서 고고학적 유물 자료가 출토됨에 따라 우리나라 직물 생산이 고조선시대에 시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과 동일하거나 중국보다 오히려 앞설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기원전 5000년경의 신석기 유적지인 궁산리 유적에서 가락바퀴와 마실(麻絲)이 끼어 있는 바늘이 출토되었고, 서포항 유적에서도 실을 만들 때 쓰는 가락바퀴가 나왔으며, 신석기 중기 유적지인 곽가촌 유적에서도 다량의 가락바퀴와 직물을 짜는 데 필요한 북이 출토되어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직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어떤 옷감을 직조했느냐가 문제인데, 고조선의 신석기 유적지인 평양시 삼석 구역 호남리 유적에서 출토된 질그릇 바닥의 뽕잎무늬로 보아45)조선 기술 발전사 편찬 위원회, 『조선 기술 발전사』 원시·고대편, 1997, 17·133·134·171쪽. 이미 고조선 때 양잠을 알고 있었으며 견직물도 생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밖에도 고조선의 유적지에서 몇 점의 직물 조각이 발견되었다. 길림성 영길현 성성초 유적 17호 돌널무덤에서는 양털과 개털을 섞어서 짠 평직(平織)의 모직물 잔편(殘片)이 나왔고,46)吉林省博物館·永吉縣文化館, 「吉林永吉星星哨石棺墓第3次發掘」, 『考古學集刊』 3,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3, 120쪽. 대동강 유역의 정백동 1호묘 유적에서는 말 꼬리털로 짠 모직물과 평직의 겸(縑)이 출토되었으며,47)조선 기술 발전사 편찬 위원회, 앞의 책, 68∼69쪽. 석암리 유적 에서는 겸·면주(綿紬)·사(紗)로 보이는 직물이, 오야리 유적 등에서는 겸·사·나(羅)의 작은 조각이 발굴되었다. 부여의 유적지인 길림성 모아산 유적에서는 중조직(重組織)의 금(錦)과 평직의 사와 견(絹)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는 고조선시대부터 다양한 견직물과 모직물 생산이 가능하였음을 입증해 주며, 『삼국지(三國志)』에 “부여 사람은 외국에 나갈 때 증(繒)·수(繡)·금·계(罽)를 즐겨 입는다.”48)『삼국지(三國志)』 권13, 오환선비(烏丸鮮卑), 동이(東夷) 제30 부여(夫餘).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어떤 옷감을 짰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인 문헌 자료를 살펴보자.

『한서(漢書)』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농사짓고 누에치며 직물을 짰다.”49)『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연조(燕條).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기원전 12세기경에 우리 조상들이 이미 견직물을 생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삼국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부여인들이 견직물인 증·수·금은 물론 모직물인 계까지도 이미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대인은 여우나 담비가죽으로 만든 가죽옷(裘)을 즐겨 입는다.”50)『삼국지』 권13, 오환선비, 동이 제30 부여.는 기록으로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구(裘)를 지배층에서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남쪽 삼한(三韓) 지역의 직물 생산 실태에 관하여도 『삼국지』, 『후한서』, 『진서(晋書)』, 『통전(通典)』 등의 중국 문헌에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다. 즉, “마한 사람들은 포(布)로 만든 포(袍)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마한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를 쳐서 면포(綿布)를 만들 줄 알았다.”, “변진 사람은 폭이 넓고 고운 포(廣幅細布)를 짜서 입는다.”, “변한 사람들은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는 법을 알아 겸포(縑布)를 생산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1)『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 열전 제75, 마한 ; 『삼국지』 권13, 동이 제30 변진 ; 『통전(通傳)』 권185.

앞의 자료에서 우리나라는 이미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인 부족 국가 시대부터 다양한 직물을 생산하였으며, 북쪽의 추운 지역에서는 증·수·금· 계 그리고 각종 모피류를 옷감으로 사용하였고, 남쪽 지역에서는 포· 광폭세포·면포·겸포와 같은 옷감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옷감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삼한에서 생산한 겸포와 부여의 금·계이다.

매우 가는 실로 물도 새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짠 평견직물인 겸포를 이미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선물이나 상품 등의 용도로 귀하게 사용되었다. 한나라 유물 중 날실(經絲) 밀도가 씨실(緯絲)의 두 배 정도 되는 치밀한 평견직물인 겸이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진한과 변한에서 생산한 겸포도 이와 유사할 것으로 추측한다.

금은 다양하게 염색한 실로 중조직에 의해 문양을 표현하는 고도의 제직(製織) 기술이 필요한 견직물이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금직물의 명칭이 이미 춘추 시대의 문헌인 『시경(詩經)』에 금의호구(錦衣狐裘), 의금(衣錦), 상금(裳錦), 패금(貝錦)과 같이 기록되었으며, 전국시대의 강릉 마산(江陵馬山) 1호묘, 서한(西漢)시대의 장사 마왕퇴(長沙馬王堆)에서도 금이 출토되었고, 중앙아시아의 누란, 아스타나, 니야의 유적지에서도 후한(後漢)에서 당(唐) 시기에 해당하는 다수의 금 유물이 발견되었다.

계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사(毛絲)로 짠 모직물로, 무늬가 없는 소계(素罽)와 무늬가 있는 화계(花罽)가 있다. 계 유물 역시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니야, 누란 유적지에서 다량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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